늦은 밤길은 위험하다. 그것은 모든사람들에게 똑같이 통용되는 불문율이다. 더군다나 늦은 밤 스산한 골목길은 위협적이기까지 한데, 뒤에서 [뚜벅뚜벅] 누군가 뒤따라 오는 소리까지 들린다면 상당히 두렵고 진땀이 바싹바싹 솟아오를 만큼 박진감 넘치는 스릴까지 동반된다. 심장이 덜컹덜컹 거리고 속이 미식거리는데다 뇌가 덜렁덜렁 되기까지 한다. [뚜벅뚜벅] 자박거리는 내 발걸음 소리를 바짝 뒤따르는 뚜벅이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담백하고 한가한, 발자국이 선명히 남을듯 또렷한 발걸음 소리는 적당하게 기온이 오른 훈훈한 이른봄밤에 부는 청량하고 시원한 느낌의 바람만큼이나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 줄듯도 하지만,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주위가 어둑하고 내뒤를 밟는듯한 의식이 지배적인 이순간에는 그닥 반가운 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잔뜩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공기 사이로 퍼지는 소리는 어딘가 음산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 [뚜벅뚜벅뚜벅] 자박거리는 내 발걸음이 속력을 높이 가할수록 뒤에서 따라오는 이의 발걸음 소리도 점점 높아만 간다. 마치 나를 비웃듯 빈골목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는 내게 이젠 더없는 공포다. [뚜벅뚜벅뚜벅] 신경을 너덜너덜 넝마가 되게 만들어 버리는 그 발걸음 소리에 내 걸음은 더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제기랄. 이렇게 되면 뛰는수 밖에 없어 라고 생각하는 순간 뒷덜미에 강한 힘이 실린 억센손길이 덮쳐왔다. "윽-" 커다랗고 서늘한 손의 기운이 목덜미를 잡아채더니 나를 강제로 막다른 골목 끝으머리로 잡아당겨댔다. [버둥버둥] 절박한 심정으로 몸을 허우적 거렸지만 우악스런 손길은 좀체 누그러들 기미 없이 여전히 거칠기만했다. "뭐야! 이거놔-!…" 안돼! 라고 말하려는 순간 [퍽-]하고 타격음이 들렸다. 배가 터져버릴 듯한 통증이 느껴지며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믿을거라곤 다리힘 뿐인데 배를 한대 얻어맞고 나니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동공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이 멍하게 보였다. 진한 여운을 남기며 퍼지는 통증에 소리를 지르려던 입조차 조개처럼 꽉 다물어버렸다. [끅끅] 거리는 기괴한 신음성의 고통을 전하는 내 소리가 막다른 골목 한쪽 구석에서 불쌍하게 울렸다. "아… 하… 으―" 단 한대를 맞았을뿐인데 아직도 아릿하게 퍼지는 고통의 쓴맛에 옴짝달싹을 못하고 있는 내 얼굴 위로 달을 등진 커다란 남자의 그림자가 길다랗게 내려앉았다. 본적도 만난적도 인연도 없었던 상관없었던 이가 단한번의 폭력과 잠시 휘두른 거친 손길로 나와 적이 되었다. 악의적으로 눈을 부라려보지만 진하게 퍼져오는 아픔에 볏짚단처럼 힘없이 그의 마음대로 몸이 후들렸다. "― 뭐 ― ― 하 ―! ―" 뭐하는거야라고 물으려던 내 입이 딱 멈춰버렸다. 오늘 처음만난 얼굴도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한 무식한 무력을 행사했던, 나보다 덩치가 두배가량 큰 남자의 손이 거침없이 내 옷속을 파고 들었다. 뒤가 막힌 골목의 코너로 몰린 나는 딱 한대 맞은후로 단단한 남자의 힘에 짖눌려 꿈틀거려 보지도 못한체 어거지로 끌려와 옷이 벗겨지는 수모를 당하고있다. 진짜 뭐하는거야. "너― 뭐― 읍-!!!" 거침없는 손길로 파고드는 남자의 행동에 잠시 할말을 잃었던 내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어둠 속에서 가만히 미동도 없던 그의 얼굴이 내 얼굴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그리고 잠시 텀이 있는 사이 한마디 내뱉기도 전에 열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덩어리가 밀려들어왔다. 머리 위로 확 풍겨오는 남자의 진한 체취. 낯선 남자의 거침없는 손길보다, 거친키스보다 코끝을 산만하게 만드는, 정신을 몽롱하게 어지럽히는 푸른빛의 서늘한 체취가 너무나 무서웠다. "하아.. 하아... 하아...." 단추를 헤치고 셔츠 사이를 파고든 시원하고 커다란 손이 몸 이곳저곳을 더듬는 사이 밀착하듯 내 하반신에 딱달라붙은 그의 하체가 옷을 입은체로 나를 유린하듯 비척거렸다. 옷이 쓸리는 소리가 이렇게 음란하게 들릴줄 미처 몰랐다. 남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곳에 그의 손이 닿았다 떨어질때 마다 눈물이 솟구쳐 올라올것 같았다. 왜이래.싫다고 고개를 저어도 몸을 비틀어도 단단한 몸을 가진 남자에게 통하질 않는다. 피부를 쓸고가는 그의 손길이 아래로, 아래로 낙하할때 내 심장도 아래로 아래로 낙하해서 땅바닥 아래로 철푸덕 소리를 내며 툭 떨어져버렸다. "으으음.. " 몸을 희롱하는 오른손이 있다면 음탕하게 내몸을 비비는 하체가 있다면 왼손은 내 얼굴을 움켜쥐고 그의 혀를 받아들이기 좋도록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의 온몸이 내게 무기로 다가온다. 나의 온몸이 그의 희롱의 대상이 된다. 그만해. 안돼. 싫어. 제발. 속절없이 몸을 버둥이지만 그럴때에도 그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나를 단단히 움켜잡기만 한다. 그러다 안되면 [퍼억-] 긴 타격음과 함께 피부가 떨어져 나갈정도의 아픔을 선사하며 무력을 행사한다. ".... 하 ...." 쌕쌕이는 내 가쁜 숨결사이로 그의 입술이 덮쳐온다. 순간 퍼지는 그의 체취는 여전히 살떨리도록 새파랗게 날이 서있는것 같아서 서늘하고 무섭다. 얼얼한 피부를 쓰는 그의 손이 좀더 거칠어 졌을쯤 내 바지가 아래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이미 서있을 힘조차 없이 얻어맞은 나를 그가 안아들고 있다. 흐느적대는 다리 한쪽이 그의 탄탄한 어깨에 실렸다. 다리 한쪽이 그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내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로 왼쪽팔을 밀어넣은 그가 나를 끌어안은 기이한 자세가 되자 허리를 쓸던, 가슴을 더듬던, 아랫배를 배회하던 그의 오른손이 내 다리사이에 있는 물건을 그려쥐었다. 옷을 입었던체로 무던히 자극을 받았던 내 물건은 한번의 반항없이 피가 확 몰리는 느낌이 나더니 벌떡 일어섰다. 수치심에 얼굴에 피가 몰렸지만 그는 그것따윈 관심도 없는듯 나에게 사정을 강요하듯 물건만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했다. "아아아아.... 하앗 ....!" 내소리가 아닌것 같은 이상한 비음이 울려퍼지고 순간 몸에서 열이 싹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다. 그의 손에서 농락 당하던 물건이 뿌연 액체를 뿜어내자 어둠속에서 표정없이 있던 그의 얼굴이 조금 웃은것도 같다. 이건 강간이야. 다음 동작은 설명해 주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알고있다. 옷속을 파고 들때와 다름없이 거침 없는 동작으로 그의 손이 내뒤를 파고들었다. 간질이듯 축축하게 젖은 손이 뒤에서 움직거리자 내 피부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찔거렸다. [쭈뼛-], 그의 손끝이 몸안으로 침범하자 온몸이 뻗뻗하게 굳어버리며 흐느적 거리던 몸 전체에 근육이 벼락이라도 맞은듯 빳빳하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윽" 손끝이 조금 들어오더니 쑤욱- 미끌거리는 손가락 하나가 온전히 몸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조금 움직거리곤 두번째 손가락이 잠시후엔 세번재 손가락이 들어와 이리저리 구겨진 카펫을 펴듯 주름진 곳을 하나하나 세세히 더듬어가며 펴듯이 만진다. 배를 맞아 미식거리던 속이 더욱 뒤틀려갔다. 금방이라도 토사물을 개워낼것 같은데 끅끅 고통섞인 신음만 흘릴뿐 빈속이 울렁거리기만 한다. 지독한 이물감이 한순간 싸악 빠져나가고 몸이 자세를 가다듬듯 그의 손에 의해 한번 들썩여졌다. 그리고 뜨거운 그의 물건이 나를 향해 빳빳히 고개를 쳐들었다. "하악" 손가락이 순조롭게 들어왔던것과 달리 범인의 크기와는 사뭇다른 그의 거대한 물건이 내몸속을 뻑뻑하게 가르며 밀려들어왔다. 뱃속이 불편해지며 못먹을 음식을 삼킨것 처럼 답답하다. 어떻게든 그만두게 하기위해 바동거려 보지만 그럴수록 내 몸안에 자리를 잡은 그의 든든한 물건으로 인해 고통만 더 커질뿐이다. 찔러대는 그와 피하려고 버둥이는 나. 짙은 어둠이 깔린 골목길 구석에서 처절하게 움직여보려 하지만 손가락 끝에 들어가는 힘조차 내 힘이 아닌듯, 그의 품안에 안겨서 무너져 내리는게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는 내몸이 내것 같지 않다. "아..으...읏...하아..." 피부가 맞부딪혀 질척이는 소리가 귓전을 아프게 때렸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그렇지? 애써 외면해 보려해도 덜렁이는 몸이 내것이 맞음을 부인할 길이 없다. 그만. 소리라도 한줄기 내질러야 하는데 제대로 된 반항 한번없이 타인의 품안에 안겨 범해지고 있다. 위 아래로 몰아붙이던 그의 피스톤질이 더욱 빨라질 무렵 몸속에 뜨거운 액체가 화악 퍼져나간다. 끝났다. 스르륵 내 몸에서 그가 빠져나갔다. 바지가 입혀지고 셔츠의 단추가 잠긴다. 찬바닥에 나를 내려앉힌다. 멍한 내눈에 표정 하나 없는 그의 무기질 얼굴이 잠시 비췄다 사라진다. 냉혈한 같은 그 무서운 눈이 내눈과 오래도록 얽혀 있었지만 말 한마디 듣질 못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가 돌아서서 좁은 골목을 빠져나갔다. 바로 코앞에서 범인이 도망을 갔지만 한참동안이나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했다. "......... 하 ... 하 ... 하 ... 하하 ......큭 ... 하하하 .. 하하하하하하하 " 파르르 턱이 제멋대로 떨렸다. 바르르 다리가 제멋대로 후들거렸다. 손이 축 쳐진체로 바닥에 닿아 있었다. 다리는 힘 한줄기 들어가지 않은체 널부러져 있다. 허리가 콕콕 바늘로 찌르듯 아파왔다. 몸이 두개로 쫙 갈라질듯 고통이 엄습해 왔다. 머리가 지끈거린 와중에 실성한 이처럼 웃었다. 영혼이 이름도 모르는 이에게 범해졌다. 단지 몸뿐이었는데 내 영혼이 나도 모르는 사이 검은 흙탕물을 뒤집어썼다. 흑단처럼 까만 진흙물을 덮어쓴 내 영혼이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빼앗긴 이제는 짙푸른 그의 체취를 뒤짚어쓴 몸을 신나게 비웃고 있었다. "막내야" 세상이 끝날줄 알았다. 찬바닥에 절반으로 쫙 갈라진체로 죽어 버릴줄 알았다. 눈뜨고 일어났을때 도깨비 방망이 뚝딱 두드리고 나면 금덩이가 우두두 떨어지는 신기한 일이 일어나듯 뭔가 변할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무일도 없었다. 언제나와 같은 평범한 일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어두운 골목길을 두려움에 치를 떨며 돌아오는 것이 달라졌다다. 그외에는 눈꼽만큼의 변화도 없었다. "임마"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며 쏟아지고 있었다. 그 햇살은 모든이에게 공평하게 고루고루 비추어 주었고, 내게도 빛을 내려주었다. 너무 밝아서 인상을 찡그릴 정도로 강한 햇살이었다. 어제의 태양은 오늘도 내일도 모래에도 그 다음날에도 언제나 처럼 뜰것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빛나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데 언제나처럼 선배님이 나를 불렀다. 탱탱거리는 플라스틱 물통 소리만 들어도 왜 부르는지 묻지 않아도 될것 같다. "주세요" 물한방울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비워진 빈통을 들고 정수기가 있는곳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햇살은 뜨겁게 나를 비춘다. 그건 강간이었다. 어두운 밤 아무도 목격한이 없는 지독한 강간. 당장이라도 경찰서에 달려가 나를 범한 그녀석을 잡아달라고 정당하게 요구해야 하겠지만 내가 향한곳은 집이었다. 찬바닥에서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간곳은 법에 호소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은것도 아니고, 신고하기 위해 증거를 수집하려고 병원으로 간것도 아니였다. 말할수 없었다. 말해야 하는데 그래야 더이상 나쁜짓을 나뿐 아니라 다른이에게도 못할텐데 내 머리는 누군가에게 알려 나와 같은이가 없도록 하기 위해선 신고해야 한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그럴수가 없었다. 움츠려드는 몸, 오그라드는 심장, 꽉 쥐어진 주먹이 아릿하게 퍼지던 고통을 기억해냈다. 두려움은 용기보다 강했다. [쪼르륵] 투명한 물소리를 내며 비워진 물통에 담기는 물을 봤다. 내가 누군가에게 끌려 강간을 당하건 안당했건 물은 언제나 맑고 투명하다. 변한건 그저 움츠려드는 나하나 뿐이다. 응? 물을 받고 있는데 뒤에 누군가 다가와 머리 위로 작열하는 태양을 가려준다. 흐음. 가려준게 아니라 놀리려는것 같다. 기분이 일순간 가라앉는다. 뭐야이건.통유리 문을 통과해 그대로 쏟아지는 햇살을 막아선 이는 굉장히 장신이었다. 내뒤에 서서 손으로 내가 자신에게 어느만큼 오는지 가늠해보고 있는 장난스런 모습이 까만 그림자를 통해 또렷이 보였다. 뭐야? 물을 다 받고 뒤로 휙 놀아서며 내 뒤에서 장난스럽게 키를 비교하는 이를 눈을 치켜뜨며 노려봐줬다. 젠장. 머리 위로 확 풍기는 새파랗게 날이선 남자의 체취가 어두운 밤의 기억을 되살렸다. 빤히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안면이 있는 익숙한 것이었지만 머리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얼음알갱이 같은 체취가 좀더 익숙했다. 커다랗게 뜨여진 눈이 한참이나 그를 바라봤다. 악연이군. "........ !!!!!! ......" "........." 조용히 입꼬리에서 호를 그리고 있던 내뒤에 섰던 남자의 웃음이 조금씩 사그러들었다. 반대로 [키득키득] 재미난 구경이 난듯 선배님들이 몰려와 나와 그의 주위를 빙 둘러싼체로 조그맣게 키득이고 있었다. 장신이 아닌 나의 키를 대놓고 놀리는 이는 꽤 많았다. 미운 행동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기에, 그런 상대가 나타나면 적당히 비꼬아주거나 따지듯 떽떽거리곤 했었다. 오늘도 그럴거라고 생각했는지 주위에 와글와글 사람들이 모여들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인다. 그러나 그에게 화를 내기는 커녕, 말 한마디 붙이지 않고 치켜 떴던 눈을 내리깔고 그대로 스윽 지나쳐 밖으로 나와버렸다. "어? 남지웅-!! " 말 없이, 소리 한번 없이 그의 시선에서 도망쳤다. 사물을 뚫고 제갈 길을 휑하니 가버리는 유령이 된듯한 나를 부르는 선배님의 소리가 들렸지만 못들은척 지나쳐버렸다. 단단히 얽혔던 시선 한번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수 있었다. 아니, 훨씬 전부터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다만 코앞에서 대면을 하자 그가 누구인지 헷갈려버렸다. 우영원. 그는 얼마나 나를 비웃을까? 축구선수 씩이나 되는 녀석이 남자에게 당해버렸으니, 같은 축구선수라는게 꽤나 비웃음을 사겠지. 한국축구의 기둥이라는 그가 길바닥에서 강제로 자신과 같은 같은 남자를 거기다 축구선수인 더불어서 같은 팀선수를 강간하다니 이것도 꽤나 비웃음 살만한 일이지만. "야, 막내야-" "네" "어우, 우리 막내 상처받았구나. 쯧쯧, 나쁜놈들. 내가 보듬어줄게. 이리와." "괜찮아요" 담벼락 아래에 구석진곳에 숨어있는 나를 용케도 찾아낸 선배님이 나를 위하는척 한다. 우영원의 행동이 내 최대의 콤플렉스를 건드린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사내 녀석이 뭘 그런걸로 쫌생이 같이 빌빌거려' 라고 했을 보통때의 선배와 달리 무척 사근사근하다. 나를 안으려는 선배를 피해 더욱 구석으로 몸을 움츠리다가 부들부들 떨고있는 내 팔을, 팔 못지않게 덜덜 흔들리고 있는 다리가 보였다. 하아. 한심해라. "야, 그러지 말고 가서 콱 한대패줘" "아뇨, 그냥 여기 혼자있을래요" 거의 울상이 다된 내 표정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 과도한 감정 표현과 자기 의사에 떨떠름해진 선배님의 얼굴이 보였지만 그런거 신경써줄 틈이 없다. 바들거리는 심장이 오그러들었다 빵빵하게 부풀어올랐다 하는것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선배가 가는 소리가 들리고 내머리고 [쿵-] 조그맣게 벽을 찧었다. 벽에 머리를 부딪힌 고통보다 지끈지끈 머리 내부에서 피어나는 고통이 더 심했다. 무릎을 세워 뜨끈뜨끈 열이 오르는 머리를 감싸쥐고 엎드렸다. 이 몸은 아직 우영원이란 인간의 손길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아, 강간범이 우영원이었다니.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지웅아 연습해야지" "어, 갈게" 하얗게 질린체로 태양이 작열하는 운동자에 나서자 감독님 표정이 일그러지셨다. 축구는 단체경기다. 그러면서도 개인기가 아주 많이 요구되는 경기이기도 하다. 오른쪽 날개를 맡고 있는 내가 하얗게 질릴만큼 자기 관리를 하지 못했다는것은 나 스스로에게도 큰 문제가 되지만 팀전체로 봤을때 마이너스다. 그런데 같은 진영을 향해 공격해야 할 사람 중 하나가 나를 강간했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수 있는 둘만의 일. 마주 선 그사이로 흐르는 뻑뻑한 공기가 내생각이 진실임을 증명하고 있다. "어디아파?" "아니요" "뛸수있어?" "네" 코치님에게 힘차게 대답하는 목소리와 달리 여전히 얼굴이 하얗게 떠있다. 적어도 그만큼은 뛰어야 되지 않겠나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너무 꿈이 크다. 우영원. 우영원. 저기 저 앞에 보기좋은 체격과 골격을 가진 남자. 나와 마주치면 묘하게 인상을 찌푸리는 그. 오늘 처음 만났지만 이야기라면 정말 질릴만큼 들었다. 전국중학축구 챔피언이었다. 그때부터 각계의 주목을 받으며 급성장하더니 고등학교에 올라가기가 무섭게 청소년 대표팀에 차출됐다. 물론 청소년 대표에 고교생이 꽤 있지만 1학년이 그것도 센터 포워드로 기용되는건 거의 드물다. 청대에서 좋은 성과를 내자 올림픽 대표에서 그를 부르는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는 고등학교 첫해에 청대, 올대, 국대 세곳에서 모두 뛰는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했다. "지웅아" "네?" "어디아프냐?" "아니요" 허옇게 질린 내얼굴이 보기 안쓰러운지 아니면 줄창나게 운동장을 뛴후인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내가 이상스러워서인지 선배님이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앞으로 어떻게 같이 뛸까 태산같던 걱정이 막상 연습경기 하나 하고나니 조금은 사라져 다행이라지만 빈번히 그와 마주해야할 앞날이 여전히 걱정스럽기만 하다. "남지웅" "응?" "감독님 호출" 얼굴색이 그렇게 확연하게 허연걸까. 국가대표 대항전. FIFA 공식 A매치데이와 더불어 월드컵에 참가하기전 조율을 맞추기 위해 모인 국가대표팀의 막내인 나는 청소년대표와 올림픽대표를 왔다갔다 하던 사이 성년이 되어 국가대표의 부름을 받았다. 내가 한참 청소년대표를 하고 있던 무렵 우영원은 청소년대표를 떠나 국가대표 붙박이로 A매치에 나갔었으니 우리는 딱히 만날일이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세계 유수의 축구클럽에서 우영원을 붙잡기 위해 엄청난 대우를 해주겠다는 러브콜을 때려댔지만 그가 간곳은 그에게 거액의 연봉을 주겠다고 했던곳이 아닌 자신을 테스트 하겠다는 콧대 높은팀이었다. 물론, 그는 테스트에 당당히 합격했고 신체검사에도 이상무를 받았으며 그해 신인왕, 득점왕, MVP등 상이랑 상은 모두 휩쓸며 연봉 100% 인상으로 재계약했다. 거기다 멀끔한 얼굴을 지닌 덕에 리그내의 선수중 인기가 단연 높다라고 표현할 만큼 넘치는 매력을 과시한다. "저 부르셨다고해서 왔는데요" 감독님 호출이래서 갔더니 감독님은 없고 보면 내속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우영원과 코치님만 나란히 있다. "어, 감독님은 잠깐 나가셨고 다른게 아니라 네방 침대하나 비었잖아?" ".......................... 네 ...... " "룸메이트다. 아까 얼굴은 봤지? 하기는 영원이가 워낙 유명해야지" 유명하지. 암요. 광고도 수십개 찍고. 그런데 유명한거랑 룸메이트랑 무슨 상관입니까? 코치님은 실없는 사람처럼 허허 웃으며 내쪽으로 우영원을 슬쩍 밀어붙인다. 고등학교 졸업후 약 2년간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 나가있던 우영원이 대표팀 경기에 줄기차게 차출됐지만 대단한 옹고집인 그의 팀은 그를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끈기와 인내의 결정체라고 불리는 강국장님이 약 2년 4개월을 조르고 조른끝에 콧대높은 옹고집 프리미어 리그의 챔피언팀을 상대로 겨우 대한민국의 월드컵 준비를 위해 역대 최강이라고 불리는 스트라이커를 차출해내고야 말았다. "............" "............" 우영원도 나도 마주보는 침대에 누워 서로 말없이 있었다. 룸메이트란다. 적과의 동침이라. 맹수와의 동침도 이것보단 무섭지 않을거다. 말도 안돼. 어째서 내방이 가장 위험해질수가 있는거지? 흑단처럼 까만 진흙탕 물을 뒤집어쓴 내 영혼이 빈껍데기의 나를 보며 씨익 비웃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 까만 흙탕물 뒤집어쓴 영혼, 짙푸른 그의 체취를 휘감고 있는 몸. 삼박자가 척척 맞아 떨어지며 내가 왜 살아야하는지를 물으며 나를 몰아붙인다. 그냥, 확 창문열고 뛰어내려버려. 그게 너를위해 더 좋아. 내영혼의 비웃음이 머리를 아프게 울렸다. 왜 사는 걸까. "좋은아침" "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밥을 푸고 있는 나를 보며 동기하나가 인사를 한다. 결국 한숨도 못잤다. 뒤척임도 없이 손가락 까닥할수도 없이 가위에 눌린듯 숨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를 반복하고 나니 아침이 밝아와 있었다. 밤도 별거 아니였어.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 나와 달리 2년전 주요멤버가 그대로 있는 대표팀에서 너무나 순조롭게 적응하고 있는 우영원은 저쪽 테이블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최하 5살은 많은 어르신들과 화기애애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식사중이다. 누가 맞은놈 보다 때린놈이 더 불편하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잡히면 목아지를 확 따버릴거다. "너 정말 괜찮겠어?" "네" 정말 밤도 별것 아니였다. 꼬박 이틀간 잠을 못잤지만 사흘째 부터는 스르륵 새벽녘쯤 잠이 들었고 어제, 오늘은 8시간씩 푹 잘도 잤다. 오일간 지내본 우영원에게서 알아낸것은 녀석이 내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시선이 엉키며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뻑뻑한 공기가 내 목을 죄여오지만 그것만 뺀다면 괜찮았다. 아니 괜찮아야했다. 가장 좋은 복수는 내가 행복한 것. 나는 행복해 질거다. "얼굴이 허옇다. 알고있어?" "괜찮아요. 못하면 감독님이 빼겠죠" 불만스러운 얼굴로 인상을 마구마구 찌푸리는 선배에게 대충 대거리를 해주고 내 자리로 가서 서자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경기는 시작되었고, 적은 이제 더이상 적이여서는 안되는 동료여야했다. 최전방 스트라이커와 오른쪽 윙.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 내 포지션은 왜 윙일까 윙백도 자신있는데. 한심스런 한숨이 새어나올 무렵 내앞으로 상대팀 공격수가 눈에 힘을 빡 준체로 뛰어온다. [툭-] 산만하게 페인팅을 해대는 상대를 봐주기가 싫어서 슬쩍 공을 위로 띄웠다. 오른쪽 발 안쪽에 안착하는 공을 산만한 상대팀 공격수를 피해, 하프라인을 넘어 오른쪽 진영 깊숙히 들어갔는데 패널티 박스안에 우영원이 보였다. [툭툭] 발끝에서 서글서글 하게 공을 차고 있는데 뒷통수만 보이던 우영원이 내쪽으로 스윽 돌아보는게 보였다. 진하게 얽히는 시선을 그대로 놓아둔체 [툭-] 가볍게 패널티 박스안으로 센터링을 올렸다. 녀석에게 떨어지던 아니던 난 내 할일은 다했다. [퉁---, 툭---] 오른발로 재주를 부리듯 내가 보낸 공이 우영원의 발끝에서 가볍게 두번 튕겨졌다. 허벅지로 트래핑한 공을 발끝으로 살짝 방향을 틀더니 우영원은 조금의 망성임도 없이 [휙-------------] 몸을 돌리면서 그대로 슛을 날렸다. 터닝슛 폼이 일품이다. 그런데다 앞선 공갖고 놀기도 일품이다. 공은 바람을 [쉭] 가르며 골키퍼의 안타까운 시선을 피해 [철썩-] 골대 그물망에 깊게 꽂히면서 네트를 흔들어댔다. 공의 움직임은 마치 내몸을 가르고 들어왔던 그의 행동처럼 거침없고 날카로웠다. 전반 시작 5분도 채 안된 상황 한국의 첫공격포인트는 근 2년만에 대표팀에 복귀한 우영원의 골이었다. [펄럭-] 쥐색의 커다란 종이 위에 [환상의 콤비] 라는 큼지막하게 박힌 유치찬란한 문구 옆에 나와 우영원의 얼굴이 나란히 찍혀있는 사진이 보였다. 환상의 콤비? 그래, 연습게임과 A매치데이의 경기 그리고 여러나라와 친선경기에서 한달간 합숙을 3경기에서 7골을 만들어 냈으니 환상의 까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봐줄만한 공격수와 도우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왜 큼지막한 사진과 유치찬란한 문구가 몸서리치게 싫은걸까. "씨발" 욕이 절로 나오고 얼굴이 알아서 일그러졌다. 신경질적으로 쫙 펴져있던 신문을 둘둘둘 말아접고 그대로 문을 향해 던졌다. [달칵] 소리가 들렸지만 후회하지 않았고 팔은 뒤에서 앞으로 거센 반동을 주었으며 손에 들려있던 신문은 문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퍽-----------] "........................(씨발)....." 연속해서 씨발이라는 말이 터져나왔지만 두번째 욕은 입안에서 그저 웅얼거렸을 뿐이다. 나의 룸메이트. 근 한달간 함께 먹고, 자고, 입고, 본 나의 룸메이트 우영원이 시간을 재기라도 한듯, 내가 신문을 냅다 던진 그 순간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당연히 우영원의 수려한 얼굴 위로 둘둘 말린 두툼한 신문뭉치가 벼락처럼 내리꽂혔고 그걸 맞은 우영원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으나 얼굴은 조금 늦어버려서 뺨을 맞듯 신문을 직격탄으로 맞아버렸다. 속이 욱씬하고 싸하게 아픔을 전해왔다. "불만 있으면 말로하지" 어깃장을 놓고픈 마음이 발끈 솟아오르도록 만드는 우영원의 눈길이 나를 가소롭다는듯 비껴뜨여 있었다. 삐딱해도 그냥 삐딱한게 아니라 사람을 내려보는 그런 비스듬한 눈길인데다, 입꼬리까지 쓰윽 올라간것이 정수리를 콕 찍으면 오는 찌릿한 전율같은 아픔을 줬다. 불만이 있으면 말로하라?! "벙어리라도 된 모양이군" 한없이 진중한 목소리와 달리 비꼬일때로 비꼬인 나의 전혀 친애하지 않는 룸메이트는 자신의 매끈한 얼굴에 내리꽂혔던 신문뭉치를 [삭-삭-] 소리가 나도록 반듯하게 접으며 입을 꽉 다물고 있는 나를 다시금 내려다봤다. 방에는 침대와 그옆에 작은 테이블을 양쪽에 뒀으며 한쪽 테이블 위에는 전화기를 반대쪽 테이블에는 스탠드를 뒀고 붙박이장 두개가 방안쪽에 나란히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붙박이장을 중심으로 찍어놓듯 대칭으로 모두 두개인 방안에 [침대도, 붙박이장도, 테이블은 두개 한세트가 역시 두개였으며, 이불도 세트였고, 스탠드도, 전화기도 모두 똑같은것이 두개씩이었다] 유일하게 하나뿐인것은 욕실 뿐이었다. "네가 ... 강간범이지?" 불만이 있으면 말하라는 우영원의 말을 따라 나는 한마디 물었다. 중간에 어색한 떨림은 나의 멍청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질문이 겨우 끝나자, 흔히들 쓰는 표현으로 죽음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나의 힘겨운 질문에 입꼬리를 둥글게 말아올리고 있던 우영원의 얼굴에 순식간에 핏기가 싹 가시며 뻗뻗하게 굳어가는 표정은 '내가 강간범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것 같았다. 마주서면 내게 확 풍기는 그 파란 얼음 알갱이 체취는 들이마시면 폐가 얼어버릴것 처럼 시린 그 체취는 우영원의 것이 틀림 없었다. ".... 욱 - ...." 대답을 듣지도 못했다. 그저 푸르스름한 빛깔을 분출하며 하얗게 질려가는 우영원의 표정만으로 모든것이 확연했다. 그것만으로 내몸에서는 반응이 일었다. 역겨움. 혐오감. 증오. 저주. 끊없이 울컥거리는 심장. 숨을 마구 들이마시려는 폐. 정신없이 빙글거리는 머리. 눈앞이 멍해지며 세상이 빙빙 도는 경이롭기까지한 균형감각이 사라져버리는 경험. 벌떡 일어서서 어질렁한 머리를 억지로 끌고 욕실로 튀어갔다. ".... 우욱 - .... " 터져나오는 토사물 속에서 아침에 먹었던 것들을 고스란히 확인할수 있었다. 내가 밀전병도 먹었던가. 해서는 안될 여유로운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 우욱. 입안이 더러움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쓴 위액이 하얗게 밀려 올라왔다. 한번 구역질 할때마다 눈물도 찔끔찔끔 함께 새어나왔다. 후들후들. 몸에 힘이 없어서 변기를 잡고 웩웩 대다가 몸을 일으키니 거울 속에 멍한 남자하나가 나를 보고 있었다. 눈에 핏발이 서있는,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어서 마치 걸어다니는 시체같은 그녀석은 나였다. [쏴아아-] 텁텁한 입안을 물로 씻어내고 밖으로 나갔는데 내가 욕실로 튀어갈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하얗게 질려있는 우영원이 보였다. [털썩] 침대 위에 앉았다. 하얗게 탈색 되었던 우영원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꼬리를 스윽 감아올렸다. 마치 먹이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저돌적이고 자신만만한 그 표정이 눈쌀을 찌푸리게했다. 하얀 도화지 위에 연필로 스케치만 있던 그림에서 순간 수채화 처럼 화사한 색을 입으며 좀전의 당황한 얼굴은 온대간대 없고 화려하고 호젓한 우영원이 있었다. "중국에 오기 일주일 전이였는데" 눈을 인공적으로 한번 깜박인 우영원이 날짜를 정확히 집어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는 우영원이 당당히 미소까지 지어보이니 다시 토기가 올라오는것 같았다. 우영원의 표정은 [그게 뭐 어때서]라는 표정이다. 참회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소 미안함, 혹은 죄인의 심정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잘못한 마음이여야 할 그의 표정은 사뭇 가소롭기 짝이 없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 마냥 비아냥스럽다. "....................." 바들대는 입술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고 부들대는 아랫입술을 어거지로 덥썩 물었다. 이가 딱딱거리며 아랫입술을 조았다. 죄를 들켰지만 '아, 그거' 라는 표정인 우영원은 한걸음 더 나아가 미소까지 베어물었다. 머리가 후들거린다. 이런 인간일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세상에 저런 사고관념을 갖고 있는 인간이 있을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더 가증스러운건 '조금 잘못된건가?'라고 내게 '내가 죄가 있어? 그게 왜?'라고 되묻는듯한 웃으면서도 웃는것 같지 않는 이 적막한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정도로 갑갑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는 말. "너였군" 머리에서 피가 퐁퐁퐁 솟아올라 진한 빈혈기가 몰려오는것 처럼 현기증이 밀려왔다. 한술 더떠 이제는 침대아래에 내려져 있던 긴 다리를 쓰윽- 꼬아올리며 턱을 치켜올리는 그 모습이 마치 패션잡지에나 나올법한 모델처럼 으스대보인다. 하하. 까망물을 뒤집어쓴 내 영혼이 그의 눈에는 그저 한낱 개거지로 밖에 보이지 않나보다. 새파랗게 자기 체취 뒤짚어 쓴 내 몸뚱아리가 한번의 사정을 내뱉기위한 배출구 쯤으로 여겨지기라도 한모양이다. "너 .... 너 ....... 호모야?"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은 보지않아도 이제는 비디오다. 사실 좀전에 거울을 통해 본 내인형은 밀랍처럼 하얗기도 했다. 귀신처럼 허옇게 뜬 얼굴로 '너 호모야?'라고 묻는 나를 조금은 유령같다고 섬칫해나 할까? 어쩌면 '너 따위가 나에게 가당키나 하냐'라고 나를 깔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의 질문에 나온 단어는 다소 그의 성질을 은근히 긁는 종류의 것이 끼여있었다. "그래, 호모야" 대답도 어찌 저리 쌈박할수 있는지. 그러니까 대성했나보다 너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우영원의 얼굴은 미안한 말이지만 웃을때 보다 좀 덜 살벌해보였다. 웃어서 끔찍하게 무서운 케이스가 저런거였나보다. 짐짓 눈쌀을 찌푸린 그는 내가 내뱉은 단어를 되새김질 하면서 좀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호모는 다 그래?" 다시 한번 신경을 [직-] 긁는 내 질문에 그는 아까보다 더 살벌하게 입꼬리에 조그만 호를 그리며 웃었다. 웃지마, 무섭다. 거기다 재수 털리는 느낌도 들고, 어찌보면 역겹고 혐오스럽기도한 웃음이다. "그날은 실수였어" 꾸욱. 아랫입술을 윗입술로 빨아들이며 으득하고 물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더 지탱하지 못할것 같았다. 뒷목이 뻣뻣하게 저려오는걸 아래로 억지로 내리자 뇌가 앞으로 덜컹하고 쏠리는것 같다. 실수라. 너에겐 그냥 실수였나보군. 거참 말은 정말 빌어먹게도 쉽구나. "미안해" 세상에 태어나서 미안하다는 소리듣고 기막힌건 처음이다. 아니, 화가나긴 처음이다. 미안해? 저게 미안한 태도일까. 침대에 다리 싹 꼬으고 유유자적 앉은체로 깍지낀 손을 까딱이면서 미안하다는 저말이 진심일까? 머리가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이걸 콱 죽일수도 없고 난감함 그 자체로구나라고 한번 비웃은것도 같다. 자꾸만 생전에 없던 눈물이 차고 올라서 황당하다. 미안하면 다냐? 그러나 한번 돌아 생각하면 미안한것 말고 또 뭐가있겠나. 그러나 역겨운건 역겨운거다. "...... 욱 ...... " 아까 다 토해서 이젠 올릴것도 없을것 같았지만 치밀어 오는 토기에 나는 또다시 룸메이트와 유일하게 공유해야 하는 곳인 욕실로 뛰어 갔다. 지금 토하고 있는것이 내가 먹고 속이 역반응을 일으켜 내뱉는 토사물인지, 아니면 나를 강간한 녀석에 대한 화남으로 인한 역겨움인지, 이런 머저리같은 나에 대한 자책때문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질만큼 나는 몸에 있는 모든것을 개워내고 있다는것이다. 그것은 분명 이유는 모르겠으나 무엇이 더럽다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먹은 음식이? 녀석이? 내가? 셋중 하나는 틀림없이 내 구토의 이유일것이다. "지웅이 나갈 준비해라" "네?" "나갈 준비하라고" 하루종일 틈만나면 웩웩 거렸더니 혹 그라운드에 나가서도 웩웩 거릴까봐 감독님이 고맙게도 스타팅 멤버에서 내이름을 제외 시켜주셨다. 도대체 애한테 뭘 먹인거냐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타국의 호텔 매니져에게 불만, 불평을 있는대로 늘어놓으셨지만 결국은 나에게 가장 화나셨다는걸 알고있다. '그래 나 호모야', '그날은 실수였어', 그리고 '미안해'. 세개의 문장으로 사람 하나를 완전 바보 만들어버린 우영원에게 경의를 표하며 난 경기 시작전까지도 줄기차게 올려댔다. 처음엔 '으윽 디려'라며 나를 기피하던 선배들은 나의 증상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지자 자신들이 먹은 음식에 불신하더니 이제는 혹 내가 죽을병에라도 걸린게 아니냐며 걱정스러워 하고 있었다. "저요?" "네가 지웅이지 그럼 내가 지웅이냐? 아파도 좀 참아. 영 안되겠으니까 그래" 코치님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중구난발 패스를 혹은 드리블을 하는 우리편 선수를 보며 한숨을 내쉬셨다. 환자에게 나갈 준비하라고 할 정도면 어느정도로 심한 상태인줄은 알겠으나 그래도 나조차 내 상태가 의심스러운데 경기에 나가라니 코치님을 비롯 스탶 전체에게 배신감이 든다. 고지대, 거기다 여직 싸워서 통쾌한 승리를 거둬보지 못한 상대에 대한 압박감이 겹쳐서 선수들의 몸놀림이 심하게 둔했다. 쭈욱, 쭈욱, 몸을 늘리고 경직된 근육을 [탁탁] 털어보지만 혹 경기에 나가서 꽥꽥 되는건 아닐지 걱정이 됐다. 정말 드럽게도 오늘 컨디션이 나쁜 선배를 보며 난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내가 가서 뛰는게 편할것 같다. 날개와 허리에서 받쳐주질 못하니 위에 있는 우영원도 죽을 맛인지 뛰는 폼이 영 즐겁지 않다. 그나마 실점하지 않는건 원톱인 우영원이 팀 후미진 곳 까지 내려와 고맙게도 수비를 열심히 하고 있는 덕분인것 같다. "공격해라, 그냥 공격해. 알았어?" "네" 내등을 토닥이며 코치님의 감독님의 불만 사항을 짧고 간단하게 줄여서 전달했다. 그래, 원하는건 공격이지. [짝-] 그라운드 밖으로 나오는 선배와 손뼉을 가볍게 부딪히며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자 다들 미안한 표정이다. 체격은 별로지만 체력에서는 별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손등으로 아래턱을 쓱 쓸며 천천히 달렸다. 경기장 안에서 만큼은 절대로 우영원을 도와야 하지만 그렇다고 별로 지고 싶지는 않다. 되도로 이기고 싶다.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니깐. "너 아픈거 순 꾀병이지?" 경기가 끝났다. 운동장에 흐느적하고 드러누운체로 헉헉 거리고 있는 나를 보며 주장완장을 차고 계신 선배님 한분이 '흐응'하는 표정을 짓고 계시다. 결혼한 유부남 주제에 이상하게 야한 색기 줄줄 흘리고 다니시는 저분은 애아빠이시기 까지 한데 사실 철이 조금 없다. 말이 없고 과묵해 보이지만 일찍 장가 간걸 봐라, 사실은 꾼인거다. 꾼. 헥헥대는 후배를 일으켜 세워주며 고작 하는 말이 뭐? 꾀병? 이사람이, 이사람이 나를 뭘로보고 그런말을 하는거야. 선배만 아니면 한대 콱 패줬음 속이 시원하겠다. "싫어요" 꾀병 운운하는 선배님에게 뒷목잡혀 질질 끌려간곳은 샤워실이었다. 열심히 박박 씻고 개운한 얼굴로 나와 이제 밥먹고 잠이나 자야지라고 생각했다. 울렁대던 속도 이제는 다 가라앉았다. 다시 우영원을 보면 뒤틀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때의 문제다라고 생각하며 복도를 걷고 있는데 빈복도를 가득 메우는 낮게 깔리는 남자 목소리에 우뚝 그자리에 멈춰서서 돌아봤다. "싫은게 어딨어 임마" ".... 진짜 ......" 몇명의 거물급 선배와 잡스러운 미소를 띄고 있는 악랄한 선배들이 우영원을 둘러싸고 협박 비슷한걸 하는게 보였다. 얼굴을 일그러트린체 선배님들께 화를 내는 우영원은 불만으로 가득차 보였다. 뭐라고 들리지 않게 욕설을 웅얼거리는것 같기도 했다. 녀석의 대표팀 데뷔전은 5년 전이였기에 연대기적 나이상으로 우영원 보다 선배이더라도 대표팀으로만 봤을때는 후배인 사람도 몇몇 있지만 우영원은 그런것에 연연치 않고 나이가 많으면 선배로 깍뜻하게 모시는것 같았다. 그런것만 볼때는 참 바른인간 이지만 사람이란 알수 없다고 속내가 더 없이 복잡하다는걸 증명하듯 녀석은 강간을 저질러 놓고 당당히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사실, 가해자의 입장에서 그말말고 무에 다른말을 할수 있겠냐도 싶지만 태도가 영 아니였다. [키득키득] [웅성웅성] 뒤에서 속닥거리는 사람들을 남겨둔체 식당으로 가려는데 [턱-] 하니 누군가 어깨를 돌려세웠다. 응? 저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것 같은 우영원이 다리 기럭지를 자랑이라도 하듯 내 바로 뒤에서 나를 세운것 같았다. 빠르기도 하네. 아침에 눈이 마주치는것 만으로도 토기가 쏠리게 했던것과 달리 다시 본 우영원의 얼굴은 나쁘지 않았다. 솔직한 말로 객관적 기준에서 굉장히 미남인것이다. 그런데 이 잘생긴 녀석은 불만이 있는듯 나를 내려다 보며 인상을 그렸다. 잡은 손을 [탁] 쳐내려고 하는데 순간 머리 위로 짙푸른 우영원의 체취가 머리위로 확- 풍겨왔다. "읍-" 고개를 도리질 쳤지만 맞닿인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고, 팔을 버둥였지만 녀석의 단단한 팔에 갖혀 헛지랄이었다. 그래, 헛지랄이란건 이런게 아닐까? 죽어라 퍼득이지만 날지못하는 펭귄의 몸짓같은것. 나의 헛지랄과 더불어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고 비틀어대는 허리 아래도 언젠가처럼 등뒤에 벽이 앞에는 녀석의 뜨거운 하체가 맞부딪치며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꽉 맞물린 톱니처럼 나와 녀석은 그렇게 붙어있었다. 맞물리고 싶지 않은 삶을 간절히 바라던 나의 소망을 가차없이 뭉개버린 우영원의 열기로 가득한 살덩이가 내 입안으로 들어와 정신없이 난폭하게 헤짚을때 주위에서 '여어...' 라며 야유를 하며 휘파람까지 불어재끼는 인간들이 있다는것이 더욱 치욕 스러웠다. 우욱하고 토기가 올라올법도 한데 몸이 빳빳이 굳어만 질뿐 속이 울렁울렁 마구 출렁이기만 할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흐읍" 뒷머리가 거칠게 잡힌체로 좌로 우로 여러가지 패턴으로 내 입술을 [정확히는 입속이겠지만] 공략해 오는 우영원의 몸짓은 더할나위 없이 사나웠다. 머리에 쥐가 나듯 뻐근해 오는 기분이 들 무렵 목뒤가 뻐덕뻐덕 굳어질 무렵 [츄웁] 소리를 내며 떨어진 우영원은 붉디 붉은 자신의 입술을 좀더 선명한 붉은 빛의 혀로 한번 훑었다. 뭐하는 짓이야라고 묻는 내 눈빛에 얼어붙은 녀석의 눈빛이 한번 내리는가 싶더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하드키스. 명령 이행 했어요. 됐어요?" 하드키스? 하드섹스도 아니고 하드 뭐? 한국말로 하면 빡센 입술 박치기 정도 되겠네. 하하. 나의 신경이 바짝 곤두선 눈길을 받은 선배님들이 답지 않게 쫄으며 쭈뼛쭈뼛 내 눈치를 보신다. 뭐야? 진짜 댁들이 시켰어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물든 내게 그나마 착했던 수윤선배가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같지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니네둘이 10골 만들어낸 기념이지" "그래, 그런거지" "군대에는 신고식, 연예계에는 성인식, 축구에는 기념식이랄까, 하하하"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한거야. 저사람들 때문이거든. 나의 뜻과는 상관없어. 아주 포부도 당당한 우영원이 내눈앞에서 싸늘한 얼굴을 한체로 서있는게 보였다. 올려다 보는 순간 몸에 섬칫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오싹한 기운이 목덜미를 덮치는 순간 욱- 하고 구토증이 다시 발동했다. " ....... 우욱 ........ " 이젠 정확히 알겠다. 아침엔 나에게 미안이라고 말하는 그 뻔뻔한 낯짝을 당당히 쳐든 우영원에게 역겨움을 느낀거였다. 그리고 지금은 이녀석 또 나에게 무슨짓이야? 라는 심각한 착각에 빠진 나에 대한 모멸감으로 인한 것이다. 도대체 녀석이 미안하다고 했던 그녀석이 또 내게 무슨짓을 할꺼라고 생각하다니 나는 과연 머리란걸 제대로 이용하고 있는걸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 ........... 욱 - ........... " 자신에 대한 역겨움. 너 뭔가 심각하게 착각한거 아니야? 그 심각한 착각이 뭔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하루종일 신경과민으로 뻐근해오는 근육들을 주체를 못해서 일찌감치 알람을 맞춰두고 침대에 엎드려 잠을 청했다. [달칵] 문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우영원이 스슥스슥- 옷깃 스치는 소리를 내며 옷을 벗는 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잠시 뒤 침대에 몸을 누이는 소리가 들리고 조용히 침묵이 깔렸다. 지끈지끈. 어질렁하게 아파오던 머리는 핑도는 현기증 대신 이제는 흉기로 내려 찍는 극악의 고통을 전해주고 있었다. 도저히 못참겠다 싶어서 쉼호흡을 한번하고 스탠드를 밝혔다. [지익-] 침대 밑에 넣어둔 스포츠 백을 열어 두통약을 꺼내 입에 물고 테이블 위에 놓인 물을 향해 걸어가던 찰라였다. [삐익] 반대편 침대의 불이 켜지며 냉정한 얼굴의 우영원이 내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마디 한다. "뭘 그렇게 몰래 먹는거야?" 입안에서 쓴기운을 슬그머니 흘리고 있는 약도 짜증이었고, 머리가 여전히 지끈거리는것도 짜증이었고, 잠든것 같았던 녀석이 깨어있는것도 짜증이었고, 녀석이 잠들기를 기다린것 같은 나의 태도도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입속에 약을 문체로 악으로 한마디 툭 내뱉었다. "마약이다" '흥' 호모 새끼 강간범이 마약사범인들 무섭겠냐 싶어서 저벅저벅 발걸음도 거만스럽도록 걷고 있는데 몇걸음 움직인것 같지도 않은 우영원이 내앞에 서더니 지책없이 내 턱을 손으로 움켜쥐고 입술을 맞춰 입앞으로 혀를 밀어넣어 왔다. "우우웁-" 아까도 불시에 당한거지만, 심지어는 강간도 불시에 당한거였지만 지금껏은 더욱 놀라버렸다. 한가한 태도로 나를 관망하던 우영원이 갑작스레 몸을 일으킬때에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내 혀를 부드럽게 휘여감은 우영원은 내 입안에 깔깔하게 물려있던 맨드리한 알약 두개를 제입으로 훔쳐갔다. 그리고는 제손바닥 안에다 '툭툭' 뱉어낸다. 알약을 빤히 들여다 보는 우영원의 표정은 굉장히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여있는것 같았다. 그러나 녀석의 감정나부랭이 보다 찌르는듯한 두통을 말끔히 잊어버리게 할만큼 엄청난 토기가 몰려와 나는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욕실로 뛰어가 버려야 했다. "우욱-" 하루에 남자와 그것도 동일인물과 두번의 키스라니 정말 역겹구나라고 머리가 생각했다. 우웩-. 생각이 짙어질수록 토기는 더해졌고 저녁 식사를 하기전 속을 깨끗히 비우고 먹은 것으로 모자라 잠자기 전에 속을 깨끗하게 비우는 자신을 보며 어금니를 질끈 물어버리고 싶을만큼 짜증이 일었다. "처음보는건데" 욕실에서 나와보니, 내가 토악질을 해대는것과는 상관 없이 침대에 앉아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 우영원이 약을 보며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아. 아직도 그게 마약이라고 생각하나보지? 이봐, 우영원씨 자네가 있는 프리미어 리그에는 마약이 그리 쉽게 나도는지 몰라도 나처럼 그냥 국내대학리그를 뛰고 있는 녀석에게는 마약이란 그냥 대통령 이름처럼 낯선것이라네. 모르나 보군. 거참, 대단히 높은 신분이라는거 온몸으로 표현하는 새낄세. 그려. "두통약인데. 온국민의 두통약도 몰라?" 피식. 침대에 내려 앉으며 조소를 띄자 우영원의 표정이 언젠가 처럼 뻣뻣하게 굳어가는게 보였다. 그리고 반대로 녀석을 마주본 내 속이 엉기엉기 뒤엉켜서 다시금 토기를 느끼고 있었다. 얼굴 마주보고 눈 맞대하는 것만으로 토악질을 해야하는게 이녀석과의 숙명인가 보군. 니글니글 불편한 속때문에 인상을 팍 찡그리고 있는데 제 손바닥에 놓여 있는 두통약을 쓰레기 통에 털어내며 우영원이 내신경을 은근히 긁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 난 또 그몸에서 그런 체력이 나오길래 마약인줄 알았지" "니네 호모는 그렇게 불쑥불쑥 아무나랑 입술 박치기를 하나보다" 녀석이 한말과 전혀 삔트가 맞지 않았지만 나는 따지듯 놈에게 쏘아붙여버렸다. 우영원은 뭔가 웃기다는 듯 미소를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을 했지만 그 웃는 얼굴에 속이 팍 상해서 울컹울컹 위가 울렁거리는게 한층 더 심해졌다. "본의가 아니였어" "아아, 그러시겠지" 그리고 벌떡 일어나 우당탕탕 다시한번 달려 우욱- 하고 변기를 잡고 올려댔다. 꼴좋다. 한껏 비꼬아 주고 올려대기라니. 이거야 말로 세계 최고의 멍청이 짓거리가 아닌가. 덤앤더머가 울고 가겠어. 스스로를 비식비식 비웃으며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데 벽에 등을 기댄체 욕실 문앞에 서있던 우영원이 몸을 쓰윽 일으키며 입가심을 하는 나를 향해 한소리를 지지않고 쏘아붙였다. 남이 다 토할때까지 기다렸다가 열받는 소리를 하는게 영국식 매넌가 보다. 그딴건 배울필요가 없는데. 아니면, 우영원식의 기다렸다 염장지르기던지. "홀몸이 아닌가봐" 입꼬리를 싸하게 말아올린 우영원의 미소가 그토록 가증스러울수가 없었다. 홀몸이 아니야? 그럼 더블몸이냐? 내가 최근에 잔 인간이라면 너 밖에 없는데 그럼 이 더블몸을 만든 주인공은 너냐? 그래? 욕실에 굴러다니는 플라스틱 통 아무거나 집히는대로 들고나와 홀연히 등을 돌리고 사라져 버린 우영원을 뒤따라가 냅다 던져줬다. [퍽-] 자랑스럽게 녀석의 뒷통수를 가격한 샴프통은 팅팅팅 바닥에 떨어져 민망하게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와 반대로 우영원은 입을 꽉 다문체로 나를 험하게 한번 노려보더니 한대 칠기색이다. 그러다가 참지 못했는지 제침대에 놓여있는 베개를 나에게 [휙-] 던졌다. 베개싸움에는 이골이 난터라 여유있게 녀석의 베개를 피한 나는 다리를 재빨리 놀려 침대 아래에 넣어놓은 스포츠백을 꺼내 앞뒤사정 재지않고 녀석에게 던져버렸다. 죽어! [퍼어-ㄱ] 가방 바닥에 단단한 플라스틱 재질이 감싸고 있어 맞으면 상당히 아플터였으나 난 녀석이 그걸맞고 그냥 즉사해버리면 안될까, 이대로 스탠드라도 깨부셔서 녀석의 목을 주욱 그어버리면 안될까라는 살심으로 가득차 올랐다. 니가 죽었으면 좋겠다던 어느 유행가 가사의 사정과는 전혀 다른 나를 범한 녀석에 대한 단순 살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손에 잡히는대로 뭐든지 다 던져대고 있었다. [와장창창] [우당탕탕] [쨍그랑] 있을법한 효과음은 다냈을 무렵 내가 눈을 휙 치켜뜨며 녀석을 돌아보고 소리를 치려는 순간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야" "네" 울컥한 나는 한마디 대답도 못했는데 내가 던지 물건 고스라니 맞아댄 우영원은 나직하게 대답을 했다. 아마도 근처 방에서 자고 있던 선배가 참지 못하고 달려온것 같았다. 굉장히 불만스러운 표정의 선배는 우영원과 내가 오늘 세골을 넣은것만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운동장 뺑뺑이라도 돌리고 심정이고 싶으실테지만 차마 그러진 못하고 최대한 험악한 분위기를 내새우고 있었다. "자라" "네" [끼익] 문이 닫히는가 싶더니 벌컥 다시 열렸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배기라더라. 적당히 하고 그냥 자라" 씨익 장난스런 웃음을 지으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남기고간 선배님이 그토록 원망스러울수가 없었다. 씨발, 누가 부부라는거야. 우욱-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또다시 토기가 찾아왔다. 제기랄. 씨발. 개같은. 썩을. 쌰앙. 갖가지 욕이 떠오르며 곧장 욕실로 뛰어갔다. "우욱-" 이젠 정말 올릴것도 없는 위속인데도 불구하고 부던히도 토하려고 하는 몸이 힘겨웠다. 그만하자. 나만 힘들거든. 그러니까 그만하자. 이대로 곧장 가서 녀석을 본척 만척하고 자버려야지라고 다짐하는데 머리위로 서늘하고 차가운 우영원의 체취가 확 풍겨왔다. [토닥토닥토닥] 등을 조심스레 토닥이는 녀석의 손길은 한없이 인자하고 따스했다. 거기다 [스윽스윽, 토닥토닥토닥] 사람 속 달래는데 일가견이 있는 우영원의 토닥임을 부드럽기도 했다. 병주고 약주는게 이런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자 신경질이 확 솟아오른 내가 날카롭게 쏘아붙여버렸다. "지랄말고 꺼져" "뭐?" 등을 두드리는 손을 [탁] 쳐내고 다시 [우웩] 하고 토해냈다. 아무래도 정신적인것 같다. 녀석과 말을 하고 눈이 마주치면 치솟는 토악질. 끔찍한 두통조차 희미하게 만들정도로 복근을 얼얼하게 만들정도의 끝없는 토악질에 온몸에 힘이 빠졌다. [슥-] 제머리를 강타했던 샴프통을 자리에 바로놓으며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우영원을 보며 나는 조금 빈정였다. "누구 덕분에 이고생인데, 애는 놓을까 지울까? 어쩔래? 놓으면 니 호적에 올릴거야?" "뭐?" 갑자기 돌머리가 됐나. 녀석은 나의 가당치도 않은 말에 황당한듯 굳은 얼굴로 내 얼굴만 마주볼 뿐이다. 보지마 새꺄, 보는것 만으로 나는 니가 역겨워. 우욱-. 생각을 체 마치기도 전에 토기로 다시 변기에 얼굴을 들이밀고 올려댔다. 퉤. 침을 뱉고 입을 헹구는데 여전히 험악한 얼굴의 우영원이 저승사자 처럼 내 뒤에 서있다. "가서 엎어져 자. 난 계속 구역질 할것 같으니까." "니 구역질이 나 때문이라는거야?" 서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욕실 특유의 쥥쥥대는 울림이 귀를 아프게 했다. 힘이 없어서 악으로 말하는 나는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두통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는데다 김이 솔솔 날정도로 열이 오르기까지 했다. 니 덕분이라고 내가 말했잖아. 이씹새꺄. 쌍욕이 절로 나왔지만 입술을 꽉 물고 있다가 되도록 치사하게 비꼬아 주고팠다. 녀석의 염장에 소금을 확 뿌려주고 싶었다. "너 같은거랑 상종하기 싫으니까 조용히 말할때 꺼져" "난 분명 사과했어. 도대체 뭘 더 바래?" "꺼지라잖아" "꺼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두통약 먹으면서 마약이네 뭐네 하는거 다 쇼아니야?" "쇼? 그냥 장난이라고 하는거다. 너 왕따였어? 그냥 흔히 있는 장난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마약먹었다고 장난도 하나보다?" "호모 새끼랑 말하기 싫거든. 꺼져" "호모, 호모, 그러는데 게이란 말이있다. 남지웅" "내이름 부르지마. 더러워" "그러는 넌 얼마나 깨끗한데? 변기통 붙들고 사정하는건 대단히도 깨끗한가 보다?" "누구때문에 변기통한테 사정하는데!! 꺼지라잖아! 내 일이야! 내가 알아서 해. 가서 자라는데 웬 잔말이 그렇게 많아!" "니가 뭔데 나한테 꺼지라 말라야?" "싫으면 관둬. 여기서 아주 살아라. 내가 나갈테니" 웃기지도 않는 애들싸움을 하다 여기서 더하면 엄한꼴 보겠다 싶어 [휙-] 돌아나오는데 뒤에서 쿵쾅이며 우영원이 따라오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니 내 침대 위에는 정환이형이 우영원 침대 위에는 상철이형이 삭막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앉아계셨다. 우뚝- 다리가 절로 그자리에 부동의 자세로 멈춰섰다. 그것은 뒤따라오던 우영원도 마찬가지 였을터다. "아아.. 해골이야" 나른하게 상철이 형이 나와 우영원 쪽으로 눈을 치켜뜨며 한마디 내뱉자, 그와 사뭇다르게 정환이 형이 험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상철이 형에게 턱짓을 하며 말했다. "꺼내" "그럴 필요까지야 있어?" 어딘지 사람을 잔뜩 골리는듯한 말투가 불안감을 조성했다. 저 작자들 무슨 생각이야. 오금이 저려와 그대로 엎어져 자고 싶은데 그래도 대선배님이신 두 선배가 침대를 각각 하나씩 점령하고 앉은체 만담을 꾸려가시니 어깃장 놓고 잠자게 비키시오 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니들- 오늘 큰일났다" 상철이 형은 짐짓 즐거운듯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그토록 얄미워보일수가 없었다. "내가 조용히 시키라고 말했는데 니들 골 넣었다고 선배가 물로 보여? 아니면 골 넣은 놈은 밤에 소리 꽥꽥 질러도 돼? 경기 잘한다고 봐줬더니 하늘 높은줄 모르구나." 꼭 저런다. 정환이형은 천재다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이골이 났을 터였지만 그 천재다라는 말 뒤에 항상 골넣어라는 중압감이 있다. 골을 못 넣어도 아무렇지도 않은듯 잘생긴 얼굴에 시원시원한 미소를 띄고 있지만 속에 있던 짜증들이 잘못 걸리면 이런식으로 꼭 나오게 마련이다. 이것은 마치 노처녀가 시집 못간걸 히스테리 부릴때 처럼 이유도 뭣도 없는거다. 그냥 예쁜여자 보면 화가 나는 노처녀처럼 선배의 기준에서 기고만장한 후배들을 욕먹이기 위한 짜증내기 한판일 뿐인거다. 이 상황에선 골 넣고, 경기 잘해서 소리지른게 아니라 그냥 지른겁니다라고 말해봤자 먹히지 않는다. "둘다 이리와" 무슨일인지 얼떨떨해서 한발작씩 다가가자 정환이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영원의 침대로 턱짓을 했다. 상철이 형은 어느새 몸을 일으켜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었다. 우영원도 얼떨결에 떠밀려서 내옆으로 와 있었다. "올라가" 침대 위로 올라가라는 말에 불신의 눈으로 두 선배님을 올려다 봤지만 별로 나의 간절한 눈빛에 관심이 없으신 두분은 우리가 다 올라갈 사이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고 계셨다. "후배가 말야 선배님 주무시는데 바락바락 소리나 지르고 그러면 안되는거 아니야? 야, 얼른 내놔봐" "얘들 별로 사이 안좋아" "사이 안좋긴 아까 잘만 키스하던데" "야, 그래도" "내놔. 맞고 내놀래 그냥 내놀래?" "나 너한테 선배야" "내가 인기 더많아. 빨랑 내놔" "그런식으로 하면 얘들이 우리보다 인기 더많으니까 그냥 참아야 하는거 아니야?" "내놔-" 옥신각식 하던 두선배님은 침대 위에 재물처럼 나란히 올라간 우영원과 나를 내려다 보더니 서로 마주보고 씨익 한번 웃으셨다. 그리고 상철이 형이 결코 내놓을것 같지 않았던 비밀의 무언가가 [찰캉-] 철소리를 내며 주머니 속에서 튀어나왔다. 깜빡깜빡. 깜빡이 처럼 내눈이 깜빡였다. 이게 무슨 변태업소 손님 맞이용 방도 아닌데 수갑이 튀어나오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난 아무런 억한 감정없어. 정환이가 시키는거야. 알지?" 상철이 형이 씨익 눈꼬리를 휘며 새초롬하게 미소를 띄우며 내 손에 [철컹-]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 남은 수갑 하나를 [철컹-] 우영원에게 채우고는 그걸로 끝이 아니라 주머니에서 수갑하나를 더 꺼내서 침대 머리의 봉에다가 수갑을 채우더니 나와 우영원을 잇고 있는 수갑에 연결했다. 덕분에 침대, 나, 우영원이 삼위 일체가 되어버렸다. 씨발. "선배님" 당황한 내 부름에 나가려던 상철이 형과 정환이 형이 동시에 돌아봤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잘자라" "또 싸워라" 역시 더 나쁜건 상철이 형이었다. 또 싸우면 어쩔건데요? 어쩔건데!!!! "또 싸우면 니네 그러고 있는 사진 찍어서 붉은악마 싸이트에다가 유포시킨다. 기대해도 좋아" 그말을 끝으로 그냥 나가려던 두선배님은 도깨비 소굴이 되어버린 방을 보곤 혀를 차더니 어질러진 방을 치워주고 손수 불까지 꺼주시는 별로 필요없는 후배 사랑 써비스를 해주시곤 문을 닫고 나가버리셨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찰캉- 찰캉-] 철이 철컹대는 소리를 들으니 눈앞이 하얗게 질리는것 같았다. 이 씨발, 선배는 무슨 선배야, 변태들이지. 개같은. 4경기 동안 내가 도와서 우영원이 만든 골은 10개였다. 마지막으로 치뤄지고 있는 5번째 A매치 경기는 친선경기가 아니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자만을 해서인지 상대는 마치 우리를 압박하기 위해 작전을 한 사람들 처럼 거세게 몰아붙여 오고 있었다. 선배님에게 혼이난 그날, 철컹이는 쇳소리가 무척 거슬렸지만 엄청난 인고 끝에 잠이 들어서 그 다음날은 거의 늦잠에 가까울 정도로 오래도록 잤다. 반쯤 깨어났을때 머리맡에서 누군가 긴 한숨을 내쉬고 있어서 그냥 자는척 해버린것이 늦잠의 원동력이 되었지만 잔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시 일어났을때 텅빈 방에 홀로 뉘여있었다. 물론 나를 옭아 매고 있던 철컹이는 쇠는 사라진체였다. 기분이 조금 언짢았던것은 우영원의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던 이유도 있었다. 우영원과 나는 축구를 할때는 한편이었고, 그외에는 거의 적처럼 지내왔다. "드럽게 골 안들어간다. 그쟈?" "그러게요" 끄응. 고통에 겨운 긴 신음성의 소리가 마음속에서 괴롭게 울렸다. 오늘 우영원은 축구를 하고 있는데도 마치 나의 적같다. 정말 못한다. 이리도 못할수가라고 말할 만큼 참으로 못한다. 그러나 감독님은 녀석을 빼지 않고있다. 우영원은 공격수로 드물게 수비가 좋다. 그냥 좋은게 아니라 굉장히 좋다. 계속해서 득점 찬스에서 실수를 범하고 있지만 우리 진영 깊숙히까지 들어와 상대를 압박하듯 수비하는 모습은 여전하다. 그때문인가? "저새끼 오늘 왜 저래?" "글쎄요" 애매하게 대답했다. 나도 아는 바가 없는거 이하동무이기에. 축구에 있어서 만큼은 정말 대단히 훌륭하고 존경받을 만큼 완벽하다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우영원이건만, 오늘은 볼리프팅이 엉망인데다 시야도 무척 좁아 보이고 평소에는 기가막힐 정도로 기고만장하다라고 여겼던 자신만만한 플레이는 보이지 않고 중구난발 패스만 들쭉날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 전반전이 질질 끌려가듯 무료하게 끝나고 하프타임이 됐다. "상대가 크다고 주눅들 필요없어!" 강경하게 말하는 감독님의 말에 우영원의 표정은 뭐랄까 '말이야 쉽지'라는 표정이었다. 사실 국가대표에서 뛰는것 보다 우영원에게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훌륭한 동료들의 완벽한 어드바이스를 받으며 프로팀에서 뛰는게 더 쉬울거다. 더군다나 녀석이 결코 작은키도 아닌데, 자신보다 더 큰 상대가 하나도 아닌 셋씩이나 달겨드니 죽을 맛일테지. 하지만 현재 우리팀은 우영원을 수비하는 사람들을 커버해줄 만큼 기량이 월등히 높지는 못하다. 녀석에게 달겨드는 사람들은 녀석이 처리할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마지막까지 끌고, 끌고 또 끌다가 옆에 보이는 팀원에게 어이 없는 패스를 해버리는 거겠지. "야, 잘하자" 우영원의 비리비리한 상태를 무척 떨떠름하게 여기는 선배님 하나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우영원에게 말했다. 녀석은 천천히 위협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기분이 나쁘다는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냈지만 선배는 선배인 이유로 죄책감 없이 휙 뒤돌아 가버렸다. [퍽퍽퍽] 무쇠보다 강건한 우영원의 다리가 아무죄 없는 벽을 구타했다. 팀원 모두 훈련으로 체력은 굉장히 좋아졌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이렇다할 전술은 없었다. 전술이란건 거의 필요없는 것이라고 느껴지지만 상대가 쉬울때도 어려울때도 전술에 따라고 지고, 이기는 희비가 교차될 만큼 중요한 것이란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우영원" "왜" 나의 조그만 부름에 우영원은 짜증이 가득 베인 대답을 했다. '넌 또 뭐냐' 라는 그런 뉘앙스다. 전반에 그렇게 거구들에게 짓눌렸으니 어지간히 지쳤을테지만 이 녀석은 좀 당해도 상관없을거다 싶은 마음이다. 넌 좀 당해야해. "축구를 키로 해?" 192Cm 거구, 늘씬하게 뻗은 몸위에 단단하게 자리잡은 근육들이 온몸을 꽉 감싸고 있는 탄탄한 체격을 지닌 남자에게 그런 질문은 조금 실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녀석은 조금 당해야 하므로 밀어붙여 보기로 했다. 이미 경기장에서 잔뜩 당하고 왔지만 그걸로 좀 부족하므로. "너를 보면 아닌것 같은데" 잇사이로 씹듯이 내뱉는 말에 잔뜩 화가 나있음을 알수있다. 그리고 녀석이 한 말을 살펴보면 나에 대한 조롱이 담겨있다.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네. 그것 참, 안타깝네. 거구들한테 콱 압사 당해 죽기를 바랬는데 말이지. "축구는 신장으로 하는게 아니야, 심장으로 하는거지" 얼굴에서 자만심을 풀풀 내뿜으며 우영원을 닥달했다. 짜증이 난다. 바보처럼, 등신처럼, 멍청이처럼, 허덕거리는 우영원은 용서할 수 없다. 나를 밀어붙일때 처럼 아니, 그것의 반만하면 아마도 우영원은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될것이다. 처음 말을 걸었을때는 조금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한심스럽게구는 우영원을 비웃고 있었다. 공 잡으면 너만 세사람이 달겨드는게 아니거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만큼 달겨들거든. "병신처럼 굴지말고 좀 잘해라" "너나 잘해" "나는 잘하고 있잖아. 왜 센터링 날려주는데 골을 못넣어? 게발이냐?" "누가 게발이야!" 앙앙거리며 싸우고 있는 우리 주위에 선배들이 얼이 빠진 모습으로 멍하게 앉아있다. 보통 내가 힘들면 남도 힘들고 그렇게 되면 서로 힘들걸 알기때문에 싸움은 거의 없다. 선배가 후배에게 일방적으로, 코치나 감독이 선수에게 수직적으로 이리해라, 저리해라 명령은 할지언정 이렇게 떽떽거리며 싸우지 않는다. 우리 잘해보자 뭐 이런 분위기여야 하는데 아예 날 잡은것 마냥 둘이 치고박고 싸울기세자 주위에 몰려있는 사람들이 입을 헤벌리거나, 꽉 다문 극과 극의 상태에서 멍하니 우리를 지켜보고만 있다. "게발 아닌데 왜 차는 공마다 족족 골키퍼 한테 가지도 못하고 골대에서 빗겨나냐고!" "골이 그렇게 쉽게 들어가면 축구를 아무나하지. 누구는 골 넣기 싫어서 안 넣는줄 알아? 일부러 그러는줄 아냐고!" "내가 너한테 센터링 할때 다른팀한테 가면 니가 가만히 있을거 같아-?!!!!!!!!!!!!" 꽥-! 하고 내가 소리를 질렀다. 우영원이랑 싸운 후로 생각하고 하고 또 했다. 그리고 알아냈다. 우영원은 죄지은것은 내가 잘못한것 이지만 내 본의가 아니였다는것이다.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뿐이다. 우영원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한 사과이지만, 듣는 입장에선 죽여버리고 싶은 말이다. 내 질문에 대답이 없다. 이런면에선 확실히 솔직한 인간이다. 내가 센터링 잘못 날리면 제녀석도 화를 낼 참이라는 거다. 빤히 쳐다보며 추궁하듯 가만히 있자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어쩌라고?!!!" 하여간 잘못한 주제에 목청만 크면 단줄 아는 인간이 대한민국 인간이라는걸 보여주는 표본같다. "남이 충고하면 좀 받아들이고, 인정을 하고, 알아들었으면 표현을 좀해" "뭐?" 역시 고상한 말로는 저런 석두에게 뭔가 주입될거라고 생각치 않았지만 이정도면 심하다. 병신 에다가 등신 추가. "너 오늘 잘했어?" "못했다" "후반전에 어떻할건데?" "뭐?" 비비 꼬였네 스크류바가 아니라 비비 꼬였네 남지웅이다 "후반전에는 잘하겠다고 말하면 주댕이가 찢어져? 최선을 다해서 남은 시간 열심히 뛰겠다고 하면 누가 패?" 둔기로 머리통을 한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의 우영원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감독님이 주눅들지 말라고 했지만 녀석은 두말않고 그 말을 무시했다. 잘하자는 선배의 말이 아니꼬와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마음은 없고 몸만 남은 상태에서 그냥저냥 시간이 가길 기다리는 모습. 어떻게든 해결이 될거라는 그 모습. 다만 분위기가 좋을때 제 기분이 즐거울때 뭔가 내보이는 인간. 우영원은 그렇게 편리한 인간이다. 지 하고 싶은대로 저지르고 나중에 '아, 잘못했었군' 하고 목넘어로 작게 웃어보이곤 '별일 아니잖아' 라고 넘어간다. 고약하고 못된놈이다. "지웅아, 왜 그렇게 룸메이트를 몰아붙이고 그래" "맞아, 너 오늘 되게 쨍알거린다" "아직 젊다 이거지 힘이 남아도니까 저렇게 소리도 바락바락 지르지" 우영원과 면식이 조금 많은 선배들이 녀석을 거들었다. 하려고 하면 잘하지만, 역으로 너무 잘해서 건성건성인 우영원을 그들이 모르고 있었을리 없다. 그저 자신들도 그런 인간이라서 묵인하고 모른척 할뿐. 다 한통속인게지. 비죽이 한번 웃어주고 몸을 풀기위해 다시 그라운드로 몸을 돌렸다. 우영원은 한없이 화나있다는것을 소리없이 표현했지만 내알바 아니다. 사실 난 저녀석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미치게 싫다. 그러나 내일 신문에 저녀석이 축구선수로써 욕을 먹는다면 기분이 나쁠거다. "너 심했어" "........." 마구 몰아붙이고 나온 내 뒷맛도 그다지 즐겁지 않다. 그러나 뻔연히 알면서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만큼 난 착하지 않다. 만일 추궁의 대상이 우영원이라면 대단치 않은 일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여서 화를 낼 만큼 난 녀석에게 만큼은 나쁜놈이여도 상관없다. 몇몇 선배들이 나에게 심했다고 말했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곧 후반전이 시작됐고 진득하게 물고늘어지는 적들을 향해 우리는 다시 한편이 되어야 했다. [툭-] 발끝에 채이는 공의 느낌이 가벼웠다. 몸이 조금 둔하고 뒷끝이 무거웠지만 오히려 그 무게감이 몸을 묵직하게 해서 공을 몰고 나가는데 힘이 되었다. [툭- 툭-] 두어번쯤 드리블 된 공을 옆에서 뛰고있는 선배에게 패스하고 주위를 한번 훑었다. 후반전도 이제 종국으로 치닫고 있다. 조금 더 있으면 무승부로 경기가 끝날것이다. 하프타임에 내 발악이 효과가 있었는지 모두들 전반에 끌려다니던것과는 사뭇 다르게 열심히들 뛰고 있었다. "헉헉... " 목을 따끔따끔하게 할만큼 숨이 차올랐지만 [툭-] 내 발끝에 다시 돌아온 공은 내 몫이라서 다시금 달렸다. "잘못하면 죽여버릴거야" 중얼중얼중얼 비 맞은 땡중 처럼 중얼이다가 눈이 얽힌 우영원에게 공을 날렸다. "하아.. 하아.." 배가 아릿하게 당길만큼 뛰어댄 후의 패스라 조금 미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영원은 공을 향해 열성적이다 싶을 만큼 적극적으로 달려가 달라붙는 수비수들을 신기에 가까울만큼 현란한 몸동작으로 따돌리고 [퉁-] 둔하게 소리를 내며 공의 아랫부분을 걷어 올려 골네트로 날려보냈다. 그와 동시에 [쿵] 소리가 났다. 우영원을 놓친 수비수가 다급하게 끌어당긴 덕분에 녀석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플텐데도 자신이 찬 날아가는 중거리포를 보는 눈길이 끈질겼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거대한 함성이 귀를 잠식했다. 너무나 엄청나게 거대해서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이리저리 수비수를 달고 마구잡이로 달려대던 우영원이 골을 받은 지점은 하프라인을 조금 넘어선 지역이었다. 화려하다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드리블 후에 공을 날린 곳은 패널티 박스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퉁-] 하고 차인 중거리포는 [핑-]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눈깜짝 할 사이에 박혀버리는 화살촉 처럼 깨끗하게 골 네트에 꽂혀서 그물을 출렁이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골을 본 사람들의 거대한 함성소리가 울렸다. "......... 어-? .... " [주춤] 나는 주춤했다. 하프라인 근처에서, 우영원의 등뒤에서 골이 들어가는 걸 보며 기뻐했지만 골이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엉덩이를 찧었던 우영원이 바닥에서 일어나면서 짓는 표정을 보고 주춤해버렸다. [씨익- ] 한쪽 입꼬리가 팽팽하게 당겨진, 눈이 [싸악-] 매끄럽게 조그만 호를 그리며 눈웃음을 치는 우영원의 얼굴에 굳어버렸다. 맹수에게 포획 되어지기 전 놀라버리는 초식동물 처럼 눈이 휘둥글하게 떠지며 순간 움찔 했다. 바닥을 짚으면서 일어나는 우영원의 표정이 마치 먹이감을 노리는 야수처럼 번뜩이고 있어서, 영혼을 집어 삼키는 악마처럼 악랄해 보였다. "큭-" 내 코앞에 온 우영원은 웃었다. 분명히 목울대를 나직하고 음산하게 울리며 키득하고 웃었다. 또한, 눈꼬리로, 입꼬리로, 마음으로. 나를 내려보듯 얄궂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우웁-" 바닥을 박차고 일어난 우영원은 웃어보이며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앞뒤 재지않고 입술을 부딪혀왔다. 머리 위로 싸늘한 체취가 내려앉았다. 고개를 저어 봤지만 단단하게 잡힌 뒷머리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다. 팔로 내리쳐 보려고 했지만 탄탄한 가슴을 두어번 두들겼을뿐 역시 별 소용이 없었다. 발로 걷어차려고 하자 [물컹-] 하고 뜨거운 혀가 밀려 들어와 입안을 난폭하게 휘저었다. 부들부들 내몸이 조금 경련을 일으키자 그제서야 완력으로 꽉 움켜쥐고 있던 나를 살짝 놓아주며 부드럽게 입술을 맞대어왔다. 눈앞이 뿌옇게 변하며 어질렁 어질렁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지만 생생히 느낄수 있었다. "으..응응 ... 읍- " 아랫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가 놓아주고, 볼이 쏘옥 들어갈 만큼 밀착해서 입안을 빨아들였다가 놓아주고, 혀가 아플만큼 휘감았다가 입안 전체를 스윽- 한번 돈후, 츄웁츄웁 입술을 부딪혀온 우영원을 고스라니 느꼈다. 우영원은 루즈 타임을 1분을 포함한 경기 종료 2분 남겨둔 후반 44분 득점을 했다. 그리고 악마처럼 웃으며 내게 다가와 진득한 키스를 퍼붓고는 번들번들 누구것인지 알수없는 이의 타액으로 잔뜩 빨갛게 부어오른 입술로 다시한번 기묘하게 웃어보였다. "잘했어" 마치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을 예뻐하듯 내 머리를 [쓰윽쓰윽] 쓰다듬은 녀석과 내 주위로 경기 종료 휘슬과 동시에 날듯이 뛰어오르며 기뻐하는 동료들을 향해 [번쩍번쩍] [찰칵찰칵] 카메라 후레쉬가 마구마구 터졌다. 신성한 그라운드 한복판 위에서 키스 당했다. 파르르 입술이 떨렸다. 빌어먹을 새끼, 내가 니네집 개새끼야!? 씨발 어딜 쓰다듬는거야!!! 앙심을 품은 내 마음을 고스라니 드러내듯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자 우영원은 '훗-' 하고 웃어보인다. [벅벅] 찝찝한 입술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내자 언제가 본 악마의 미소를 쓰윽 그리며 나를 내려다본다. 재수없어. "충고 고마웠어" 악마의 속삭임처럼 낮고 음산한 우영원의 목소리가 화가 난 내 목덜미에서 조용히 울려퍼졌다. 주위에는 여전히 승리를 자축하는 멍청이들이 왁자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멍청이들을 찍느라 정신없는 바보들이 카메라와 씨름 중 이였다. 씨발. 욕이 절로 나온다. -첫만남, 끝- [후두두둑-] 으윽. 사박사박 눈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따뜻함 봄이여야 할 3월 때아닌 폭설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했다. 하지만 덕분에 올림픽 대표팀 합숙일도 뒤로 미뤄지고 좋은점도 꽤 있다. 그러나 겨우 컵라면 사러나가는데 중무장을 해야한다는게 너무 불편했다. 뿐만 아니라 얼음으로 뒤덮인 길 위에서 잘 걸을수 없는 나의 우둔한 다리도 못내 아쉬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딴에는 머리를 좀 쓴다고 아직 얼지않은 보들보들 부들부들 만지면 따뜻한 감촉이 느껴질듯한 쌓여있는 부드러운 눈길 위를 걷고 있었다. 하지만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녀석이 있다고 메마른 나뭇가지에 총총히 쌓여있던 예쁜 눈이 바람이 불어 머리 위로 [툭-] 하고 한뭉텅이 떨어졌다. "으.. 차거" 머리 위로 직통으로 떨어진 눈을 손으로 쓸어 내렸지만 목덜미 사이를 파고든 시린 기운에 또한번 몸서리 쳐야했다. [툭툭툭-] 손으로 머리를 털어내는 손길이 분주했지만 눈이 차가워서 손이 얼어버릴것 같았다. 거기다 손으로 털어내 지지 않는 이미 물이 되어 머리칼 속을 파고든 차가운 물줄기에 뇌가 꽁꽁 얼어버릴것 같았다. 씨발, 눈이 싫어! 도대체 누가 눈 오면 좋다고 꺅꺅거리는지 그 사람의 정신 구조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봄날에 눈이라니 정말 죽이게 싫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별 생각없이 던지고 가는 눈길도 차가운 눈 만큼이나 싫었다. 뭘봐? 새꺄! 한대 깔수도 없고 쪽팔리고 여하튼 수치심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고 올라오는 느낌이다. 사람들이 눈길을 무심하게 던지고 가서 더욱 면팔려할때 내 목덜미로 눈 만큼이나 시린 손길이 [스윽-] 하고 들어왔다. "으악-!" "쿡-" 키득하고 웃는 우영원. 쿡 소리를 내며 비아냥대는 우영원. 야한 미소를 걸치고 있는 우영원. 새하얀 눈을 배경으로 모델처럼 탄탄한 몸을 조금 내쪽으로 수구리고 당당히 나를 보며 웃고 서있는 우영원. 내 눈앞에 서있는것은 틀림없는 우영원이었다. 우영원은 눈송이 녹아 차가운 물끼가 흐르는 내 목덜미에 눈보다 더 시린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넣어 남아 있는 물끼를 손으로 훑어내고 있었다. 뒤로 한발작 물러서려고 했다. [휘청-] 진짜 씨발이다. 뒤쪽으로 물러서려고 하다 얼결에 얼음이 되어버린 눈을 밟아 버리는 바람에 발목이 [삐긋-]해서 본의 아니게 우영원의 가슴팍에 묻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짜증나. 진짜. 왕 쪽팔려. 녀석의 가슴팍에 묻힌 머리를 빼내며 [슥-] 다시 옆으로 이동을 했는데 나무와 등으로 [쿵-] 충돌하는 바람에 머리 위로 또다시 [후두둑-] 폭설이 내렸다. 젠장. "시원하겠다" 우영원은 즐거운듯, 재밌는듯, 악의적인 말투로 절대로 악마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며 내 머리 위로 낙하한 눈을 털어내주었다. 우영원은 뭐가 그리도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지만 눈을 맞은것 보다 녀석의 얼굴이 코앞에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기분이 나빴다. 누가 뭐래도 이 녀석은 내게 강간범이다. "필요없어. 치워" 우영원의 손을 [휘익-] 쳐내며 불만스런 목소리로 불퉁였다. 시린바람이 코끝을 매섭게 했지만 그보다 나를 내려다 보는 우영원의 눈길이 더욱 싸늘했다. 얼음같은 시선은 여전했지만 조금 굳어졌던 우영원의 얼굴이 입꼬리를 휘자 여름날의 꽃잎들처럼 울긋불긋 화려한 물을 머금은듯 화사하게 변했다. 비슷한 패턴, 언젠가 본 표정이다. 난 뒤돌아 집으로 향했고, 내 뒤쪽에 또렷한 발자국 소리가 뒤따랐다. "............." "............." 날은 아직 밝았다. 하지만 어두운 밤처럼 마음이 답답해져왔다. 암담하다는것은 이런것이다. 학교 근처에 마련해둔 집은 막다른 골목을 몇개를 끼고있는 길을 지나야 했다.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뒤따르는 우영원이 언젠가 이 골목 중 한곳에서 무지막지한 힘을 내게 과시한적이 있었다. 녀석은 사과했지만 난 사과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야멸찬 표정으로 우영원을 힐끗- 훔쳐봤지만 무기질 처럼 담담한 얼굴의 그 얼굴에 [꿀꺽-] 목구멍으로 아프게 침만 넘어갈 뿐이다. "여기는 왠일이야?"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럽의 프로리그가 쉬는 기간은 조금 더 있어야 한다. 아직 두어달은 남아 있는 시간인데 녀석이 여유자작하게 저러고 있는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뒤돌아 보자 우영원은 어딘가 꼬인 비툴어진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불만이 뭐냐? 도대체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돌아가는 상황이 심장에 너무 큰 무리를 주고 있었다. "너만 군대면제 받아야 하는게 아니거든" 22살 아직 많은 나이가 아니다. 선수로써도 사회인으로써도 어린 나이지만 군대라는건 대한민국 운동선수에게 모두 걸림돌이다. 얼마후에 있을 올림픽을 염두해둔 발언인 모양인데 아직 예선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올림픽만 나가면 면제 받을수 있다' 라는 자신감에 너무 충만되어 있는 그 모습조차 당당해 보이니 얼굴이 잘생겼다는것은 생각보다 꽤 큰 힘을 발휘하는 건가보다. 참으로 뻔뻔한 말인데 참 자신있는 표정이라 한편으론 부럽기까지 하다. 좋겠다 너는 늘 그따위 식으로 당당해서. "올림픽 대표팀 ... " 중얼이듯 혼잣말을 하며 뒤돌아서는데 [휙-] 어깨가 뒤쪽으로 확 당겨졌다. [턱-] 소리가 나며 등에 벽이 부딪힌다. 나를 잡아당긴 우영원은 여전히 웃고있다. 그 웃음이 나를 찌르는것 같다. 주먹을 꽉 쥐었다. 그대로 패버릴 생각이었는데 [탁-] 공기를 가르며 뻗어나간 내 주먹이 우영원의 손아귀에 가볍게 쥐어졌다. 어이가 없어 손을 빼내려는 나를 우영원은 매우 쉽게 결박하더니 내 허벅다리를 우악스럽게 손으로 쥐어왔다. "윽" "언제나 신음소리는 짧게내는게 신조인가봐" 목넘어 '킥' 웃으며 나를 보는 우영원의 표정은 조금 화가 나있다. 덩치도 나보다 월등히 크지만 손은 곱절로 큰 우영원은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내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발버둥 쳤지만 결박당한체라서 별로 효과가 없었다. "내가 너한테 굽실거려야 해?" 잡은 내 허벅지를 더욱 꽉 쥐어오며 녀석은 그렇게 물었다. 영문을 몰라 눈쌀을 찌푸리자 '하하' 라고 우영원이 밝게 웃었다. "내가 너한테 잘못을 저질렀으니 굽실거려야 해?" 아, 그런 뜻이었군. 그럼 나는 너한테 굽실거려야 하는건가? 너는 나를 힘으로 얼마든지 내려누를수 있으니. 어떤 경우에도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당당한게 법칙이지만 어떤법칙에도 예외는 꼭 있다고 지금 같은 상황이 꼭 그랬다. 가해자가 피해자 보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무력적으로 절대적으로 강하며 동시에 피해자 스스로가 자신이 떳떳하지 않다고 여길때 가해자는 마치 제가 잘못한것이 무에그리 대수이냐는듯 되묻곤 한다. "무릎 꿇고 백번 사죄라도 해야 해?" 짜증이 잔뜩 베인 우영원에 질문에 나는 감정없는 나무막대 처럼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내가 바라는건 네가 사라지는것. 내눈 앞에 네가 보이지 않는 것. 그것마저도 불가능 하다면 내게 네가 닿지 만이라도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런 입장을 밟힐수가 없다. 뭐라 뻥긋 할사이도 없이 몰아부침을 당하고 있어서 말할 틈이 없다. "죽을 죄를 졌으니 한번만 봐달라고 사정이라도 해?" 기본적으로 머리가 있으면 그래야 한다라고 보통사람들은 말하지 않을까? 그런데 막상 내가 피해자가 되고 보니 그러는것도 남사스럽다. 입을 꽉 다물었다. 위가 울렁거리고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날 밤의 일이 떠오르면 언제 어디서나 토기가 올라온다. 하얗게 얼굴이 질려가자 우영원도 당황한듯 표정이 잠시 굳었지만 경우 없고, 당당하기만한 녀석은 제잘못이 아니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은 표정으로 다시금 돌아왔다. "우욱-" 고개를 오른쪽으로 최대한 틀어서 결국 올려버렸다. 벽쪽에 수북히 싸인 하얀 눈위로 아침에 먹은 김밥 알갱이들이 박혔다. 눈이 시큰해지고 코가 매워졌다. 내가 토를 해대자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어버린 우영원은 얼른 나를 풀어줬다. 벽을 잡고 새하얗게 순결한 눈위에 역겨운 것들을 내뱉었다. "우욱-" 위가 요동을 치고 장이 뒤틀렸다. 그런 와중에 입에서 쓴 위액이 한바가지 또 쏟아져 나왔다. "씨발" [토닥토닥] 낮게 들릴듯 말듯 욕을 한 우영원이 내등을 토닥였다. 아무도 없다면 울어버릴텐데 붉어진 눈시울이 뜨거워져 왔다. 한참동안 올려대고서야 진정이 된 속은 마치 비어버린 통마냥 '통통' 하고 소리가 날것 같다. 귀신처럼 원한섞인 눈초리로 우영원을 바라보자 녀석은 복잡한 표정 끝에서 삐뚜룸한 미소를 끄집어냈다. "맨날 토악질이나 해대고, 다리는 여자만큼 가늘고, 그러고도 운동선수라고 차출당하고 어이가 없으려니. 젠장" 갑작스레 쏟아져내린 비처럼 온 눈같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건 마냥 내앞에 불쑥 나타난 우영원은 무척 불편한 심기인것 같았다. 컵라면이 든 봉지를 든 내 손이 물끼없이 건조하게 말라있었다. 얼굴은 그보다 더욱 파리하겠지만 이모든 상황의 원인인 우영원은 이제 그만 죄인이고 싶다라는 자기감정에 이백퍼센트 충실해 내게 화를 쏟아내고 있었다. 내 다리가 가는데 네가 뭐 보태줬어? 우영원의 난폭한 손길이 닿았던 허벅지 안쪽이 아직도 화끈거렸다. 보나마나 붉으스럼하게 물이 들어있을 터였다. 기척도 없이 제멋대로 튀어나와서 제맘대로 안된다고 마구잡이로 화내고 그러다가 사람이 올려대니 지가 오히려 당황해서 또 다시 그 황당함을 참지못하고 있는대로 흥분하고 그리곤 빤히 쳐다보는 내 눈길에 언제그랬냐는듯 삐딱한 웃음을 말아올린체 나를 보고 있다. 저 우영원이란 미친, 또라이, 괴물같은 이중인격자는. "너 여기 왜 왔어?" 속은 허하게 텅비었고 머리는 복잡하게 꼬였지만 이유없이 내뒤를 따를 만큼 지독한 인간이 아니기를 바라며 우영원에게 물었다. 진짜 갑자기 이곳에 녀석이 나타난 이유는 뭘까? 뭐 좋은 영화를 본다고 이곳까지 바득바득 왔을까? 때아닌 눈이 펑펑 내리는 이 비상식적인 봄날에. 동갑이다. 그런데 덩치는 나보다 저놈이 두배는 크다. 하지만 아무리봐도 정신상태는 축구할때를 빼놓고는 나이를 상실한 녀석처럼 군다. 너, 알맹이는 어린애냐? "나한테 굽실거리려고 왔어?" 그럴리가 없다. 지가 잘못한것은 있을지언정 그건 본의가 아니였고 명백히 잘못한것을 인정했으니 그걸로 끝이라고 여기는 녀석이다. 저놈은 그런 놈이다. 굽실거려 본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일이 없는 앞날이 창창한 인간인 것이다. "아니면 무릎 꿇고 백번 사죄라도 해보려고?" 두가지 상반된 표정은 한얼굴에 담은 우영원의 눈빛은 매우 화가 나있었다. 이쯤에서 그만 그쳐야 하는데 나는 눈썹은 찡그린체로 잔뜩 찌푸리고 있으면서 입꼬리는 신랄하게 웃고 있는 녀석에게 쏘아부치는것을 그만두지 못했다. "그것도 아니면 죽을죄를 졌으니 한번만 봐달라고 사정이라도 해보려고?" "그렇다면 어쩔건데" 잔뜩 깔린 목소리. 그러나 중후하다기 보다는 표면이 거칠고, 매끄럽게 흘러가는 목소리가 아닌 돌기가 있는것 처럼 목소리 끝이 기묘한 파동을 그리며 파삭파삭 부서지듯 갈라져있다. 지나치게 낮은 목소리지만 그러면서도 소리가 굵지 않아서 귀를 파고드는 소리가 이상한 맛이난다. 깊은 바다 심연에서 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니라 기다란 빈복도를 연쇄적으로 울리며 퍼지는 깔깔하면서도 남자다운 목소리다. "신경안써" 그에 비해서 내 목소리는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남자치고는 조금 높다. 내 딱부러지는 대답에 우영원의 얼굴이 이지러진다. 어차피 너는 그렇게 사죄할 생각도 없을테지만, 나 역시 너한테 사과받을 마음이 없거든. 그냥 우리 서로 나쁜사이임을 인정하고 경계선을 긋고 멀리서 지 살고 싶은대로 살자. 나는 니가 싫어. 좀더 인상을 찌푸리며 우영원이 물었다. "너, 뭐가 그렇게 잘났어?" 잘난것 없는 나지만, 못난것도 없다고 말하면 심한 착각일까? 머리속의 생각을 쉽사리 말하지 못하고 빤히 우영원의 얼굴만 쳐다봤다. 저 대단하신 최전방 부동의 스트라이커에게 차마 그러는 너는 뭐가 그리 잘났어? 라고는 못 물어보겠다. 잘나서 좋겠다 너는. "나는 경우있고 당당한 사람이 좋아" "............" 그래, 나는 경우있고 당당한 사람이 좋다. 너처럼 당당하기만한 인간은 용납할수가 없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네가 경우없고 오만해서 너랑은 강제로가 아니면 같이 있기도 싫어" 넌들 나랑 같이 있고 싶겠냐만은 나는 네가 나를 싫어하는것보다 몇만배는 더 네가 싫어. "사과 한번으로 모든게 끝난다면 세상살기가 어렵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거야" 그게 사과라면 너는 앞으로 너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설득할수 없을거다. 우영원, 사과라는건 껍데기로 보이는게 '미안했었다' 라고 한마디 하는것으로 끝날수 있는게 아니거든. 그게 비록 네 마음의 진심을 가득담은 사과였다고 하더라도 사과를 받는 입장에서 결코 사과받았다라고 여길수 있는게 아니라면 그건 사과가 아닌거지. 네 말대로 사과하는 사람은 진심이든 아니든 상대의 노여움을 완화 시킬수 있을만큼 송구하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수그려야 될꺼야. 왜냐면 그게 잘못한 사람의 도리이기 때문이야. 잘못한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느꼈다 할지라도 뻣뻣하게 상대방한테 '미안' 이라는 말 한마디로 해결되기는 힘들거든. 그때는 가증스러울정도로 사과받는 당사자가 미안할 정도로 수그려야해. 너는 평생, 죽었다 깨나도 못할테지만. 내가 잘나서 그런 사과를 원하는게 아니라 네가 잘못했으니까 그런 사과를 해야하는거야. 오히려 내가 우영원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너는 뭐가 그렇게 잘나서 죄지은 주제에 그렇게 뻔뻔하냐고- 사과 한번으로 그 모든게 끝날거라고 생각했냐고- 탁탁탁 먼지털듯 용서를 받을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냐고- 넌 뭐 그렇게 대단한게 있어서 '어, 그래 나 죄 지었어. 미안했었어' 라고 내뱉으면서 당당한거냐고- 네가 한짓이 범죄라고 생각하기는 하는거냐고- 남들도 할수 있는것이니 너도 그냥 한거라서 피해입은 나에게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기는거냐고- 말로만 미안하고 네 속내는 언제든지 맘만 먹으면 어떻게 해버릴수 있는게 나는 아니냐고- 사람 내장 비비 꼬으듯 아니꼬운 말투로 말하면서 네가 용서받을수 있다고 착각하는건 아니냐고- 그렇게 꼭 한번은 물어보고 싶었다. 나는 세상 모든 신들이 싫다. 특히 뺨을 때리면 반대쪽 뺨도 내밀라는 그들이 싫다. 난 그렇게 하고 못산다. 서로 미워하고 서로 헐뜯고 하는거 보기 흉하다고 그런 행동은 어리석다는 그들이 싫다. 네가 당해봐, 내가 당하면 나역시 힘들고 아플거다라고 가정하지말고 네가 직접 당해봐. 그러면 내가 왜이러는지 알거다. 아프냐고? 나도 아프다고? 네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내 억울하다는 심정을 토로하는것이 미워하는 마음이 아둔하고 어리석은짓이라고 여기는 네가 어디를 봐서 아픈인간이야. 가증도 정도껏 떨어라. 어이, 신 당신부터 강간 당하고 보자고. 한번 더 하라고 한다고? 웃기시네, 넌 벼락을 내리칠거다. 죽여버리겠다고 온세상 풍비박산 안내면 다행이지. 나에게 나쁜짓 한 인간이 싫다고, 또 싫다고 하는게 지겹고 바보같은 중생의 행동이라고 말하는 네 면상한번 갈겨줄까? 네 식대로하면 세상살이 하면서 이런일도 당하고 저런일도 당하니 그러려니 하고 참고 넘어가야하는거잖아? 강간범. 그놈 나쁘고 또 나쁜인간이지만 그인간 나쁘다, 나쁘다 허구헌날 말 하는 내모습이 보기가 힘들고 지치고 지겹냐? 그냥, 허허 내가 그렇게 멋지고 잘나서 덮쳤나보다 하고 넘어가라고? 멋진놈이랑 신나게 한판논셈 치고 넘어가라고? 너나 그래. 난 못그래. 죽을때까지 평생동안 나를 깔아뭉갠 우영원을 미워하고 세상 끝날때까지 증오하며 살거다. 그러다 죽게 냅둬. [수근수근] [쑥덕쑥덕] [꿍얼꿍얼] [속닥속닥] [중얼중얼] [시끌시끌] 우영원이 올림픽 대표팀 합류 할수 있도록 녀석의 팀에서 협조하는데는 여러가지 포석이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올림픽에 출전해서 군대면제를 받는것이 그 이유이겠고, 두번째는 지난 2년간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필요할 때에 선수를 국가대표팀에서 뛸수 있도록 언제나 보내줬다고 생색을 내는것이 또 다른 이유이겠고, 마지막 세번째는 내년에 있을 재계약을 위해 우영원 쪽에서 제시하는 것들을 거절해서 좋을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올림픽 대표팀 후배들은 꿈의 무대라는 유럽 리그에서 한창 날리고 있는 우영원이 와 있다는것에 대해 무척 동요하는 눈치들이다. 하긴, 내 또래 동기들도 모두 우영원의 이름을 거론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해대는데 후배들이라면 우영원은 최대의 라이벌이자 우상일 수 밖에 없다. 동경의 대상인거지. "지웅이형" "어" 올림픽 예선전이 끝나면 곧장 나와 우영원은 대표팀으로 옮겨가 월드컵 2차 예선전을 치루게 된다. 일주일 간격으로 있는 올림픽과 두번째 월드컵 예선전이며 그후에 다시 있을 올림픽 예선전등 친선경기까지 다 합쳐서 한달에 최소 한번은 있을 경기들 덕분에 우영원과 뻔질나게 봐야할 운명이다. 그런데 나와 우영원을 보는 주위의 눈길이 심상치 않다. 내 이름을 부른 후배녀석은 내 입술을 빤히 쳐다봤다가, 우영원의 입술을 빤히 쳐다봤다가, 다시 나를 한번, 그리곤 우영원을 한번 보며 두리번 거리더니 얼굴이 확 붉어진다. 이새끼, 너 지금 무슨 생각했어!!! "민수현, 불렀으면 말을해" "아니야"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불타오르는듯 붉어진 수현이는 신경질적인 내 눈길을 피해 슬금슬금 제친구들 속으로 파고들어버린다. 뭐야, 분명히 기분 나쁜일인건 맞는것 같은데 뭐라 딱히 잘못한게 없으니 혼을 낼수도 없다. 내가 울그락 불그락 열이 오르려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우영원이 비딱하게 웃으며 한마디 한다. "같이있게 되서 무척 미안하네" 여러 빛깔을 하나로 뭉쳐둔 듯한 목소리가 비웃으며 말한다. 후배와 선배가 한방을 쓰는게 예전의 관행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선배가 후배를 시종 부리듯 부려 먹는다는 이유로 요즘은 서로 원하는, 과연 뭘 원하는 관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간 서로 같은방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한방을 주고 되도록 선배와 후배는 붙이지 않는게 새로 생긴 룸메이트를 정하는 룰이다. 덕분에 나는 우영원과 올림픽 대표팀에서도 한방에서 자는 영광을 차지하게 됐다. 감독님 말씀이 대표팀에 있을때 이미 같은 방에서 지내봤으니 서로에 대해서 잘알꺼라나 뭐라나 별 시덥잖은 소리를 하시면서 같은방 열쇠를 내주셨다. 기분은 뭐, 대략 좆치 못하다. "우와, 형 인간 맞아?" 꽃샘추위로 추웠던 한국 만큼이나 펑펑 눈이 오는 원정지는 살 떨리게 싸늘한 날씨였다. 그덕에 실내에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말많은 후배녀석 하나가 쪼르르 쫓아오더니 옆에 앉자 마자 한다는 소리가 저거다. 그럼, 내가 인간이지 괴물이야? 한마디 쏘아줄까 말까 고민하면서 쭉쭉- 몸을 늘리고 있는데 머리 위로 싸한 기운이 떨어진다. "저런걸 괴물이라고 하지" 팔을 늘리고 있는 내 옆을 지나가던 우영원이 후배에게 농담처럼 키득이며 툭 던지듯 말하자 후배녀석들은 뭐가 그리도 재밌는건지 모두 한통속이 되어 [케득케득] [음컁컁] [켈켈켈켈] [큭큭큭큭] 이라는 변태의 웃음 소리를 흘리면서 다들 즐거워하기 바빴다. 누가, 괴물이라는 건데? 너, 지금 나한테 시비거는거지? 씨발, 지는 졸라 미친새끼인 주제에 어제부터 왜 자꾸 태클이야, 태클이-!!! 맞짱 한번 떠보자는거냐? "지웅이형은 여자도 아님서 막 다리 쫙쫙 늘어나는거 보면 진짜 신기해" "그러게 괴물이래도" 언제 친해진건지 아니면 돈이라도 먹인건지 우영원과 한패거리가 되어있는 후배들은 녀석과 재미나지도 않는 이야기를 조근조근 재미난척 떠들어대고 있었다. 저런 개같은것들을 구석에 박아놓고 팰수도 없고, 진짜 짱나게. 씨발. 욕이 마음 속에서 마구마구 샘솟았지만 난 벌떡 일어나 굴러다니는 공하나를 지고 센터링 연습이나 하러 갔다. 미친놈들이랑 어울릴바에야 차라리 스스로를 격리 시키고 말겠어. 세상을 왕따 시켜주마-!!! "형, 거기서 혼자 먹지 말고 이리와서 같이 먹어!!" "됐네" 연습은 물론 식사를 할때에도 나는 철저히 혼자이고자 했다. 축구는 단체경기라 그런 행동이 얼마나 위험하고 또 좋지않은가를 잘 알지만 저런 미친 또라이에게 홀라당 속아 넘어간 바보 멍청이들과는 함께 있고 싶지 않다. 하여, 올림픽 대표팀 합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요즘은 나는 진짜 왕따가 되어버렸다. 뭐랄까 스스로 격리시킨다고 했는데 내 근처에 사람이 얼씬도 안하니 무척 울적해져 버렸다. 그나마 경기에서 모두와 하나로 뭉친다. 경기에서 지면 인생 끝장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말이 많은지 공좀 못차면 '공갈포'니 '불량감자'니 별명도 아주 얄쌍하고 끔찍하게 잘도 붙인다. [삐익-]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선수들은 모두 짜증이 나있는 상태였다. 경기장이 정말 꽁꽁 얼어 붙어버릴 만큼 추웠다. 팔, 다리는 뻣뻣하고 몸의 근육은 딱딱하게 굳어있고 거기다 고지대인 이곳에서 뛰는것은 평소의 몇배나 되는 체력을 소진해야 한다. 이제는 3월 중순이건만 아직도 경기장 밖은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수북히 와있고, 하늘에선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몸이 굳어지는 곳에서의 경기란 심판도, 선수도, 스탶도, 응원단도 움츠려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씨발, 저새끼 뭐야!" 진흙탕 물이 튀는 곳에서 뛰는것도 힘이들 터인데 뒤에서 '코브라 트위스트' 라는 레슬링 기술과 흡사한 태클을 우영원이 당하자 옆에서 뛰고 있던 후배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상대편에게 태클 당해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넘어져있는 우영원의 인상이 그리 좋은건 아니였지만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는 후배 녀석보다는 훨씬 인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짝 일그러진 우영원을 향해 주심이 뭐라뭐라 몇마디 물어보더니 옐로우 카드를 빼내어 들고 우리팀의 프리킥을 선언했다. 널부러지듯 그라운드에 엉거주춤 앉아있던 우영원은 그제서야 느즈막히 느릭느릭 일어나더니 프리킥 할 공을 한번 들었다 놨다 한다. "남지웅" 허리가 뒤로 휘었던게 많이 아픈지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린 우영원은 내 어깨에 [턱-] 하니 팔을 걸치더니 옆줄 가까이로 질질 나를 끌었다. 축축한 기운이 내 전신을 감싸안았다. 날씨는 춥고, 바람에 묻어나는 얼음냄새는 폐를 얼어 버리게 할 것같고, 경기장 바닥도 엉망이고, 응원 온 사람들도 빨갛게 볼이 얼어있는 모습이라 볼성 사나웠다. 그런데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거의 반쯤 끌어안고서 경기장 밖으로 당기는 우영원은 이상하게 뜨거웠다. 우영원이 냉온동물 [이런 동물이 있는지 조차 확인된바 없다] 이라서 그런게 아니라 녀석이 내게 닿자 '우영원이 내몸에 닿았다' 라고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반대로 몸에는 열기 확 퍼졌다. "왜" "지금은 우리 같은편이지?" "그래" 구석으로 끌고가며 낮은 목소리로 뭔가 확인을 하듯 내게 물은 우영원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꼬리를 휘며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을했다. 내 귀로 흘러들어오는 우영원의 전술은 흔한것이었지만 꽤 쓸만했다 "내가 넣는척 하면서 앞으로 뛰어 갈테니까 내 뒤에서 멀찍이 서있다가 뛰어와서 넣어" ".............. 못 넣으면?" 전술은 뭐 쓸만하다만 난 킥커가 아니다. 보통 어시스트를 많이 해주는 편이다. 골을 못 넣는건 아니였지만 골이 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주로 해왔지 스트라이커로써 축구를 한적은 없었다. 내 어이없는 대답에 웃고 있던 우영원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표정이 굳어진다. 빤히 쳐다보는 내 얼굴 옆으로 점점 녀석의 얼굴이 다가오더니 귀에다 대고 나직하게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한다. "못 넣으면, 오늘 밤에 덮쳐버릴거야" 그말을 끝으로 내 엉덩이 [툭툭-] 가볍게 두어번 치곤 공쪽으로 가더니 후배 녀석들에게 상대편이 모르도록 여지껏 내게 말한 전술을 다시금 말하고 있었다. 후배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짜증에 절어있던 표정들을 털어내고 굳어 있는 몸을 풀려는듯 폴짝폴짝 금방이라도 앞으로 달려나갈 태세로 모두들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우리쪽에서 준비가 되었다고 하자 주심이 [삐익-] 하고 휘슬을 다시 불었다. 우영원은 호각 소리와 함께 멋진 폼으로 몸을 공중에 뛰우더니 앞으로 쌔앵- 하고 달려나가 버렸다. 우영원이 앞으로 달려나가자 놀란 수비들이 전열을 흐트러졌다. [모션 하난 끝내주는군] 이라고 생각하며 수비가 흐트러진 그틈으로 [툭-] 공을 차넣었다. '못 넣으면, 오늘 밤에 덮쳐버릴거야' 귓가에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무척 좋은자리, 거리도 전방 28미터로 아주 못넣을 정도로 먼 곳도 아니였다. 내 머리는 날아가는 공을 보며 못 넣으면 전국민이 아쉬할것 보다 오늘밤 안전하지 못할 내 안위를 더 걱정이 됐다. 들어가라. 들어가라. 제발, 들어가라. [철썩-] 공이 네트를 흔들자, 내 얼굴이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피속에 엔돌핀이 펑펑펑- 불꽃처럼 터지는것 같다. "야호! 들어갔다" "아싸!" 활짝 웃고 있는 내 주위에서 멋지구리하게 모션을 취해준 후배들이 서로 좋아서 뒹굴고 있었다. 진짜 들어가다니 라고 놀라며 돌아서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를 [휙-] 돌려세운다. "읍-" 우영원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칼 속으로 파고들더니 뒷머리를 강하고 움켜쥐었다. 그리곤 나를 자신쪽으로 확 당기더니 '쪽-' 민망한 소리를 내며 우영원의 입술이 내 입술에 부딪혔다가 떨어져 나간다. 윽. [벅벅벅] 손등으로 입술을 쓸어버리고 싶지만 악의 없이 활짝 웃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우영원을 보니 차마 닦을 수가 없다. 처음이었다. 웃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그냥 기뻐하고 있는 표정인것은. "씨발, 너 좀 있다 보자" "지금 봐도 되는데"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중얼거리듯 녀석에게 으르렁대자, [큭큭] 악마의 웃음소리를 내며 우영원이 말한다. 지금은 경기중이니 일단 넘어가고 좀있다 아주 아작을 내주마. 으득. 이를 악물며 어서어서 경기를 해치워 버리자고 전열을 불태웠다. "야, 이 변태 호모 새꺄" 경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저녁까지 참고 또 참으며 모두가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가길 기다렸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온 우영원을 향해 나직하게 욕했다. 경기장은 냉동실 처럼 춥더니 호텔 방은 쪄 죽일려는건지 찜통이 따로 없다. 그러나 그 뜨거운 곳에서 열기띤 얼굴로 화르륵- 불타오르듯 화를 내고 있었다. 신문에 또 다시 남자와 키스를 한 남자로 실리고야 말았다. 내일 조간신문은 안 봐도 비디오다. 씨발, 개쉑! 경기가 끝나고 바쁘게 돌아와 버려서 우영원이 뭐라고 이번에 둘러댔는지 알수는 없지만 경기가 한창 진행 되고 있는 사이 실린 속보에는 '우영원, 오늘도 남지웅과 키스 세레머니'라는 무척 보기 껄쩍찌근한 제목의 기사가 나있었다. "야, 이 개 같은 새꺄 너 진짜 죽고 싶어?" 같은편이 골을 넣었는데 기뻐하는것 보다 몸을 움츠리며 하프라인 근처에 있다가 재빨리 골라인 근처로 이동하는 선수는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을거다. 내 첫번째 골 이후에 이름값을 하듯 우영원은 멋진 헤딩슛을 성공 시켰다. 하지만 난 기뻐하기 보다 '저 미친새끼를 피해야해-!!!' 라는 남자로써 무척 쪽팔리는 생각을 하며 일촉일발을 다투며 뒤로, 뒤로 후퇴해야 했다. "변태 호모 새끼인거야, 개 같은 새끼인거야?" 이상한데서 꼭 말 꼬투리 잡는 우영원이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요지를 찾지 못하고 헛질문을 했다. "둘다야" 잔뜩 독이 올라 열을 내고 있는 나를 본 우영원은 긴 한숨을 내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너 뭐 잘했다고 인상쓰고 지랄이냐! 지랄이!!! 지금이라도 당장 한대 패주고 싶지만 며칠전 한국에서 한대 패려다 오히려 당한 경험이 있어서 나는 몸을 사리고 있었다. 뚫어져라 우영원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데 우영원이 저벅- 내게 한걸음 다가왔다. "진짜 죽이려고?" "한 번만 더 그래봐. 진짜 죽여버릴테니까" 시종일관 화를 내는 나와 달리 뭔가 착찹한듯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우영원이 내게 한발자국 더 다가왔다. [턱-] "뭐야?" 마주선 나를 뒤에 있는 벽을 [휙] 밀치더니 저벅저벅 다가온다. 당황해서 물어보는 내게 우영원은 일말의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듯 험악한 분위기로 나를 벽에다 바싹 붙이더니 입술을 마주쳐왔다. "읍-" 꼬물꼬물. 나름대로 반항이라고 입을 꽉 다물고 버둥버둥 몸을 바동거렸지만 덩치에서 밀리는데다 인간병기라 불리는 용가리 통뼈를 가진 우영원의 엄청난 골격을 당해낼수가 없었다. 거기다 훌륭한 하드웨어를 가만두지 않고 열심히 갈고 닦은 우영원의 노력으로 녀석의 몸을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근육으로 이루어진것 처럼 단단했다. 아마, 이 미친 변태 호모 개쉑은 머리속까지 근육으로 가득차 있을거다. "우웁..." 거칠게 맞물린 입술을 정신없이 비벼대던 우영원은 강제적으로 내 입술을 열고 안으로 침범했다. 까슬까슬한 혀의 돌기가 입천장을 한번씩 쓸어댈때 마다 눈물을 찔끔거릴 만큼 거칠었다. 난폭하게 혀를 굴려대던 녀석은 혼을 쏙 빼놓을듯 입안을 마구잡이로 범했다. "하아-" '쪽-' 소리를 내며 침으로 범벅이된 내입술과 우영원의 입술이 떨어졌다. 노골적으로 나를 빤히 내려다 보며 우영원은 '흐음' 하고 신음성 한숨을 내뱉더니 내 턱을 다시 쥐어올렸다. 뭐하려고? 라고 묻는 내 눈빛에 대답을 보류한체 이번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입술을 거칠게 맞무는것으로 대신했다. 예고도 않고 목구멍으로 넘어온 물컹한 우영원의 혀가 느껴졌다. 내 아랫입술을 물고, 핥고, 빠는 녀석의 움직이 생생하게 말캉거리는 혀를 통해서도 느껴졌다. 밀어 넣어둔 혀는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 아랫턱을 요령있게 비틀며 내 아랫입술을 먹어버리듯 해치운 녀석이 떨어져 나갔다. "..... ..... .... " 하아, 하아 하고 내쉬어야할 가쁜 숨소리를 억지로 참았다. 뭐하자는 걸까? 왜 이래? 너 진짜 돌았어? 눈물이 차오르는 눈으로 녀석을 올려다 봤다. 붉게 부풀어 오른 입술이 또 다시 밀려왔다. "읍-" 내 어깨를 끌어 안은체로 부드럽게 입을 맞춘 녀석이 떨어졌다. 다시 붙었다. 떨어졌다. 종전의 두번과 달리 무척 다정하게 입술을 부빈 우영원이 완전히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물끼가 도는 새빨간 혀로 여지껏 나를 부비고, 핥고, 빨아댄 입술을 한번 훑은 우영원은 '쪽' '쪽' 쪼듯이 입술을 두번 더 맞췄다. "다섯번 했는데, 다섯번 죽일거야?" 이때까지 보아온 우영원의 빈정대듯 물어왔던 태도가 아닌 어딘가 한탄하듯, 답답한듯 물어오는 질문에 억이 막혀 버렸다. 뭐라는거야 이자식이 지금? 뜨겁게 달아오른 눈가를 쓸며 우영원을 노려봤다. "나는 칼보다 총이 좋더라"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를 하며 우영원이 내손을 잡았다. 잡힌 손을 빼내려고 하자 어거지로 제 왼쪽 가슴 위에 내 손을 올리더니 쓰게 웃는다. [쿵-쿵-] 시끄럽게 쿵덕이고 있는 우영원의 심장의 팔딱거림이 손끝을 통해 내몸 안으로 퍼져왔다. "이왕이면 27살때 죽여줘. 내가 음악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천재는 그때 많이 죽는다더라" "...................." "....... 천재는 아니지만" 연거푸 키스를 퍼부었던 뻔뻔한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조용하게 읊조리듯 내게 말하는 우영원이 낯설었다. 푸른 빛을 뿜어대며 날카롭게 나를 내려보던 모습이 아닌 서늘한 기운을 뿜으며 잔잔한 그 모습이 생경했다. 삐딱하게 비꼬기만 하던 말버릇은 달라지지 않은것 같은데 여러가지 색깔을 가진 이상한 맛의 목소리도 여전한데 말을 마치고 휙-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리는 우영원은 오늘 처음 만난 사람 같았다. [쾅-] 옆에 놓여있던 전화를 문쪽에다가 던져버렸다. 침묵 속에서 꿈틀대는 묘한 이질감에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 있는 물건을 한번에 바닥으로 휙- 쓸어버렸다 [와장창] 플라스틱 파편이, 유리 조각이 바닥으로 공중으로 튀었지만 신경을 닳게하는 기묘한 감정의 출현에 내 머리는 이성을 상실해버렸다. 물건을 한참동안 던지고 때려부시던 손이 허리 아래로 축 늘어졌을때 내 몸둥이는 침대를 향해 풀썩 나동그라졌다. 올림픽 대표팀의 경기를 한번 더 치루고, 이번에는 국가 대표팀의 3월 마지막 경기를 치루기 위해 외국에서 또 다른 외국으로 우영원과 나만 이동했다. 우영원 쪽에선 우영원과 우영원의 매니져, 우영원의 에이전시 스탶 몇명이 동행했고 나는 단촐하게 혼자만 합류를 했다. 아직 학생이고 프로쪽과 미리 연락이 닿은 상태도 아니니 나 혼자인게 당연한데 우영원의 매니져라는 사람은 '잉? 너 혼자??' 라는 눈으로 한참이나 나를 노려봤다. 내쪽에 신경쓰기 전에 당신의 또라이 선수나 잘 보필하시지요. 이전에 있던 곳도 더웠고 옮겨간 곳도 여전히 더웠다. "여어-, 니네 진짜 사귀냐?" 제대로 비아냥 거리는 선배의 웃음 섞인 말이 내쪽으로 날아왔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우영원과 똑같은 열쇠를 받아들고 또 다시 같은 방을 쓰게되니 속이 허하다. 지 마음껏 키스를 해댔던 우영원은 그 후로 잠잠하다. 이것은 폭풍 속의 전야라고 생각이 들정도로 고요하다. 남들은 언제 일이 닥칠지 몰라 두렵다지만 난 이 폭풍 속의 전야가 훨씬 좋다. 적어도 지금 만큼은 조용하잖아. 이 고요함이 오래도록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쟤는 지네팀에는 안가봐도 되는거래?" "모르죠" 식사시간 뷔페 테이블에서 '뭘 먹을까'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선배님 하나가 내게 물어온다. 우영원이 포부도 당당히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을 힐끔이며 꽤 민감한 문제를 물어본다. 19살 고3 말 무렵 정말 '징하다' 싶을 정도로 칼같이 날짜를 헤아려 딱 퇴학 당하지 않을 출석일수를 채워놓고 유렵으로 날라버린 우영원은 지금 프리미어 리그에서 세번째 시즌 중이였고 첫해에 어마무시한 기록을 세우고 100% 연봉인상으로 재계약을 했고, 한시즌 더 뛴뒤에 내년에 또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는 소위 굉장히 잘나가는 선수다. 물론 구단으로써는 돈이 많이 들테니 조금 안좋을수도 있겠지만. "네들 말이야 무슨 사이냐?" "..........." 원수지간이지요. 웬수 말구요 원수요. 다른말로 짧게 '적'이라고도 부르지요. 우걱우걱 밥을 먹고, 먹고 또 먹고 있기만 하는 내 앞에서 선배들을 우영원과 나의 관계에 대해서 심도있게 이야기를 나눈다. 본인 앞에서 차마 해야할 말이 아닌 '서로 키스도 한 사이', 이자 ' 뽀뽀도 얼마전에 한 사이' 라며 아주 노골적으로 말을 하는데 듣고 있기가 무척 거북하다. 듣다가 듣닫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대충 접시를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내 뒤에선 여전히 선배님들이 나와 우영원에 대해서 무어라무어라 떠들고 있다. 선배라서 한대 패주지도 못하고 참 답답하다. 어우, 저걸 패, 말어-?! [달칵-] 별안간 날벼락이라도 맞은듯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선배들의 이빨까기에 열받아서 스트레스 받은걸 풀면서 동시에 몸도 풀기위해 가볍게 운동장을 뛰고 들어와 아무 생각없이 욕실 문을 열었는데 욕조에 우영원이 뜨거운 물을 맞으며 서있었다. 빡세기로 유명한 프리미어 리그에서 드물게 우영원은 아트축구를 구사하는 팀에서 뛰고 있지만 누가 뭐래도 프리미어 리그는 아직까지도 일명 '뻥축구'가 주류를 이룬다. 뻥축구? 말 그대로 뻥차고 죽어라 달리는거다. 그러므로 팀이 아트축구를 구사하더라도 어느정도는 '킥 앤 런' 에도 재주가 있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장신의 키와 파워풀한 킥력이 필요하다. 그 모든걸 구사하려면 저런몸이여야 하는가 싶다. "... 미, 미안" [깜짝] 놀란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게 조금 면팔리는 일이긴 했지만 사과는 해야한다. 그런데 씻을거면 문은 좀 잠궈두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긴, 건장한 골격에 딱잡힌 근육 탄탄하고 꽉 짜인 몸이라면 문을 안잠궈도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우영원이 서울에서 내 허벅지 잡은게 기억이 난다. 그후에 뭐라고 했더라? 축구선수 허벅지가 어쩌고 저쩌고 한거 같은데 여하간 욕이 였었지. "괜찮아. 그냥 써" 밀실 더군다나 욕실은 구조상 목소리가 심하게 울린다. 기묘한 파동을 내는 우영원의 목소리가 그 욕실 안에서 귀에 이명이 일만큼 독특한 목소리를 들려주며 울렸다. 쓰라는 녀석의 말을 뒤로하고 나오면 또 뭣할것 같아서 반쯤 열린 문을 닫고 세면대에 물을 받았다. 그리고 지지난번 원정지가 오발나게 추웠다면, 지난번 원정지와 지금 와있는 이곳은 끝장나게 덥다. 물이 고프고 쓰라는데 안쓸 그런 입장이 아닌거다. 옆에는 여전히 맨몸으로 [당연하다, 씼는데 옷입고 씻는 인간은 없다] 물을 맞고 있는 우영원이 있다. [촤아아아아아아-ㄱ] '더워도 간단히 세수만 하고 나가야겠다, 녀석이 나오면 그때 씻어도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물을 손으로 뜨려는데 머리 위로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뒤돌아 보자 제몸에 뿌리고 있던 뜨신물을 우영원이 내게 직격탄으로 뿌리고 있는게 보였다. 그것도 웃으면서 뿌리고 있었다. 이런 개씨발스러운 새끼가 있나! 그냥 쓰라고 할때부터 뭔가 있는게 틀림 없었다. "윽-! 뭐 하는짓이야-!?!!" 커다란 내 목소리가 욕실의 벽에 튕기며 거대한 소리를 내서 귀가 다 아플지경이었지만 우영원은 내게 물 뿌리는것을 멈추지 않고 웃는 낯으로 참으로 천진난만한냥 물을 퍼붓고 있었다. 하얀 증기가 일지만 특별히 심하게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을 내게 뿌려대는 녀석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질까보냐? 너 오늘 죽었어, 십쌔. "읏-!" 난 세면대 수도꼭지를 가장 차가운 냉수쪽으로 휙 돌리곤 손으로 수도꼭지를 막아 물이 우영원쪽으로 날아가게 만들었다. 찬물 맛을 본 우영원이 '으힛' 하고 놀라는 꼴을 바랬지만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인생인건지 우영원은 아쉽게도 인상을 한번 그리기만 한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세수하려는 놈에게 물을 퍼부어-!? 그것도 뒤에서 예고도 없이-??!! 하긴 예고하면 '그래, 뿌리렴' 하며 가만히 맞아줄 놈도 아니지만. 세수 하려는 녀석에게 샤워기로 뒤에서 물뿌리는 우영원도 우영원이지만, 홀딱 벗고 있는 놈에게 무지막지하게 찬물 사례를 퍼붓는 나도 나지만, 무엇보다 둘중 한녀석도 한치의 양보도 있을수 없다는 듯 여전히 상대에게 물을 뿌리는 모습이 엄청 징하다. "그만해, 그만해 씨발 새꺄! 욕실에 물 찼잖아-!!!!" 한국의 욕실 구조는 바닥에 물이 빠지도록 되어 있지만 외국은 그렇지 않다. 덕분에 지금 욕실에 흥건할 정도로 물이 차있다. 잘못하면 방으로 물이 넘칠것 같았다. 내가 꽥꽥 오리처럼 소리를 질러대자 그제서야 사태가 파악이 된건지 우영원의 표정이 망연자실하다. 씨불놈, 니 혼자 다치워!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도 지은죄가 있어서 얼른 옆에 있는 바가지 같은것으로 물을 퍼 욕조 안으로 쏟아 넣었다. "이게 무슨 쌩-고생이야-!"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치자 우영원이 제죄를 아는듯 거들먹 거리지 않고 조용히 혼자 시근거린다. 철 좀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아니였다. 그런가 싶었는데 역시나 아닌거였다. 물을 같이 퍼 담으며 옆에서 중얼거리는 말이 가관이다. 이런 미친놈. "그러게 누가 덤비래" "그럼 가만히 있을줄 알았어-?!!!" 혼잣말로 한듯했지만 난 지지않고 소리를 쳐주었다. 안그래도 물통에 빠진 생쥐꼴이라 축축하게 온몸이 다 젖어서 짜증이 나는데 우영원은 비 맞은 중마냥 옆에서 중얼중얼 군말이 참 많았다. 난 그때마다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녀석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이번엔 쌍방으로 죄가 있지만 먼저 시작한건 너잖아? 뭘 잘했다고 궁시럿 거려? 싫다, 싫다, 싫다고 우영원이 싫다라고 노래를 부를 정도지만 이렇게 징글징글 철천지 원수마냥 싫을수가 있을까 싶다. "옷이나 입지" "남이사" 여전히 홀홀단신 맨몸인체로 물을 퍼대고 있는 우영원을 보며 내가 비아냥 댔지만, 우영원은 별일 아니란듯 툭 던재듯 대꾸를 한다. 갓 대표팀에 왔을때 선배들이 뒤에서 우영원의 이야기를 한적이 있었다. '그놈 그거 나이도 어린게 물건이 아주 실하지' 라고 말이다. 실제로 내눈에 보이는 우영원의 물건은 매우- 매우매우매우- 심하게 실했다. 실한걸 넘어서 무기수준이라고 본다. 몸집이 크니 물건이 큰건 당연하다. 기분 나쁘게스리. 그리고 머리에 또렷이 떠오르는 살을 꿰뚫린 기억. "뭘봐?" 비식-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우영원이 내게 묻는다. 빤히 자신의 아랫도리를 심각하게 쳐다보는 내 모습을 놀리려는 듯한 그 모습이 역겨웠다. 방금 전까지 그런 생각 일절 들지않고 징글징글하다고 하면서도 큰 거부감 없이 잘도 투닥였는데 순간 떠오르는 한조각의 기억으로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고 속이 미식거리고 두려움이 몰려온다. 씨발. "보여줄것도 없는 주제에 뭘그래" 톡쏘듯 대답을하고 고개를 돌려버리는데 내 얼굴을 [휙-] 제쪽으로 우영원이 돌린다. "인정할건 인정해야지. 내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내가 몸하나는 어디가서 빠지지 않거든" 웃을듯 말듯 입매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내려왔다 한다. 그 빠지지 않는 몸을 가진 주제에 왜 길가는 사람을 강간을 해? 그것도 남자를. 진짜 이녀석 말대로 호모인건가. 고개를 다시 휙 돌리며 기분 나쁘라고 한마디 했다. "변태 호모 주제에" "그런 변태 호모 몸을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징그럽거든. 가려라, 좀- " 따끔하게 삐죽여주고 욕실 바닥을 수건으로 대충 닦고 문을 열고 나왔다. 축축하게 젖었던 옷도 어느덧 다 말라갔지만 그래도 갈아입어야지 하고 옷장쪽으로 걸어가는데 침대 위에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환이형" "오냐, 남지웅" 늘씬한 다리를 가볍게 꼬고 앉은 정환이 형이 보였다. 물론 그앞에 상철이 형도 보였다. 우리팀의 주장과 에이스. 무슨일로 오셨는지 이제 말해주지 않으셔도 안다. 욕실에서 싸우는게 아니였는데, 적어도 소리라도 지르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가 물 밀듯이 밀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선배님" "내가 싸우지 말랬지" 그것도 아부라고 나름대로 '선배님' 하고 부르며 간절하게 불러봤지만 열이 단단히 오른듯 정환이 형은 잇사이로 씹듯이 말을 한다. 운동장을 돌고 들어왔을때 이미 느즈막한 시간이었는데 그후로 쭈욱, 계속-, 오랫동안 욕실에서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댔으니 열 받을만하다. 그러나 선배란 무릇 후배를 위해주고, 독려해 주는 조언자이자 조력자이거늘 어떻게 된것이 대표팀 선배님인 이 두분은 상당히 취미가 고약하다. [달칵-] 욕실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우영원이 보였다. 그런데 옷차림이 좀 나빴다. 우영원은 바쓰타올 하나만을 어설프게 허리춤에다 묶은체 나온것이다. 192 센티. 80 킬로그램. 군살 하나없는 몸은 오로지 근육만으로 이루어져 보는이로 하여금 기가 팍- 죽게 할만큼 끝내주는 몸매였다. 거기다 골격도 보기 좋게 쭉쭉 뻗은 형상이라 어디 한군데 구부정한 곳이 없이 올곧게 바르기까지 하다. 같은 인간으로써, 보면 부러움과 동시에 기분이 나쁘다. "여직 저러고 놀았나보네" 상철이 형이 의미심장한 웃으을 흘리며 한마디 했다. 아니에요, 형. 저 바쓰타올 빼고 맨몸인 녀석과 그저 딱딱거리며 싸웠을 뿐이에요. 놀긴 누가 놀았단 말입니까-!!!! 내가 아니다라는 얼굴이자 두 선배님은 '호오-' 라는 굉장히 듣기 거북한 감탄사를 내뱉으셨다. "홀라당 벗고 논거 아냐?" 윽- 정곡을 찔리자 뜨끔해버렸다. 하지만 그런 나와달리 남앞에서 저런 부실한 차림새인체로 뻔뻔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인 우영원은 척척- 내옆을 스쳐, 선배님들 앞을 지나려고 했다. "거기까지. 우영원 멈춰" "왜요?" 보통 기분이 좋을때는 선후배간에 말을 편히한다. 그러나 이런 극박한 상황에서는 존대가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법. 우영원은 정환이 형의 제동에 뚱한 목소리로 대답을하며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얼굴로 뒤로 돌아본다. "니네 그때처럼 수갑에 채워져서 사진 찍어서 올릴래, 아님 요차림 그대로 맥주 얻어오기 할래?" 그것은 우리에겐 너무도 무모한 제의였다. "어이-" "왜" 이곳의 기후는 따뜻한 편이다. 따뜻한 편이라기 보다 뜨겁다에 가깝다. 그러나 밤이었고, 빈 호텔의 복도였고, 물이 뚝뚝 흘러내릴 정도로 물에 젖어 있었으며, 옷차림은 바쓰타올 한장만을 걸친 차림새였다. 나는 아니였지만 옆에 있는 동행인은 말이다. 수갑에 채워져 침대와 나, 우영원이 다시 한번 삼위일체 된 모습이 되어 사진으로써 외부에 공개되서 전국민적으로 변태가 되느니 우영원은 잠시 밖으로 나가는 수모를 선택했다. 나로써는 고마운 선택이었지만 굉장히 거슬리는 제의인것은 어느쪽이건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 미등이 켜진 빈복도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번만 안자" "뭐-!?!!!!" 복도의 반쯤을 걸었을 무렵 우영원이 나에게 당치도 않은 말을 했다. 안아? 누가? 나를 네가? 돌았냐? 내가 아주 미친놈 보듯 노골적으로 불신의 눈길을 보내자 우영원은 '씨발' 이란 매우 좋지못한 말을 으르렁대듯 낮게 내뱉었다. 차가운 빈 복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녀석의 머리칼. 뒤에서 이상한 기분들게 만드는 묘한색깔의 미등, 독특하고 특이한 맛을 내는 목소리가 더 없는 공포다. "얼어 죽을거 같아서 그래 그냥 한번 안아보자고 누가 덮친데-?!!!!" ".......... 옷 ....... 줄까?" 건장한 체격을 가진 녀석이라 아무래도 더 넓은 표면적을 갖고 있어서 수건 하나로만 바람을 막는것은 불가능 한 일인가보다. 괜한 오해를 해서 대단히 미안해진 나는 녀석에게 좀 눅눅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쓸만한 츄리닝 자켓을 벗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녀석은 뭔가 잔뜩 비꼬인 미소를 살짝 베어물고 나를 무시하듯 말한다. "네옷이 나한테 들어갈것 같아?" "그냥 덮고라도 있던지" 신경질적인 우영원의 질문에 내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뭘 잘한게 있다고 나한테 화를 내? 웃기는 짬뽕이라니깐. "나도 별로 안따뜻해" 내가 매우 미덥지 못한 말투로 다시 한번 말을 꺼내자 우영원은 바쓰타올 한장 걸친 주제에 팔짱을 딱- 낀체로 나를 내려다 보며 조용히 이를 간다. 대략 내용은 '씨발, 얼어죽고말지' 였던걸로 사료된다. 그 모습에 은근히 쫄아버린 나는 특유의 눈치볼때 하는 행동인 손등으로 턱끝 쓸기를 슬쩍 했고, 내가 턱을 쓱- 한번 훔치자 우영원이 '후우' 하고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그리곤 한숨 쉴때 내리깔렸던 눈빛과 정반대인 쏘아보는 듯한 반짝이는 눈이 되더니 기습적으로 내위로 덮쳐온다. "허억-" [와락-] 안아버리는 그 행동에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울컥 속이 요동쳤다. 어깨가 후두둑 혼자 놀라서 떨지를 않나, 여하간 굉장히 흉한 추태를 내어보였다. 내 그런 격렬한 근육 경련에 우영원은 '하..!' 라는 매우 싸가지 없는 콧방귀를 낀다. 스물스물 옷속으로 녀석의 몸이 기어들어와서 주춤주춤 다리가 뒤로 물러나려하자 우영원이 성이 잔뜩 난 목소리로 빈정댄다. "안 잡아 먹어! 안 잡아 먹는다고!" 그 목소리가 그렇게 절박하게 들릴수가 없었지만 얇은 티위로 번지는 우영원의 피부 촉감이 너무도 서늘했다. "하아, 더워 죽겠다" 턱선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무의식 중에 중얼 거렸다. 이것만 끝나면 무려 보름간을 편안하게 보낼수 있다라는 생각에 나름대로열심히지만 빠듯한 일정에 휘둘린터라 몸이 영 말이 아니였다. 아래쪽 쓰리벡의 구심점인 상철이 형이 전반전을 마치고 들어가는 등이 잔뜩 굳어있는게 보였다. 선배의 떨군 어깨가 모두 내죄인양 양심이 따끔따끔하게 찔려왔다. 솔직히 오늘 상대는 조금 만만한 팀이었다. 찌는듯한 더위에 한번 당해본 몸인데도 이 곳의 더위는 종전에 있던 곳과는 또 달라서 더위로 칠렐레 팔렐레 몸이 흐느적 거렸다. "어이" 햇살을 받으면 여러가지 색을 뿜어내는 보석처럼 신기한 음색을 가진 우영원이 밍기적 밍기적 한발 내딛는게 힘이 드는 내뒤에서 태양을 막아서며 그늘을 만들었다. 대답할 기력도 없고 움직이기도 싫고 해서 부름에 나름대로 반응한다고 그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플레이 메이커 자리에 나를 기용한 감독님이 뼈에 사무치게 미웠다. 나한테 이따위 자리를 주다니 감독님이 더위를 먹은게 틀림 없을터였다. "너, 좀 있으면 물되서 흘러 내리는거 아니야?" 땀을 비옷듯 흘리는 나를 보며 우영원이 물만난 고기마냥 나직하게 약을 올린다. 그라운드 위 쏟아지는 햇살. 거기다 팀에 큰 수훈을 할 플레이 메이커 자리를 꿰 찼으니 날씨뿐 아니라 인생도 햇살 받은것이라고 봐야 하나 싶지만 전반전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했던 내모습을 떠올리니 스스로 목을 졸라 죽고싶다. 조금 뒤에 후반전을 또 뛰어야 된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이시각 미확인 행성이 날아와 지구가 멸망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까지 하다. "완전 맛갔네" 목소리 끝에 생긋 매달려 있는 웃음끼에 열이 바르르 올랐지만 그마저 표현할 힘이 없어서 그냥 땅바닥에게 '안녕' 하고 인사를 하며 고개를 푹 수그리기만 했다. 그래, 이때가 기회라 이거지. 맘껏 퍼부우셔. 니 꼴리는대로 떠들어 보라고. 이 씨발놈아-!!! 엄한속을 달랠길이 없어 속으로만 절규를 했다. [스윽-] 손끝으로 제쪽으로 내 고개를 치켜들더니 우영원이 빙긋 비웃어 보인다. "감기 걸린 나보다 어떻게 더 빨갛냐" 우영원은 바쓰타올 하나만 걸치고 나갔던 이유로 기어코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약물복용 의심 때문에 마음껏 약도 먹지 못하고 처방받은 약만 먹은 녀석은 아직 감기가 완치 되지 못했지만 말짱한 나보다 훨씬 나았다. 감기 따위에 헤롱거릴 몸이 아닌거다 저 용가리 통뼈를 가진 인간은. 내 이마에, 내 뺨에, 내 귀에 손을 대었다가 떨어지는 우영원의 손놀림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나한테 감기 옮았어?" '아닐껄' 이라는 간단한 대답조차 할만한 속이 되지 못하다. 스스로 너무나 못해서 울고싶을 만큼 수치스럽다. 그저 망연자실 고개만 절래절래 흔들자 우영원이 특유의 서늘한 기운을 발휘하며 웃는다. 내눈에 우영원의 웃음은 언제나 비웃음 같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5년 뒤에 죽여달라고 말하던 그때의 그 웃음과 비슷해 보였다. 웃고 있는데 지독스럽게 씁쓸한 맛이 나는 웃음이다. "지려고 축구하는 축구선수는 없어. 누구나 다 이기고 싶어해. 뭘 그렇게 혼자서 땅파고 그래?" 내가 휘둥글 눈을 올려뜨자 좀더 담담한 어투로 말한다. "일부러 지려고 한것도 아니고 아직 지지도 않았어. 표정 좀 풀어라. 초상난줄 알겠다" 싱긋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듯 그렇게 떠들고는 우영원은 몸을 돌려 곧장 락커룸으로 자박자박 가버렸다. 아픈놈에게 이따위 말이나 듣다니 참 나도 한심하구나. 질것 같은 폐색이 짙은 모습이 속상해서 울증 걸린 놈처럼 음산한 기운 퍼트리고 있는 내게 와서 나보다 더 음산한 놈이 산뜻하게 말하는 모습이라니 '피식' 마른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픈 주제에 개폼 잡기는. "물 마셔, 물" 코치님이 락커룸에 들어가자 막무가내로 냉수를 쥐어주신다. 정말 끝장나게 더운 이날씨 속에서 앞으로 또 45분간 뛰어야 한다는 사실이 고문 같이 여겨지지만 그게 내 일이고 내가 할수 있는 모든것이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짜증이 나게 마련이라 서로 건드리지 않는게 철칙인데 먹는 냉수를 온몸에 뿌린 우영원이 옆에 있는 선배들에게 답지않게 장난질을 치고 있는게 보였다. 아픈주제에 아주 죽으려고 애를 쓰는구나. 감독님은 내옆으로 오셔서 간단하게 자석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전체적인 대열에 대해 설명을 하셨다. 대충 뭔말인지는 알아들었지만 공이 오면 가서 받아야 할 입장이지만, 사실 이 날씨, 이 체력, 이 기분에서는 어느누구도 공을 맞이할 기운이 없을듯 싶었다. "찡그린 얼굴 미운 얼굴이란 애들 노래도 모르는거야 아니면 지금 나한테 시위하는거야?" 락커룸을 들어서면서도, 거기에서도, 나오면서도 계속 쭉 찡그린 얼굴이었던 내 얼굴에 불만이 많은지 우영원은 경기장에 자리를 잡으러 들어가면서 뚱하게 물어온다. 내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피고있던 너랑 뭔상관이냐고. 넌 가서 골이나 넣으라고. 자신의 말에 한결 더 띠거워진 표정이 된 나를 보며 우영원이 척하니 내 어깨에 손을 걸친다. 이게 지금 미쳤나. 경기 시작하려고 하는데 눈썹이 휘날리게 전방으로 뛰어가야 되는 주제에 어디서 여유를 부리고 있어. "가서 골이나 넣어, 씹새꺄" 최전방 바로 뒤에 자리를 배치 받은 나는 남은 45분도 녀석의 등을 보고 뛰어야 한다. 적절히 공을 배급하고 있지만 나조차도 내 볼 배급이 시원찮다는걸 알고있다. 아까 할말을 다 못한듯 우영원이 씨익- 눈꼬리를 얄팍하게 휘며 웃어 보인다. 남자새끼가 나한테 눈웃음을 치다니 소름 돋는다. 더군다나 네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거냐? 더불어서 그 등치가 아깝지 않냐? 어디서 괭이새끼 처럼 눈웃음이야, 눈웃음이-!!! "나랑 싸울때 이거저거 잘도 집어 던져대더니 볼배급은 왜 그 모양이래?" "뭐?" 나도 물먹고 15분간 쉬었고 서늘한 곳에서 기운도 보충이 되었다. 등신처럼 멍하니 듣고만 있는 시간은 지났다는걸 우영원은 모르는건지 알면서도 한번 여기서 맞짱 뜨자는건지 서글서글하게 말을 늘어놓는다. "팍팍 공을 줘야 골을 넣던지 할거아냐-, 막말로 니가 지금 나한테 공을 몇번 줬다고 생각해. 내가 물로 보여?" "뭐?" [등신같은 시간은 지났어!] 라고 스스로 다짐했건만 내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뭐?' 라는 맹추같은 소리 뿐이었다. "스트라이커가 앞에 보이면 재깍재깍 공을 찔러줘야 될거 아니야, 너 나한테 공주기 싫은거 아는데 우리 경기할때는 한팀 이거든-?" "누, 누가 그걸 몰라?" "경기에서는 개인감정은 잠시 뒤로하고 최전방에 있는 나한테 공을 줘야할거 아냐! 너 정환이 형 한테만 공 주는 이유가 뭐냐? 내가 가만히 있으니 가마니 자루로 보여? 아 씨발, 너 정환이 형 좋아하냐? 어? 그래서 나는 공 달라고 간절하게 봐도 못 본 척하고 말야, 정환이 형한테만 공 주는거 아니냐고! 막말로 형은 유부남이야, 너 그거 불륜이다. 알고는 있냐?" 이새끼가 지금 뭐라고 씨부리는거야? 불륜. 유부남. 가마니? 네가 가마니면 나는 부대짜루냐? "닥치고, 가-" 귀를 어지럽히며 줄줄줄 심장이 요동칠 희귀한 목소리로 나직히 말을 하는 녀석에게 나 역시 나직히 응수를 해주었다. 주심은 우리팀의 작전회의라도 있는줄 알았는지 고맙게도 시계를 보며 우리의 눈치를 보고 있다. 이보쇼, 주심. 주심이면 주심답게 카리스마가 있어야 될거아냐! 시간이 되면 빨랑빨랑 선수를 불러서 경기를 시작해야지 그렇게 눈치나 빌빌 보니까 주심들이 줏대가 없다고 욕을 먹는거 아니냐고요!!!! 난 이상한테 화풀이를 하며 돌아가는 우영원의 곧은 등을 보고 살심을 키웠다. 공 못넣기만 해봐 죽었어. [툭-] 삐익-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 우영원은 여유있게 뒤로 공을 내주고 척척척 앞으로 뛰어나갔다. 일단 사람이 많이 뭉쳐있는 왼쪽 측면대신 오른쪽 측면으로 공을 편뒤 우영원의 뒤를 바싹 쫓았다. 내가 쫓아가자 공을 받았던 이가 내게 다시 공을 돌려줘서 밑도 끝도 없이 [툭-] 우영원의 머리를 겨냥해서 공을 날렸다. 못 넣기만 해봐, 진짜 죽인다. [투웅-] 우영원은 달리면서 날아오는 공의 소리를 듣기라도 한건지 몸을 45도 각도로 살짝 비틀더니 공을 향해 다리를 치켜 올리며 몸을 바닥으로 눕혔다. 막말로 몸바쳐 넣는 발리슛인데 발끝에 공이 정확히 얻어맞더니 [휘익-] 소리가 날만큼 정확하게 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골네트를 흔들었다. 씨발, 그걸 진짜 넣냐? 못 넣을껄 이라고 생각했던 공이 들어가자 머리가 순간 띵해졌다. 그래 이새꺄, 니 잘났다 새꺄. 우리팀이 공을 넣었는데 이상하게 씩씩 숨이 시끈 거렸다. "여어-" 후반 시작 2분, 겨우 2분이 지났는데 공이 들어갔다. 그 공을 넣은 골의 주인공이 내머리 위로 커다란 손을 '투욱' 내려 놓으며 요망한 야유인지 부름인지 알수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머리 누르지마 새꺄, 안그래도 작은데 찌부러든단 말야! '타악' 우영원이 손을 쳐내고 휙 돌아가려는데 우영원이 웃고 있는게 보였다. 방금전에 하프라인 근처에서 나에게 속사포처럼 말을 늘어놓을때의 야한 웃음이 아니라 속이 쓰린 웃음이다. 서글퍼 보이는 웃음. 골 넣고 저딴 웃음을 흘리는 놈은 저놈 뿐일거다. 돌았냐? 왜 그래? "수고했어. 플레이 메이커씨. 근데 내가 개인감정은 미뤄두라고 하지 않았어? 놀랐잖아" 내 등을 우영원이 [툭툭] 두번 등을 두드리자 그 두들겨진 자리로 우영원의 울음이 날것 같은 웃음이 묻어버린것 같았다. "이걸로 당분간 못 보겠네" 아쉬운듯 선배님들이 우영원을 향해 인사를 했다. 외국에서 곧장 해산을 한게 아니라 해단식을 국내로 들어와서 하게 되는 덕분에 하루가량 한국에서 머물게 되었지만 선배님들은 당분간은 우영원의 얼굴을 볼일이 없어졌다. 올림픽 대표팀 쪽 경기는 더 오겠지만 국가 대표팀 경기는 오지 못할거다. 프리미어 리그의 막바지 경기와 챔피언스 리그의 최종전등 유렵에 빠듯한 스케쥴이 우영원을 기다리고 있을터이니 말이다. "다음에 뵈요" 우영원은 선배님들을 향해 밝은얼굴로 안녕을 고했다. 국장님이 조르고 졸라서 데리고 오기는 했지만 우영원이 빠져있는 동안에도 팀은 승승장구 했지만 앞으로 일년간 협상 테이블에 앉기 전까지 우영원은 또 얼마나 많고 많은 프로의 경기를 마쳐야 할까 싶을 정도로 안쓰럽기까지 했다. 기브 앤 테이크. 무릇 모든 일은 그렇고 그렇게 굴러가지만 프로의 세계에서는 기브 앤 테이크가 더욱 철저한 법. 나라의 일을 뛰게 해줬으니 처절하리 만큼 운동장에서 우영원을 굴릴것이 뻔했다. 거기다 욕심 많은 협회는 우영원의 몸이 망가지건 말건 팀에서 차출하면 보내주니 올림픽 대표의 경기에 녀석을 기어코 불러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일이다. 잘해도 불쌍하고 못해도 불쌍하니 잘하는게 우영원에겐 득이겠지. "올림픽때 기회 되면 또 보는거지, 예선전때 잘해라." 올림픽 대표 와일드 카드로 지목된 선배님 한명이 우영원을 향해 말했다. 바람은 내가 근 한달간 외국에 나갔다 왔지만 여전히 차가웠다. 100년만의 폭설이 내린 봄은 눈이 있었던 그날도 추웠지만 지금도 계속 추웠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찬바람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런 내게 우영원이 휘휘 손짓을 했다. 내가 개냐? 어디서 오라가라야? "왜" 어차피 올림픽 예선에서 또 볼 얼굴이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볼 일이 없는 녀석이라 밉지만 할수없이 녀석의 앞으로 갔다. 그러자 우영원은 [부스럭] 거리는 비닐 봉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폭탄은 아니겠지? 의심의 눈초리로 우영원을 노려보자 내손에 강제적으로 비닐 봉지를 들려준다. 흘끔 안을 보자 기가 막혔다. "야" "먹고 키좀커. 어디 불쌍해서 봐주겠냐? 한대치면 자빠질것 같더라. 먹고 커라" 내가 화를 내기도 전에 나직하게 한소절 읊은 우영원은 내가 지집 개새끼인냥 머리를 [쓱쓱] 두어번 쓰다듬어 주고는 어디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심장이 먹먹해지는 웃음을 웃었다. 내가 피해자고, 니가 가해자거든? 내가 더 분하고 내가 더 속상하고 내가 더 불쌍해야 되거든. 근데 왜 니가 혼자서 불쌍한척을 다하는지 물어봐도 돼? 왜 청승맞게 지랄이냐, 지랄이. 괜히 매맞은 놈이 미안하게 그런 미안한 웃음을 짓는거야. 언제나 처럼 좀더 뻔뻔해 지시지. "씹새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22살 먹은 놈한테 우유를 선물로 줘? 돈도 많담서, 성장 호르몬 주사 이런거 줘야 되는거 아니야? 나 흰우유 안 먹어!" "그러니까 쥐방울 만하지" 살 떨리게 불쌍한 웃음을 웃는 짓고 있는 주제에 우영원은 한마디도 지지않고 지가 내민 하얀우유의 장점에 대해서 한소절 또 다시 읊었다. 고담백, 완전식품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능청스럽게 말을 잘도 늘어놓지만 얼굴은 여전히 우울한 미소다. 차라리 웃지를 마. "가다가 죽어라, 이딴거나 주다니" "5년 뒤에 네가 죽여주기로 했잖아, 오늘은 안 죽을거야" 받아든 봉지 속에 한가득 들어있는 흰우유를 보며 으득 이를 갈자 우영원은 이상한데서 진중한 어투로 잘도 대거리를 하며 내 머리를 또다시 손가락을 훑었다. 쳐내버려야 하는데 그 지랄같이 억지로 말려올라간 입매 때문에 쳐내버리질 못했다. 최대한 모른척, 아닌척, 서로가 서로를 외면하며 악스럽게 우리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잘있어" "잘가" [다시는 보지 말았으면 더 좋겠다]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이상기후, 끝- [쿵쿵쿵] 이른 아침 철문이 무겁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뻑뻑한 눈을 비비고 일어나 불투명 유리가 달린 미닫이 문을 열고 부엌 겸 거실을 지나 현관 앞에 섰다. 방에 걸린 전자시계는 아침 8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13평짜리 임대 아파트의 내 작은 안식처의 조용한 아침을 방해한 불청객은 여전히 철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문앞에 서서 누구냐고 물었지만 대답소리 대신 철문을 두드리는것으로 자신이 있다는 기척을 하는 외부인때문에 난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 예의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는 인간은. 지금 시절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중순이었다. 굵직 굵직한 대표팀의 A매치나 올림픽 예선은 이미 모두 끝난 상태였다. 날은 따뜻하고 연습하기에 더없이 좋은 때지만 요즘 나는 느즈막한 오후나 되서야 학교에 나가곤 했다. [철컥-] 잠궈뒀던 보조키를 열고, 문을 [삐익-] 열자 쇠문 넘어에 서있던 불청객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을 확인하는 동시에 난 문을 다시금 닫으려고 했다. "야- 남지웅!" 내손에 의해 열려졌던 문이 다시금 닫히는걸 보고 순간 당황해서 잽싸게 다리와 팔을 밀어 넣는 이의 순발력에 나는 경외를 표할수 밖에 없었다. 눈깜짝 할 사이에 얼굴을 확인하고 닫아버리는 나보다 몇초 정도 빠르게 움직이는 대한민국 부동의 스트라이커의 그 동물적 움직임은 운동선수로써 배우고 싶은 감각 중에 하나였다. "뼈 부러지기 전에 빼" 딱 잘라 말하는 나의 거센 반응에도 불구하고 우영원은 밀어넣었던 팔과 다리를 더욱 유리한 위치로 옮기더니 기어코 힘의 우위를 선명하게 내보여주려는듯 두꺼운 철문을 다시 열게하는데 성공했다. 망할.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렇지 문 열자 마자 닫는게 어딨어?" 여기있다. 어쩔래? 탄탄한 몸을 가리고 있는 캐주얼한 옷과 운동 선수로써는 별로 필요없을 법한 지나치게 잘난 얼굴을 숨긴 야구모자에도 불구하고 난 문을 열고 밖을 확인하는 순간 단박에 내앞에 서있는 생물이 우영원이라는 상종해선 안될 생명체인것을 알았다. 여긴 도대체 왜 온거야? "여긴 어떻게 ... 온거야?" "걸어서 왔지. 영국에서 한국까지는 비행기 타고 왔고" 저게 지금 나를 놀리는걸까. 뻔뻔스레 걸어왔다라고 말하는 우영원을 보며 난 눈에 쌍심지를 켰다. 어떻게 내집을 알아낸거냐라는 질문이거든. 바보 멍충이 우영원아. 으득, 이를 갈며 문고리를 두손으로 꽉쥐고 여차하면 문을 닫을 채비를 하자 우영원도 커다란 손으로 여차하면 닫힐지 모를 문을 꽉 그려쥔다. "아, 홍부장이 전화 안했어?" 스포츠 가방을 한쪽어깨에 짊어진 우영원은 가방을 다시한번 어깨에 고쳐매며 홍부장에 대해 거론했다. 홍부장? 홍주원 부장? 5월의 중순이 되기전 대학 졸업반인 나는 꽤 괜찮은 에이전시와 계약을 했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계약 상대를 찾았던게 잘못인걸까, 내가 계약한 곳은 아무래도 우영원을 맡고 있는 그 에이전시 같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안 했나보네. 야, 나 여기 아니면 있을때 없어" 에이전시는 선수의 수명 연장과 좋은 조건 아래에서 운동을 할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이자 운동 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난 후의 일도 어느정도 대비를 해주고 있다. 아마추어와 프로 그리고 국제기관에서 허가한곳과 불법이지만 경험으로 승부하는 곳 등등 여러가지 형태의 기관이 두루 짬뽕이 된 상황에서 조직이 잘 정비된 에이전시를 찾는것이란 거의 하늘에 별따기이다. "홍부장이 여기 가있으라고 했다고?" "어, 나 집에가면 우리 아부지한테 맞아 죽거든" 맞아 죽기가 어디 쉬운줄 아나보지? 맞아 죽는걸 아주 예사로 말하는 우영원은 어딘지 모르게 간절한 기색을 뿌리며 홍부장이 여기로 보냈다라는 명분과 여기가 아니면 난 갈곳이 없다라는 처지를 강조하며 내게 집안으로 자신을 들일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근 두달만에 얼굴을 대면한 우영원은 여전히 뻔뻔하고 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생명체였다. "안돼" 나에게 하는 말인지 우영원에게 하는 말인지 여하간 나의 입에선 부정적인 대답이 흘러 나왔다. 우영원의 현지 처지에 대해서 나는 아는바가 없다. 아는것이 있다면 녀석은 출국한 이래로 줄기차게 프리미어리그의 경기에 출전했고 올해 프리미어리그의 챔피언으로 시즌을 마무리했으며, 챔피언스리그에서도 굉장히 좋은 성적을 냈다는 것이다. 녀석이 유럽리그에서 그런 명성을 떨치는 사이 나와 나의 동료들은 올림픽 예선에 나가 겨우겨우 올림픽행 티켓을 확보했다. 물론, 그사이 동네 축구네, 아니네 그것보다 못하네, 순 뻥축구다라는 뭇사람들의 독기서린 욕을 한덤배기 얻어 먹었다. "남지웅. 나 여기 아니면 있을때 진짜 없어" "너 돈 많잖아. 호텔가" 호텔이 너무 비싸면 여관엘 가든지. 도대체 백만장자 부럽지 않은 부자녀석이 왜 13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나에게 빌붙겠다는거야? 짜증스럽게 대답을 하고 문을 닫으려는데 우영원이 불쑥 가방을 [지이익-] 열더니 연갈색의 야구 방망이를 꺼내서 내민다. 처음엔 이걸로 나를 패려는건가 했다. 드디어 이놈이 살인자의 길에 들어서려는거군이라고 생각했는데 당황스럽게도 그 야구 방망이를 내게 쥐여준다. "내가 나쁜짓을 하면 그걸로 패도 돼. 부디, 제발, 부탁이니까 나 좀 여기있게해줘" 말만 듣는다면 우영원이 나한테 무릎 꿇고 빌고있는가 생각할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192센티의 장대한 기럭지의 키를 꼳꼳이 세우고, 튼튼한 팔다리를 유감없이 선보이며 우영원은 나에게 매우 고압적인 행태로 부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팀을 위해 홈경기를 하는 올림픽 대표팀의 차출에 불응한 녀석 치고는 유럽에서의 대접이 왜 이렇게 안 좋은걸까? 어째서 있을 곳이 여기 밖에 없다는걸까? 그리고 오랫동안 만리타국에서 고생을 한 아들이 돌아오면 아버지는 반가이 맞이 해야하는게 정상이지 않나? 갖가지 질문이 머리속에 둥둥 떠다녔지만 이른 아침인지라 바람이 숭숭 부는 복도에 서있는 우영원이 조금, 아주 조오오금 안쓰러워 집안으로 들이기로 했다. "들어와" "Thanks a million" 나의 들어오란 말에 대단히 영어답지 않은 발음을 구사하며 집안으로 들어온 우영원은 마치 내집이 제집인냥 부엌을 지나 곧장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어깨에 짊어졌던 가방을 내려놓는다. "너 돈 없어? 왜 호텔에 못가는거야?" 사실 진행비는 모두 에이전시 몫이다. 녀석의 돈 있고 없음 따위는 별 상관이 없지만 현재 우영원의 매니져가 보이지 않으니 난 일단 그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돈이야 있지. 그런데 호텔에 가면 찾아올수 있잖아. 기자들이 얼마나 별난데" 스윽, 스윽 겉옷을 벗고 모자를 벗으며 우영원은 치를 떨며 기자에 대해 불만을 터트렸다. 그부분에 대해서만은 녀석과 동감이다. 기자가 좀 별나긴 많이 별나다. 그 사람들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짓도 자신들이 필요하면 불사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리곤 자신들이 정당한 일을 했다는냥구는 그런 사람들이다. "기자들이 널 찾으면 안돼?" 우영원은 꽤 어렸을때 부터 티비에 잘 나오는 편이었다. 인터뷰에도 쇼프로에도 잘 응했던 인간이다. 헌데 이제와서 기자를 피하는건 또 무슨 일인지 모를일이다. "기자들이 찾으면 우리 아부지 찾아올거 아냐" 녀석이 아까부터 줄기차게 말하는 '우리 아부지' 즉 우영원의 아버지가 어떤사람인지 난 잘 모른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것은 나라를 시끄럽게 할정도로 대단한 축구선수인 아들을, 그것도 이제 막 해외에서 쌩고생 하다온 아들이 이토록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니 확실히 우영원이 아버지가 맞는것 같다. "니네 아버지가 너 찾으면 왜 안되는데?" "우리 아부지가 날 찾으면 아마 날 죽일껄" "그러니까 왜?" 줄창나게 질문을 하는 내가 띠거운것인지 우영원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입맛을 다셨다. "사고 쳤거든. 뭐 사고야 늘상 치는거지만. 그게 이번엔 좀 심해서." 우영원이 툭하면 폭행사고를 일으키는것은 이미 알고있다. 빈번한 일이고 소문도 익히 들어왔고 몸소 경험도 해봤고 그럴것같은 분위기를 팍팍 풍기니 별로 놀랄일도 아니지만 보통 부모는 제자식을 감싸고 도는데 이 우영원의 아부지라는 분은 그렇지 않으신가보다. 자식이 잘못을 좀 했다고 죽일만큼 팬다니. "니네 매니져는?" "지금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니면서 뒷수습중이지" 왜 혼자 여기까지 겨왔는지. 왜 홍부장이 여기로 보냈는지 대강 짐작했다. 이제 확실히 무슨 사고를 쳤는지만 알아내면 될것 같다. 그나저나 이 야구빠따로 여차하면 때리면 된다이거지? 제놈이 쥐어준거니 뭐라고 그러진 않겠지. "야, 너 ... 너무 하는거 아니야?" 아침 8시에 이집 앞에 도착한 우영원은 방으로 들어오자 마자 침대로 슬금슬금 기여 가더니 잠을 자기 시작했다. 오전 11시쯤 나는 '이제 학교갈 때가 되었다' 싶어서 아침을 먹을 요량으로 이것저것을 뒤지다 컵라면을 먹기로 낙찰을 봤다. 일단, 고픈 내 배부터 채우고 나서 학교갈 채비를 마치고 문을 나서기 직전 우영원을 흔들어 깨웠다. "뭐가?" "나 지금 장거리 비행하고 왔는데 아침에 컵라면 먹으라고?" 그럼 뭘 먹어야 되는데? 나는 코웃음을 치며 여지껏 부려왔던 개폼을 몽땅 내버리고 저자세로 나오는 우영원을 째려봤다. 컵라면과 나무젓가락이 한세트로 이루어진 아침식사 메뉴가 뭐가 어때서? 나를 보며 그건 좀 심하다라고 말을 하는 우영원은 아직 잠이 덜깬 상태에 목이 잔뜩 잠겨있기까지 했다. "먹기싫음 니네 아부지한테 가" 이말은 예상했던것 보다 훨씬 효과 만점이었다. 서서히 잠이 깨면서 본정신으로 돌아와 나름대로 카리스마를 뿌리려고 하던 우영원이 니네 아부지한테 가버리라는 말에 순식간에 깨갱깽- 옆집의 힘없는 강생이처럼 기가 죽어버린다. 음, 약점 잡았다. "집 잘봐라" 찍소리 하지 않고 컵라면을 받아드는 우영원을 향해 당부의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나쁜것 같지 않다. [Drrrrrrrrrrrrrr- Drrrrrrrrrrrrr-] 요즘 세상에 휴대폰에 컬러링 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홍부장님 밖에 없을거다. 이 밋밋한 신호음이라니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다. 지리하게 울린 신호음 끝에 경직된 목소리지만 조금 긴장감이 도는 홍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 네, 홍주원입니다. "주원이형 저 남지웅인데요" 처음엔 서로 존대를 했었지만 계약을 하고 나서 말을 트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은 친해지고 있는 중이라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나는 홍부장에게 일단은 존대를 하고 있다. - 아, 지웅이? "예" - 너한테 우영원 새끼 갔어? 새끼. 한국 부동의 스트라이커에게 새끼라. 어지간히도 큰 사고를 친모양이다. 그 새끼 지금 저희집에 있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으나 아직 친해지는 중이라 이미지 관리를 위해 단어를 조금 골라봤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네, 지금 집에 있어요" - 여기가 너무 바빠서 전화하는걸 잊었어. 미안. 놀랐지? "아뇨, 괜찮아요" 괜찮기는 개뿔이 아침 댓바람 부터 괴물이 나타나서 놀란 주제에. 스스로를 비웃듯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까 확실히 우영원은 홍부장이 보내서 온거구나. 하긴 지가 무슨수로 내집을 찾겠어.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뭔가 자신이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자식이 내집을 왜 찾는다고 생각할까? 봄이라 그런가 몸이 허해서 그런가 정신이 없나보다. - 지웅아, 다른사람은 다 괜찮은데 영원이네 아버지 한테만큼은 그녀석 넘겨주면 안돼 인신매매단에는 넘겨버려도 되는 겁니까? 도대체 그 우영원네 아부지가 얼마나 괄괄하길래 이렇게 사람들이 다 설설 기는걸까. "네" - 그럼, 당분간 그 녀석 좀 잘 부탁해 그말을 끝으로 전화는 뚝 끊겼고, 우영원의 확실한 약점을 (바로 우영원네 아부지다, 아부지!) 잡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철컥] 열쇠를 철문에 밀어넣고 문을 열었다. 문고리를 비틀며 문을 잡아 당기자 안에서 뭔가 [통통통] 썰리고 있는 소리가 났다. 주로, 비빔밥을 해먹거나 안되면 컵라면에 의지해서 사는 나로써는 도마와 칼이 만나는 [통통통] 소리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사람이 온줄도 모르고 열심히 칼을 잡고 도마 앞에서 용쓰고 있는 우영원의 뒷모습을 보고 '큭큭큭' 소리가 절로 목구멍 밖으로 튀어 나왔으나, 좀더 가까이가서 우영원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바로 인상을 써버렸다. 질펀하게 늘어놓은 수십가지의 야채들과 전혀 썰어놓은것 같지 않은 통에 담긴 자르다만, 좀더 험하게 말해서 난도질을 당한 과거에 야채였던것 처럼 보이는 정체 불명의 것들에 경악했다. "야" "우왁" 허리를 [쿡-] 찌르며 부르자 칼을 들고 있던 우영원이 어지간히도 집중을 했었는지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 본다. 찬물 맞고도 인상만 그렸던 놈 치고는 오늘 상당히 망가지는것 같다. 아침에 빌빌거리던것도 그렇고. 하지만 카리스마란 어디 도망가지 않는 법이라고, 식칼을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딱 살인범 같은 그 분위기는 죽지 않은것 같다. "그 칼은 좀 내리는게 어때?" 여차하면 사람 찌르겠다...? 녀석의 손에 꽉 쥐어진 칼에 턱짓을 하며 말을 하자 자신이 칼을 쥐고 있었던 줄도 몰랐던지 우영원은 잠시 말을 못알아 듣다가 주위를 조금 둘러보고 나서야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도마에 올렸다. 난장판이 된 싱크대를 보고 내 인상이 험해지자 우영원은 허벅지를 '벅벅' 긁으며 나에게 나름대로 설명을 한다. "볶음밥 해먹으려고 ... 냉장고에 뒤져보니까 이것저것 있길래 ... 여긴 나중에 내가 치울게" "볶음밥?" 하! 너 지금 볶음밥이라고 했냐? 내가 대놓고 비웃자 우영원은 상당히 저자세이던 모션을 슬쩍 고쳐서 본래의 우영원으로 돌아오더니 담담히 대답을 한다. "어" "너 이게 지금 볶음밥에 들어갈 야채라고 말하려는건 아니겠지? 이게 무슨 볶음밥 속이란 말야? 이거 누가 난도질 해놓은거 아니야? 넣어도 짜장 속에 들어가면 모를까 이걸로 볶음밥을 해먹는다고? 이 크기가 볶아지긴 볶아지는거야? 네가 소새끼냐, 돼지새끼냐 도대체 이런 어른 엄지 손가락 마디만한걸 어떻게 볶아서 먹느냐고!! 니 위는 철갑 둘렀냐? 또, 백번 양보해서 먹는다손 치더라도 네가 무슨 거인이야? 볶음밥 해먹는데 뭘 이렇게 많이 썰어! 네가 돼지야, 소야!" 어질럽혀진 씽크대를 '탕탕' 쳐대며 내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자 우영원은 한마디 들을때 마다 움찔움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인상을 찌푸리더니 끝내 삐진듯 시무룩하게 변해버렸다. 진짜 인신매매단 한테 팔아버렸으면 속이 다 시원하겠다. "그냥, 나는-" "시끄러, 들어가" 뭔가 변명을 더 늘어놓으려는 우영원의 말허리를 뚝 자르며 들어가라고 하자 아직도 할말이 남은듯 우영원은 나를 내려다 보며 입맛을 다신다. "저기, 밴드 없어?" "밴드는 왜" 도마 위를 뒹굴고 있는 난도질 당한 야채를 정리하고 있는데 그앞으로 불쑥 우영원이 왼손이 쳐들어왔다. 울긋 불긋 여기저기 칼에 찔린 자국이 처참하다. 쓱 고개를 들어 우영원을 노려보자 이번엔 허벅지가 아닌 허리를 '벅벅' 긁으며 말을 잇는다. "별로 아프진 않는데 그래도 모르니까 혹시 있나해서" "티비 옆에 보면 있어" 아침에 컵라면을 먹인게 화근일까, 아니면 밥을 안해주고 내가 굶겨 죽일꺼라고 생각한걸까, 그것도 아니면 익지 않을 생야채라도 먹고 살고자하는 의지가 강한걸까, 칼질에 저렇게 재주가 없는데 볶음밥을 먹고자 이런짓을 벌리다니 혹시 볶음밥 매니아인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기억해 내려고해도 우영원이 훈련때 식당에서 먹는것에 집착하는 성격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내집이라고 너무 기살아서 막 화낸건가. 설마 밤에 갑자기 야수로 변해버리거나 괴물로 둔갑해버리는건 아니겠지. 너무 성질부렸나. [우그작 우그작] 난 우영원이 난도질을 해서 도저히 감당 할수 없는 모양새가 된 당근을 씹어먹으며 식탁 위에 놓인 야구 방망이를 심각하게 노려봤다. 야구 방맹이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드르-륵] 방과 부엌 사이를 막고 있는것은 유리가 달린 미닫이 문이라 열리고 닫힐때 소리가 특히 심하다. 그런데 그 소리의 여파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내 눈은 둥그렇게 떠졌다. 거짓말 안 보태고 [번쩍번쩍] 방안이 반들반들하게 닦여진 모습에 그자리에 우뚝 멈춰설수 밖에 없었다. 그 반딱이는 방 한쪽구석에 놓인 침대에 기댄체로 티비 채널을 이리저리 바꾸고 있는 우영원을 보며 나는 심하게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거 니가 청소한거야?" 아니라고 대답해줘. 파리가 낙상할것 같은 반질반질한 바닥을 보며, 관심도 없던 창틀에 뽀얗게 쌓였던 먼지가 말끔히 사라진걸 보며, 문틀 사이에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던 정체불명의 찌꺼기들이 깨끗하게 치워진 방안을 둘러보며 놀라고, 또 놀랐다. 우영원이 청소라니 이건 대략 거짓말이 아닌가. "그냥 할일도 없고해서" ".... 밥 먹어" "어" 단지 할일이 없어서 황송할 정도로 윤이 나게 닦았다는 우영원에게 저녁이라고 볶음밥을 내놓았다. 반으로 딱 공정히 나뉘어놓은 볶음밥을 본 녀석은 뚱한 얼굴로 제밥을 한번 노려보고, 후엔 내밥을 한번 노려보더니 더욱 인상이 생뚱맞아져버리더니 잠시 내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이건 불공평하다고 봐" "뭐가?" 식탁 앞에 앉으며 볶음밥 위에 얹어 둔 노른자를 덜익힌 계란 후라이를 슥슥 뭉개며 '이번엔 또 뭐가 문제야?' 라는 내 물음에 우영원도 밥을 슥슥 비비며 여전히 뚱한 얼굴로 내게 불만을 표했다. "나랑 너랑 덩치가 다른데 어떻게 같은 양을 먹고 살수 있어" 밥을 비비던 숟가락을 그릇에 '챙챙' 부딪히며 우영원은 '이건 부당해!' 라고 말했다. 허참, 얻어먹는 주제에 진짜 뻔뻔한 놈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피식 마른 웃음을 지어보였다. "같은 인간이니까 같은 양을 먹는거지" [오물오물] 따뜻한 볶음밥을 한입 입에 가득 넣고 우물거리며 대답하자 우영원은 아직도 뭔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듯 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같은 인간이 아니니까 다른 양을 먹어야지. 너랑 나랑 나가는 근수부터 다른데" 투덜투덜 투덜이처럼 잘도 투덜거리면서 곧 죽어도 제앞에 놓인 밥그릇은 아쉬운지 [우물우물] 밥을 먹는 우영원을 보며 나는 버럭 화를 내버렸다. 일단, 여기는 내집이고, 저녀석은 예기치 못한 식객이고, 놈의 사정을 조금 알긴 하지만 난 저놈이 결코 이쁘지 않기에 주인장 행세를 단단히 하려고 마음을 먹어 버렸다. "어쩌라고!" "어쩌라는건 아니야" 원래 능청스러운 녀석이었다면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생긋 입꼬리 살짝 말아올리는 그 모습이 익숙할 터였지만 능청 보다는 뻔뻔에 가까운 우영원이 그냥, 밥 먹어야지 라고 꼬리 쏙 내리고 웃음을 지어 보이고 밥을 먹어대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열이 확 올랐다. "너 .... 무슨 .. 사고쳤어?" "어?" 우영원이 이곳에 오게된 이유는 사고를 쳤기 때문이다. 밥을 다먹어 갈 즈음 내가 녀석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자 녀석은 그릇을 계수대 안에다 밀어 넣고는 "몰라 돼" 라며 방안으로 쏙 도망을 해버렸다. 혹시 사람 죽인거 아냐? 하는 생각에 난 부엌 불을 끄고 야구 방맹이를 손에 움켜쥐고 방으로 녀석을 쫓아 들어갔다. "휴대폰이네" 지금 휴대폰이 문제야? 우영원은 방 한쪽에 내팽겨 놓은 내 휴대폰을 커다란 손으로 냉큼 잡아 채더니 이것저것 열어보며 어린애 처럼 재밌어 하고 있었다. 문명의 이기이자 문명의 개목걸이라고 생각되는 휴대폰에 대해 그다지 관대한 생각을 갖고 있지 못한 나로써는 우영원의 그 행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무슨 사고를 쳤냐는 질문에 녀석이 대답하지 않은것이 불만이지, 휴대폰 따위는 관심도 없다. "휴대폰 처음 봐? 왜 헤실거려" "귀엽잖아. 정말 작아졌네" 휴대폰을 한참 조물딱 거리던 우영원은 손을 들어 휴대폰을 머리 위 사선방향으로 치켜 들더니 진지한 얼굴로 '이게 얼짱 각도로군' 이라는 발언을 하며 너무나도 엽기 발랄한 행동을 해보였다. 인간이 엽기인건 알았지만 우영원을 훌륭한 축구 선수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모습이 전해지면 얼마나 충격일지 알고나 있는지 궁금하다. "휴대폰 없어?" "사고 친다고 안사줘" "사고?" 인생 자체가 사고에서 또 다른 사고로 이어지는 사고뭉치 인생이라지만 휴대폰으로도 사고를 쳤단 말이야? 휴대폰을 사람 머리에 맞춰서 박살이라도 낸건가. "별거아냐" 댁의 그 별거 아닌거에 당하는 사람은 죽지 아마. 흥- 별거아닌거 좋아하시네. "별거 아닌거 뭐?" "그, [뜨거운 만남을 가져보세요] 뭐 그런 문자 오잖아" "그게 왜?" 하루에 가끔은 열개도 오는 내 휴대폰을 우영원과 같이 들여다 보며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그게 왜? 그런데 아까 얼짱 각도가 어쩌고 하던 우영원이 내가 머리를 드밀고 휴대폰을 보자 예고도 없이 [찰칵] 사진을 찍었다. 이 인간이 ... 바드득. 이를 갈며 슬쩍 야리자 생글생글 웃기만 한다. "내가 [지랄, 난 차가운 만남을 가질거야] 라고 답문을 보냈거든" 찍은 사진을 뿌듯하게 보며 생긋 웃어보인 우영원이 그 웃음 만연한 얼굴을 배반하는 상당히 거친 자신의 과거를 술술 털어놓는것이 무척 호러였다. 그냥 날아오는 문자하나에 그렇게 과민반응하고 그런데. "그랬더니 그 인간이 다시 문자를 보내는거야. [차가운 만남도 있습니다]" "비즈니스 정신이 뛰어나네" 휴대폰을 여전히 만지작 거리는 우영원은 별거아냐라고 했던 자신의 말처럼 진짜 별거아니라는듯 평온한 얼굴로 말해선 안될 제 과거를 까발리고 있었다. "그래서 전화해서 한 삼십분 지랄마라고 싸웠어.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냐고" "뭐?" 이런 황당한 인간을 봤나. 빙긋빙긋 웃고 있는 우영원은 얼굴만은 정말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것 같았지만 저 희안한 사고 방식이라니. 우영원이 보통의 인격과는 다소 다른 무언가를 가졌다고 생각은 했지만 저건 엽기와 호러의 절정을 모아모아 엑기스만 추출해 놓은 사고뭉치잖아? 내가 딱히 뭐라 말도 못하고 어이가 없어서 금붕어 마냥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만 반복했더니 우영원은 뭐가 즐거운지 기다란 몸을 방바닥에 누이더니 주절주절 잘도 떠든다. "그일 있고나서 우리 매니져가 속 시끄럽다고 나보곤 휴대폰 가질 생각 갖지 말라고 그러던데" 충실히 답문을 꼬박꼬박 보내줬더니 어디서 말대꾸냐고하는 저런 놈이나 그런 놈 전화받고 삼십분이나 지랄한다고 같이 싸워준 놈이나 둘다 참 징한 놈이다.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며 우영원이 무슨 말도 안되는 사고를 쳤는지에 대해서 듣는것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너 바닥에서 자"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이불을 꺼내며 난 그렇게 말했다. 주인 된 입장에서 손님을 바닥에서 재우는것은 좀 너무하는 처사가 아닌가 싶지만 음란문자 들어오는거 하나에도 꼬박꼬박 딴지거는 저런 엽기 발랄한 놈에게 침대를 내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에너지가 남아도는 녀석 아닌가. "그래" 너무 순순히 그러마 하는 녀석에게 순간 미안해 지려는데 고개를 돌려 돌아보고는 그 마음이 싹 사라졌다. 한시도 가만히 안있고 이것 뒤적, 저것 뒤적, 요기 뒤적, 저기 뒤적이는 우영원의 그 끝없는 체력에 '아아아아아------ㄱ!' 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지경이다. "뭐해?" "이거 너야?" 경기 녹화 테잎을 꽂아두는 곳에 함께 두었던 앨범을 펼친 우영원은 나를 꼭 집어 가르키며 이게 너냐고 묻는다. 이건 또 언제 꺼낸거야. 끝없이 여기저기 쫄랑 거리고 다니는 나보다 30센티 가까이 큰 우영원의 [저지리 행각]에 질려버린 나는 '휙' 앨범을 빼앗아 제자리에 다시 넣어버렸다. "쓸데 없는짓 하지말고 잠이나 자" "사람이 묻는데 대답을 안하냐" 우영원은 내말을 싹뚝 잘라먹듯 무시하며 제할말만 주절이더니 내가 빼앗아 넣어 버린 앨범을 다시 '슥슥슥' 넘겨보며 나의 신경을 절대적으로 거스르고 있었다. 이런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 신경 말려죽이는 녀석과 늘 붙어 있어야했던 녀석의 매니져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픈 심정이 들었다. 방안은 깜깜하고 들리는건 우영원의 고른 숨소리 뿐이다. 눈은 똘망똘망하고 정신은 지나치게 말짱하다. 내옆엔 야구 방망이가 나란히 누워있고 주위는 모두 잠이 들어있다. 나혼자만 멀뚱멀뚱 이다.. [스윽]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야기하고 마주보고 밥도 먹을수 있음에도 밤이 되니 그때일이 생각나면서 손끝이 달달 떨린다. 무슨 수전증 환자같다. "안자?" [휴우우우우우우-] 하고 한숨을 내뱉고 있는데 갑작스레 우영원이 말을한다. 깜짝 놀라 내가 푸드득 헛날개짓을 하는 새마냥 화들짝 몸을 움츠리자 자는줄로만 알았던 우영원이 몸을 쓰윽 일으키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이불을 가슴으로 모아 끌어안더니 마치 나와 오래된 친구마냥 마주보며 두서없이 제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나 옛날부터 엄청 맞고 컸어. 제일 많이 맞은건 초등학생때야. 초등학생때 나 축구선수 할거라고 했을때 우리 아부지 아동학대죄로 잡혀 갈 만큼 나 곤죽 되도록 팼었어. 자식새끼 공부하라고 뼈 빠지게 고생하는데 운동선수나 하려고 하는거냐고. 우리 아부지가 제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인종은 법조인이야. 백인도 아니고, 황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니고, 대한민국인도 아니고 법조인을 가장 훌륭한 인종으로 치시지. 난 있잖아 그래서 변호사나 법조인이 너무 싫어. 우리형은 우리 아부지가 그렇게 좋아하는 검사거든. 당연히 아부지한테 한대도 안 맞고 컸어. 난 나하고 싶은거 하고 살려고 아부지 화풀이 용으로 좀 맞아주고 축구선수하기로 했어. 공부한다고 이 머리에 뭐 들어갈것 같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생각도 없고, 할 능력도 없고. 우리집에 난 그냥 없는 자식이야. 운동선수 끽해봐야 서른살까진데, 그 시절 지나면 뭐 처먹고 살거냐고 참 무지하게 맞았어. 근데 이유없이 팬건 내가 축구선수 하겠다고 했을때 뿐이고 다른때는 다 이유가 있었어. 유치원 다닐 때였어. 엄마가 물을 팔팔 끓여놨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게 신기해서 그앞에 쭈구리고 앉아 있었는데, 엄마가 나보고 그랬어 '영원아, 그건 뜨거우니까 거기다 손 넣으면 안돼' 나 그말 듣자 마자 손 퐁당 물에다 담궈서 화상으로 병원에 실려갔어.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별로 변한게 없어. 고양이가 담벼락에서 뛰어내리고도 멀쩡한게 신기해서 잡아다가 나무 위에서 던져보고, 2층 베란다에서 던져보고, 학교 옥상에서 던져보고, 투포환 던지듯이 힘껏쥐고 매치기도 해봤지. 당연히 우리 아부지한테 그짓하다가 걸려서 끌려가서 맞았지. 근데 그렇게 신나게 맞고도 별로 정신 못차렸어. 학교에서 누가 시비걸면 바로 튀어가서 패주고, 신경 약간만 거슬러도 주먹질하고 그때마다 우리 아부지가 나 잡아다가 북어국에 들어갈 북어처럼 진짜 왕창 패줬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듣고나서 반성도 많이 했었어. 이런짓 하다가 아부지한테 걸리면 맞아 죽을지도 몰라라고 생각도 많이 했었지만 나 청개구리관가봐. 크면 좀 나아지려나 했는데 사람들이랑 부딪히는 일이 잦아질수록 더 청개구리가 되고, 더 난폭해졌어. 나 드리블 못한다고 죽고 싶냐고 이제 좀 크니까 뵈는게 없냐고 하는 고등학교때 감독, 내 머리 후들겨 팼을때 나 죄책감 없이 그 인간 정강이 걷어차서 부러뜨렸어. 연습하고 있을때 구경 온 사람이 축구선수 밥먹고 공만 차면서 골도 못 넣느냐고 빈정거리길래 있는 힘껏 걷어차서 장파열 시킨적도 있어. 영국에서 걸어가고 있는데 난대없이 나타나 당연하다는듯이 내 앞에 달려와서 사진찍는 파파라치 신경 거슬려서 그대로 머리 걷어찬적도 있어. 심판이 편파 판정하면 있는대로 소리지르고 그걸로 성에 안차면 그라운드에 드러눕기도해. 잘나가는 정신과 상담의가 은근히 내 상태가 비정상이라고 비꼬는거 보고 책상 밀어서 벽과 책상 사이에 찡겨버리게 한적도 있어. 나 말야 지금 집에 가면 우리 아부지한테 맞아 죽을거야. 이번에 집에 몰래 들어와서 사진찍는 파파라치 잡아서 중경상 입히는 바람에 소송들어오는거 막아줄 변호인이 말좀 비꼰다고 아부지가 그토록 대단하게 여기는 법조인의 하나인 변호사를 복날에 개패듯이 팼으니 아마 죽을만큼 맞을꺼야. 내 변호인인데 말끝마다 나를 정신병 환자 취급을 하는거, 그래서 화난것 따위 우리 아부지는 안봐줄거야. 대단한 변호사 신나게 패놨으니, 더군다나 폭행 때문에 소송들어와서 그거 변호해줄 변호사를 패놨으니 날 죽일지도 몰라.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넌 나한테 잘못한게 없더라. 걔들은 하지 말라는 짓 독으로 했지, 하다못해 내 신경이라도 거슬렸는데 넌 그냥 길 걸어간 죄 밖에 없더라. 네 뒷모습이 나긋나긋 사람 홀리게 생겨서 그랬다라고 생각한적도 있었어. 그렇게라도 나 스스로를 정당화 시키고 싶었나봐. 그런데 만약 그런 이유라면 야한옷 입고 걸어가는 사람 만나면 다 끌고가서 강간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네가 너무 약하고 힘 없어서 나한테 그래서 당한거지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하지만 그것도 곧 유치원생들 힘없고 약하니까 끌고가서 마음껏 윤간해도 되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어떤 이유도 없어. 단지 내가 짐승이고, 내가 나쁜놈이라서 그런거라는거 이젠 알아. 니가 나 신경 쓰여서 잠 못잘때 예전에 짜증났던적도 있었어. 근데 지금은 미안해. 네가 마음 아프지 말고, 네가 신경과민으로 뒤척이지말고 마음편히 자 줬으면 좋겠어. 미안해. 미안하다. 말이면 단가 싶기도 하지만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질리지도 않는지 '미안하다' 라고 되내이고 또 되내이는 우영원을 보며 내 눈에 눈물이 고인것 같기도 하다. 녀석의 말대로 말이면 다냐고 소리라도 쳐줘야 할텐데 배에 힘이 모두 빠져 나가서, 난 풀썩 이부자리 위로 널부러지며 생뚱맞게 한소리 해버리고 그만 잠자기에 몰입하기로 했다. "잠이나 자" 눈을 떴을때 이 모든일이 거짓말 이었으면 좋겠다. 우영원이 나에게 사과를 한것도, 우영원과 한집에서 마주보며 떠들며 이야기 한것도, 우영원이 그날 밤 나를 끌고 가던것도, 모두 다 가짜 였으면 좋겠다. 왜 내마음엔 아직도 자잘한 앙금이 둥둥 떠다닐까. 어떤사람은 그렇게 말을 하기도 했다. 내게 시련을 준자에게 난 용서함으로써 더 큰 행복을 얻었다고, 내게 담금질 할 기회를 주었으니 오히려 고맙게 여기기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 난 우영원의 저 구구절절한 사과말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밉다. 그딴 담금질 같은거 나한텐 필요 없었다고 소리치고 싶다. 녀석이 사과를 해서 더 밉다. 어쩐지 내일은 지루한 하루가 될것 같다. [쏴-] 어젯 저녁 물에 담궈두었던 설거지들을 헤치우기 위해 물을 틀었다. 그런데 [벌컥] 냉장고를 마주보고 있는 욕실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누군가 나를 신경질적으로 부른다. "야, 남지웅! 어이!" "왜" 북적북적 수세미에 거품을 내며 뒤돌아보자 완전 나체인 우영원이 상반신을 문밖으로 비죽이 내민체로 머리카락 끝에는 물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물 떨어지잖아 십새야, 들어가서 씻어. "너 나 익혀 죽이려고 작정했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쏴] 소리를 내며 수도 꼭지에서 뿜어져 나오던 물을 뚝 멈추고 상당히 기분 나쁜 표정으로 우영원을 바라보자 녀석은 '이건 날 익혀 죽이기 위한 너의 계략이야-!' 라는 표정으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내가 널 익혀 죽여? 어제 미안하다고 하던거 순 거짓부렁이지? 잠시나마 널 조금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던걸 후회한다. 우영원. "네가 밖에서 찬물을 트니까 욕실 샤워기에서 미지근한 물 틀었는데, 엄청 뜨거운 물이 나왔단 말야-!!! 대가리 익을뻔 했다고-!!!! 이거봐! 피부 벌겋게 익었잖아!" ".........." 탄력 넘치는 입체적인 근육을 가진 미끈한 다리를 쑥- 문 밖으로 내밀며 '찰싹' 한대 후려치며 열렬히 설명을 하는 우영원을 보자니 딱 한가지 생각만이 떠오른다. 안 어울려. 안 어울려. 안 어울려. 안 어울려. 안 어울려. 안 어울려. 안 어울려. 안 어울려. 안 어울려. 안 어울려. 안 어울려. 진짜 끝내주게 안 어울려. 어떻게 저 얼굴로 저 몸매로 저 목소리로 저 차림으로 부당하다고 호소를 할수가 있는건지. 정말 처참하게 안 어울려. "물 안 틀테니까 들어가서 씻어" "진짜?" "어, 안틀게" "절대 틀면 안돼. 틀면 너 가만안둬. 진짜 피부 익을뻔 했다니까" 투덜투덜, 투정 부리는 모습이라니. 멀쩡한 얼굴이 아깝다. "뭐해?" 우영원이 한차례 뜨거운 물에 익혀 죽이려는거냐는 억울함을 호소를 해 할일도 없고해서 식탁에 팔을 고은체 앞으로 엎드려 있었다. 아까 전까지는 아주 억울해 뒈질것 같은 표정이더니 지금은 아주 말짱하니 늘씬한 근육이 붙은 몸 위에 얇고 가벼운 옷을 입은체 아무일도 없었던냥 구는걸 보니 참 이랬다 저랬다 감정표현이 확실한 놈이구나 싶다. "누가 익혀 죽이려는거냐고 뭐라 그래서 엎드린체로 대기중이야" 식탁에 납닥하게 엎드린체로 말을 했더니 입김이 식탁 유리에 서리로 변했다가 사라졌다가 한다. 개구락지 처럼 철푸덕 식탁에 딱달라 붙어 있는 내모양새가 웃긴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는 우영원의 표정이 무척 밝다. "키크는 운동이라도 좀 하지, 놀지말고" 쪼르륵 하얀 우유를 투명한 잔에 한잔 가득 부으며 내게 내민다. 누가 놀았다는거야. 지를 위해서 동작 그만인체로 기껏 대기해줬더니 놀았다고 폄하할건 뭐냐고. 놀았다는 말 한마디에 잔뜩 얼굴이 뚱하게 부어오른 나를 보며 우영원은 큭큭 하고 신나게 웃었다. 웃지마. 난 니가 웃는게 뒈지게 싫어. "이 나이에 클게 어딨어" 벌써 스물둘이다. 예전에 다 컸지. 또 특별히 키크는 운동을 할거나 있나? 직업이 운동선순데. "넌 아직 뼈가 연해서 운동하면 조금은 클거야" "네가 내뼈가 연한지 용가리 통뼌지 어떻게 알아" 내쪽으로 내밀어진 우유를 스윽- 우영원쪽으로 밀며 따지듯 툴툴 거리자 우영원은 제앞으로 내밀어진 우유를 벌컥벌컥 한번에 들이키곤 다시 한번 컵에다 우유를 그득히 따루더니 내앞에다 드리민다. 징한놈. "이게 스물둘 먹은 남자뼈냐? 열둘 먹은 애들뼈지" 손가락 마디마디를 둥글게둥글게 돌려 만지며 내게 딱 부러지게 말한 우영원은 유리컵을 톡톡 치며 어서 마셔라고 강권했다. 안 마시면 한대치겠다-?! 할수 없이 우유잔을 받아들고 꿀꺽꿀꺽 먹긴 먹지만 먹으면서도 걱정이다. 생우유를 먹으면 꼭 탈진하는데 그래서 먹기 싫어 하는데, 먹으라고 주는데 '약하니, 작니, 애들뼈니' 하는 놈에게 '탈진하니까 안돼' 라고 말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씨불 오늘 연습하다 쓰러지면 네가 책임져, 새꺄! 나 쓰러지면 너 오늘 저녁 없어, 임마. "털손떼, 엇다가 손을 대는거야" 쓱 손을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컵을 치우는데 우영원이 들릴듯 말듯 중얼거리며 투덜거린다. "되게 비싸게구네. 별로 이쁘지도 않으면서. 지가 무슨 공주냐, 그리고 내손이 어디가 털손이야" 그후로도 꽁알꽁알 얼마나 말이 많은지 잘생긴 뒷통수를 한대 후려패줬으면 속이 시원할것 같았다. "전 그만 가볼래요" 우영원이 내집에 머문지 근 일주일 가량이 되어 간다. 아침과 점심 사이에 일어나 대충 밥을 먹고나와 잠시 몸을 풀고 공을 두어번 주고 받으면 난 다시 밥을 먹는다. 우영원은 그사이 집에서 어울리지 않는 청소란 녀석을 하고 그보다 좀더 어울리지 않는 영양식을 만들어 혼자서 먹는다. 처음엔 우영원이 먹는 그 영양식이란 녀석을 보고 누가 토해놓은건줄 알았다. 갖가지 야채와 비타민과 영양제가 두루 짬뽕이 된 그 걸죽한것을 나에게 먹이려고 하는 놈을 뿌리치기 위해 무던히도 야구 방맹이를 휘둘러야 했다. "안돼, 이거 넣기 전에는 못가. 다같이 하기로 했는데 너 혼자 가면 어쩌냐" 말로 표현할수 없는 그 걸죽하고 질척한 영양식을 틈이 보이면 나에게 들이미는 우영원을 오늘은 또 어찌 처리해야할지 벌써 부터 고민이지만 그보다 저녁하러 늦게 가면 늦게 갈수록 그 꽁알꽁알 말많은 녀석의 잔소리를 듣는게 더 끔찍하다. 일찍들어 가도 수다쟁이가 말을 줄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일찍 들어가는게 낫다. 어제부터 끈질기게 '고기 좀 먹자' 라고 하는 녀석이니 오늘도 그 레퍼토리일것은 뻔하다. 하지만 늦게 들어가면 '고기 먹자' 와 '나 굶겨 죽이려는게 네 목적이지' 란 억측을 듣게 될터이니 이왕이면 일찍 들어가고픈게 나의 심정이다. "50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공이 들어갈거 같아요?" 연습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수민이 형이 프리킥 내기를 하자고 모두에게 제의를 했다. 난 올해 대학4년생이고 이제는 선배란 존재가 없어야 정상이지만 수민이 형은 나보다 두살이나 많다. 그러나 학번은 나와같고, 호적상으로도 나와 동갑이다. 수민이 형을 처음 만났을때 모두들 호적상으로나 학번상으로나 같아서 동갑이려니 했으나 형이 좀더 좋은대학에 들어오기 위해 고등학교 생활을 연장하기 위해 전학을 가면서 자신의 동생과 호적을 바꿨다고 이야기를해서 우리들은 수민아 에서 수민이형으로 호칭을 바꿔야 했다. "넣으면 들어가지 못 넣을건 또 뭐야? 형님 말씀에 네가 지금 반항하겠다는거야?" 인상을 찡그리고 선 나에게 수민이 형은 잔뜩 고압적인 목소리로 으르렁 거리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다. 우리집에 형보다 무려 십센티나 큰 녀석이 징징거리고 있다구요. 덩치 큰건 별게 아니란걸 난 알아요. 있으라고 으름장을 놓는데 가는것도 무리다 싶어서 내가 짤랑짤랑 고개를 흔들며 '그냥 있습죠' 라고 하자 형은 내기꾼들에게서 한장씩 걷어 모은 만원짜리 뭉치를 흔들며 나에게도 한번 해보란다. 만원 걸고 저 많은걸 성공만 하면 다 가질수 있으니 상당히 매력적일 수도 있지만 내 눈에는 길바닥에 만원 버리는것 처럼 보이는건 왜인지 모르겠다. "싫어요" 난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스탠드에 앉을 요량으로 운동장 바깥으로 걸어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내 눈앞에 가벼운 캐주얼 차림에 선글라스를 쓴 우영원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우영원은 나를 보며 웃는건지 아니면 자신이 우영원인지 알아보지 못한 학생들이 저를 그저 잘난 놈으로 아는게 기뻐선지 입꼬리 끝에 조그만 호를 그리며 웃어 보인다. "언제끝나?" "지금, 근데 못가" "왜?" 편안한 차림새지만 운동복 차림이 아니라선지 주위의 사람들은 우영원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이 화려한 외모를 보고 누가 자신들과 같은 축구선수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마도 이 녀석은 평소에 이런식으로 차려입고 거리를 활보하나보다. 그나저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튀게 생겼는데 학교를 횡단해서 왔을게 뻔하건만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니 좀 심하다. "만원씩 걸고 50미터 전방에서 프리킥 넣는 사람한테 돈다 몰아서 주는 내기를 하는데 그거 성공하는 사람 나오기 전까지는 못가" "그럼 넣고와" 이게 지금 무슨 장난하나? 50미터 전방에서 골 넣는게 뉘집 개이름이야? 넣고 오라고? 내가 못볼것 봤다는듯 인상을 팍 찡그리자 우영원은 안경을 슬쩍 내리며 눈을 맞춘다. "뭐해 가서 넣고 와, 나 배고파 죽겠어" 아, 내 자존심. 자존심. 자존심.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다고 치더라도 너무 짜증난다. 난 이를 으득 갈며 우영원을 찐하게 노려봐 줬다. 그리곤 마음 단단히 먹고 투덜거리듯 말했다. "50미터 전방에서 프리킥 넣는게 뭐 쉬운일인줄 알아? 난 못해" "지웅아, 누구야?" 우영원과 마주보고 서서 토닥거리고 있는데 수민이 형이 어느사이 온건지 옆에 서서 누구냐고 물어본다. 그런데 우영원은 자신이 우영원인걸 내비칠 뜻이 없는지 안경을 쓴체로 모른척 딴곳을 보고있다. "친구에요" "그래? 음, 그나저나 너도 한번 해보라니까" 수민이 형도 우영원의 장대같은 기럭지에 눌린건지 녀석에 대해 별다른 말 없이 내게 프리킥 내기에 가담하라는 말만 한다. 한번만 말한걸로 부족한건지 수민이 형은 싫다는 내게 자꾸만 자꾸만 권유를 했다. 사실 권유라기 보다는 이건 압박이다. "야, 남지웅. 남자가 이러면 쓰냐? 해보라니깐!" "아, 싫어요" "형님 말씀하시는데 너 아까부터 엄청 반항적이다" "싫은건 싫은거에요" "하라니깐" "싫다니깐요" 실갱이가 계속 되면서 내얼굴은 점점 찡그려졌다. 그러나 이쪽엔 관심도 없다는듯 우영원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체 학교 운동장만 둘래둘래 둘러보고 있다. 내가 녀석의 눈치를 살피지만 형은 더욱더 내게 내기에 동참할것을 종용했고 나는 참는데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형이래도 그렇지 내기 같은거 관심없는 사람도 있을수도 있건만 왜 꼭 다 시키려고 덤비는지 모르겠다. "싫어 하는데 거기까지만 하시죠"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안경알 때문에 우영원은 평소보다도 더 차가워 보였다. 싸늘한 냉기 섞인 말을 하며 똑바로 정면을 응시한 녀석의 모습은 조금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기세에 눌릴 수민이 형이 아니였다. 수민이 형은 좋은 대학에 오기 위해 무려 2년이나 아래인 동생과 호적을 바꿀정도로 막무가내인 인간이다. "너말야 지웅이랑 동갑이면 나보다 두살이나 어린데 그게 윗사람한테 말하는 버릇이야?" 그러나 우영원은 파파라치도, 의사도, 감독도, 심지어는 자신의 변호인도 두들겨 패는 탕아다. 형, 오늘 잘못 건드렸어요. 저자식은 지뢰라구요. 폭탄! 지한테 돌맹이 던지면 핵폭탄 갖다 뿌려버리는 놈이라구요. 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안돼' 라는 의사를 표시했지만 먹혀든것 같지 않았다. "윗사람? 나이 많으면 다 윗사람이야?" 반말 나왔다. 좀전까진 그래도 존대였는데. 끄응. 일났구만. 홍부장님 말씀에 의하면 우영원은 골방에 가둬놓고 끼대면 밥 넣어줘야 할 녀석이라고 한다. 안그러면 동네 사람들한테 잘못 찍혀서 이사 가야할지도 모른다고 주의를 주실 정도였다. 그래서 난 우영원이 집밖으로 나오지 않게 하기위해 별별 노력을 다해서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제 발로 걸어나오다니 폭탄이 길에 굴러다니는것과 다를바 없다. "그럼, 나이 많으면 윗사람이지. 아랫사람이냐?" "윗사람도 윗사람 나름이지. 너 사기호적으로 학교 들어온 놈이지?" 놈. 2살이나 많은 사람한테 놈. 하긴 나이 같은게 우영원에게 무슨 소용이겠어. 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다. 이럴줄 알았으면 그냥 가서 프리킥 내기에 동참이나 할것을. 그리고 사기호적이라니. 네놈은 워낙 능력이 특출나서 대학 좋은데 오는거 별로 필요 없었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한텐 무진장 중요한거라는걸 알아두길 바란다. 좋은 대학에 가야 좋은 성적을 내고 그래야 주위의 주목을 받는다. 그렇게 해야 프로에 데뷔할때 좋은 팀에 갈수도 있는거다. 그러나 좋은대학을 오려면 고등학교때 대회 입상 성적이 좋아야 하므로 부작용이 있으니 조금 막말로 수민이 형처럼 사기호적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보다 어린 동생이 있는 선수들이 예전에는 즐겨했던 방법으로 수민이 형처럼 동생과 호적을 바꿔서 사는 방법이 있다. 한두살 아래의 선수들과 뛰게되면 기량차이가 엄청나므로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이 높아진다. 나쁜짓이고 편법이지만 최후의 수단으로 간혹 선수들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요즘은 거의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매스컴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더욱 성행 했었다. 그래서 옛 축구스타 중에는 자신의 이름이 아닌 동생의 이름으로 알려진 이도 없지 않아 있을것으로 사료된다. 쉽게 예를 들자면 우리는 황선홍 선수로 알고 있지만 황선홍 선수는 이름이 황선홍이 아닐수가 있다. 홍명보 선수라고 알고 있지만 홍명보 선수는 홍명보가 아닐수도 있다. 뭐, 두분이야 워낙 어려서 부터 유명했으니 그럴일은 없겠지만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사기호적으로 왔든, 질그릇호적으로 왔든 네가 뭔상관이야?" "너 같은 인간 때문에 실력있는 선수의 빛이 가려지기도 하니까 하는 소리다" 코웃음 치며 우영원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만원짜리 한장을 수민이 형 손에 찔러 넣고는 뚜벅뚜벅 운동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나와 수민이 형을 삐딱하게 내려다 보더니 피식 가소롭다는듯 심히 불유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걸 못해서 애를 그렇게 괴롭히는 주제에 윗사람 좋아하시네" 그렇게 확- 한번 확실하게 비꼬아 주고는 공을 손안에서 한번 빙글 돌리더니 바닥에 내려놓고 그대로 [뻥-] 날린다. 완만한 포물선 모양을 그리던 공은 골대에 홀리듯 [쏙-] 빨려 들어가더니 그물 구석을 [쿡] 찌르곤 골네트를 [출렁출렁] 흔들었다. "별것도 아닐걸 가지고 사람을 괴롭히냐고" 야릇한 미소를 악마처럼 지어보이며 우영원이 수민이 형 코앞에서 말을 하자 형은 말없이 입만 꾹 깨물고 있다. 하긴 뭔말을 하겠어. 우리팀 전원이 다 덤볐는데도 못넣은 프리킥을 슬렁슬렁 마실 나왔던 날라리가 '아, 그거?' 라는 표정으로 '쏙' 집어넣어 버렸으니 상황이 우중충하다. 수민이 형 기분이야 우중충 하거나 말거나 그쪽에는 관심도 없는 우영원은 수민이 형 손에 들린 만원 뭉탱이를 [확] 앗아 가더니 쾌재를 부르며 내손에 손 뭉치를 쥐켜준다. "야, 돈 벌었으니까 이걸로 고기사줘" '오랜만에 고기먹네, 고기고기' 라며 천진난만한 얼굴로 운동장 밖으로 뛰어나가는 우영원을 보며 난 긴한숨을 내쉴수 밖에 없었다. 고기 못 먹은게 그렇게 한이었냐. "그러니까 이걸 지금 나더러 치우라는거야?" "그럼 치워야지 안 치우시겠다는 말입니까?" 오늘은 일요일이다. 선데이, 즉 휴일이다. 푹 잠을 자서 몸을 쉬게해주는 그런 날인데 잠결에 문틈 넘어로 들리는 소리에 머리가 깨버렸다. [깜박깜박] 잠에서 막 일어나 정신이 없었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머리가 또렷이 맑아졌다. 단 한마디도 지지 않고 따닥따닥 옆집 아주머니와 한판 붙고 있는 우영원의 목소리는 나이드신 어르신을 배려하는 마음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싸늘하고, 심지어는 싸가지라곤 벼룩에 간만큼도 없다. [끼익] 대충 세수를 하고 눈꼽이나 떼주고 굴러다니는 옷가지를 주워입고 나갔다. 안봐도 이제는 비디오다. 옆집 아주머니와 우영원은 며칠전부터 서로의 알력을 두고 엄청 싸워대기 시작했으므로 싸움의 이유와 시작 따위는 상황을 일부러 케묻지 않아도 이제는 다 안다. "야" 문을 삐죽이 열고 우영원을 불렀다. 고글 선글라스로 눈을 가렸다지만, 그래도 유명한 축구선수인 녀석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건 운동복일때와 전혀 다른 저 날라리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외모 때문일 것이다. 이름을 부르면 아주머니께서 녀석의 신분을 눈치채고 주위에 어줍잖은 소문을 뿌릴까해서 대충 인칭대명사를 이용해줬다. 사실 속에선 '이 십쌔야-' 라는 호칭이 떠올랐다. "왜" 가벼운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며 우영원의 속살이 은근히 밖으로 살짝살짝 엿보였다. 단단한 하복부의 복근뿐 아니라, 바람이 심하게 불면 옷감이 다리를 휘감으며 몸에 찰싹 달라붙어서 탄련넘치는 다리근육도 육안으로 선명히 파악 할수 있었다. 그정도로 녀석은 근육으로 둘러싸인 몸을 가졌다. 그런 신체 건장한 우영원이 개념없는 옆집 아줌마와 아침 댓바람부터 쪼잔하게 별거 아닌걸로 며칠째 연짱 싸움을 해대고 있으니 나로썬 속에서 열불이 날 지경이다. "들어와, 야구 방맹이로 대가리 부셔버리기 전에" 아침이라 낮게 깔린 거클거클한 질감의 목소리가 으름장을 놓는데 일조를 했다. 어른을 두고 이렇게 표현하는건 대단히 죄송한 일이지만, 옆집 아줌마는 대단히 싸갈머리 없는 표정이었다. 며칠 전이였으면 '죄송합니다' 라고 입에 발린 인사라도 했을 나이지만 저 아줌마도 우영원보다 더하면 더했지 잘한거 하나없는 인간이므로 오늘은 대략 무시하기로 했다. 기본적으로 예의가 있으려고 노력하고자 하는 내가 사람을 무시해버리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매우매우 불유쾌한 상황인데 그걸 모르는건지 우영원은 뻔뻔스럽게 내쪽은 싹 무시하고 아줌마와의 일전으로 다시 돌입해 버린다. [철컹-] 옆집아이 자전거가 우리집 벽쪽으로 슬쩍 넘어와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자전거 몸체의 삼분의 이정도가 넘어와 있었다. 그런 자전거의 뒷바퀴 부분을 가볍게 차며 우영원은 입꼬리만 살짝 올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대체 지놈이 축구선수라는 사실을 자각이나 하고 있는건지 늘 궁금하다. 니가 차면 네생각에는 가볍게라지만 그 가볍게 차인것 조차도 지체없이 부셔진다는걸 모르는거냐-?, 니 다리는 살인무기라고, 제발 뭘 팰거면 손으로 패. "이쪽으로 넘어왔잖습니까, 치우시죠" "총각이 무슨 상관이야!" "제가 이집에 기거하고 있거든요" 말끝마다 툭툭 옆의 사물들을 걷어 차고있는 우영원의 몸짓에 뻔뻔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옆집 아주머니도 살짝 쪼신것 같았다. 하긴, 저 위압감에 눌리지 않는 인간이 외계인이지. 더군다나 며칠 전부터 아주머니와 싸우고 있는 우영원의 승률은 전승이다. 그러니까 옆집 아주머니가 어떤사람이냐면 자기집 문앞에다 내놓아도 복도식 아파트에서는 조금 기분 나쁠 음식물 쓰레기 통을 남의집 벽앞에다 떡하니 둔것을 시작으로, 재활용 용품 모둠함과, 종량제 쓰레기 봉투, 마늘자루, 양파자루, 파자루를 포함, 기타 잡다한것을 모아두는 통을 내집앞 복도에 자기집 앞인냥 놔두었었다. 그런데 그걸 며칠 전부터 아주 작정을 한듯 우영원은 일일이 딴지를 걸어서 모두 치워 버리고 있었다. "자전거가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거나 하는건 아니잖아?" "눈에 거슬려요" 저 막무가내 지가락대로인 우영원을 이길사람 누굴소냐. 마지막 남아있는 자전거까지 싹 옆집 복도 앞으로 옮길 모양인가보다. 집 평수가 좁다보니 복도 앞에 물건을 내놓는게 어느정도 보편화가 되어있지만 내집, 네집 구분을 모르는 아주머니가 아주 된통 걸린거다. 어쩐지 불쌍하기 까지 할정도로 말이다. "치워주면 되잖아!" "그러시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끝까지 한마디도 안지고 서너마디 더 한 우영원은 승리자의 미소를 싱긋 지어보이며 당당히 현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난 그 우영원의 머리를 '뻑' 소리가 나게 갈겨줬다. 정말 못 살겠다. 그냥 놔둔다고 큰일 나는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기력을 쇠진해 가면서 싸우는건지, 물론 기분이야 안좋지만 그걸 꼭 그렇게 하나하나 말해서 문제를 일으켜야 하는거냐고!!! "아야-!" 우영원은 운동선수다, 그것도 굉장히 고가의 운동선수다. 그래서 난 놈을 잘못때리면 어마어마한 돈을 물어줘야 하므로 생각다 못해서 때리는 곳이 머리다. 지놈이 순순히 자백한대로 녀석이 머리를 쓸일은 없을거다, 설령 쓴다해도 지금처럼 사고라는게 전혀 없는 덜떨어진 아줌마와의 싸움이겠지. "이층에 사는 다른사람은 저 아줌마 못 이겨서 가만둔줄 알아? 내가 싸우고 다니지 말랬지-!!" 척하니 어깨에 야구 방망이를 걸치고 우영원을 노려보자 녀석은 어지간히 아픈지 머리를 [쓱싹쓱싹] 비비며 인상을 쓰고 있다. 네 삶의 원동력은 싸움걸기, 비아냥대기, 시비걸기, 발길질하기지? "눈에 자꾸 자전거가 거슬리는데 어쩌라고" "눈을 감고다녀!" "감는다고 머리 속에 자리잡은 거슬리는게 사라지나?" 빈정빈정 거리며 집안으로 들어온 우영원은 '난 정말 너무 억울해' 란 표정으로 머그컵 하나를 내민다. 식탁에 앉으면서 뭔가 결심한듯한 저 표정을 보니 아직 반성이라고는 요만큼도 안한게 틀림없다. "안먹을거야" "사과하고 영양제만 넣었으니까 먹어" 불만과 속상한 마음을 표정으로 표출하며 다리를 덜덜덜 떨고 있는 우영원이 내미는것은 그러니까 조금 사정이 나아진 영양식이다. 이상한 분말가루도 들어가 있지않고, 요상한 냄새의 야채가 들어가 있지도 않은것이다. 그저 뽀얀 속살을 가진 사과를 물처럼 갈아놓은것에 녀석의 말대로라면 영양제가 첨가된 것이다. 며칠 전부터 이렇게 순화된 영양식이 매일 아침마다 나오고 있다. [꿀꺽-] 한모금 들이켜서 맛을 살펴봤는데 그냥 사과 갈아놓은것과 별반 다를게 없다. 오물오물 몇번 입에서 굴리다가 꿀꺽꿀꺽 마시는데 우영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밖으로 튀어나간다. 입을 쓰윽 닦고 컵을 씻었다. 빈속에 뭐라도 들어가니 좋긴한데 밖으로 튀어나간 우영원 때문에 한편에선 또 골치가 아프다. 또 뭐야. "아줌마 제가 몇번이나 말했잖습니까, 이거 치우라니깐요! 베란다는 폼으로 둔데요?" 또 뭐가 문젠가 싶어서 나갔더니 앞집 복도로 옮겨갔으나 우영원의 마음에 한없이 들지 않는 마늘자루, 양파자루, 파자루가 녀석의 육탄공격을 받고 있다. 발로 퍽퍽 그렇게 차면 마늘, 양파, 파는 아마 먹을수 없는 상태가 될것이다. 우영원의 끝없는 맹공에 지칠만큼 지쳤을 아주머니 이건만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고수 하시려는건지 녀석의 의견이 전혀 먹히질 않는다. "우리집 앞에 뒀는데 또 뭐가 문제야?" "껍질이 복도에 굴러다니잖아요. 바람 불면 끝집으로 날아가는거 모르십니까?" 지는 감독도 두들겨 패는 주제에 겨우 마늘껍질 가지고 지랄이야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감독이 녀석을 팼으니 맞으면 어쩌면 수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마늘 껍질 굴러다니니 녀석이 시비를 거는건 정말 진짜 왕 밴댕이소갈딱지라고 여겨진다. 난 얼른 튀어나가서 우영원의 팔을 움켜잡고 집으로 끌어당겼다. "너, 들어와" "아, 왜이래" 왜 이러긴 더이상 복도에서 쑈하지 말란 말이다. 동네 창피해서 정말 못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옆집 아줌마와 싸워대는 우영원의 체력에 정말 두손 두발 다들었다. 아침 댓바람에 자전거 치우라고 싸운것도 모잘라서 시비 걸었던걸 또 거냐? 에이, 징한놈아! "어어, 야- 남지웅 너 진짜 왜이래" 문을 [철컥] 잠그고 거실을 지나 질질 방으로 우영원을 끌고와서 옷을 마구 벗기기 시작했다. 바지 버클 풀고 지퍼 열고 쓱- 내리자 내가 이럴줄 몰랐던 우영원이 뒷걸음질 치다가 바닥에 [쿠당] 엉덩방아를 찧고 앉아버렸다. 하여, 다리가 들린 녀석의 바지를 벗기기가 한결 수월해져서 그틈을 놓치지 않고 냅다 바지를 벗겨 버렸다. "야, 너 미쳤냐?" "시끄러" 콱 한대 패버리고 싶었으나 이때가 아니면 우영원이 나보다 낮은 자세로 있는 경우가 없기에 녀석의 면티를 확 벗겨버렸다. 덕분에 쓰고 있던 안경이 옷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우영원은 거의 알몸인 팬티 한장 신세가 되었다. 난 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싸움쟁이, 시비쟁이, 빈정꾼 우영원을 묶어 놓기 위해 장농으로 튀어가서 녀석이 덮고 자는 이불을 휙 머리위로 던져줘 버렸다. "자라, 자. 제발 입 다물고 잠이나 자라" 내 침대 위에 놓인 베개를 바닥에다 놓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무슨 외계 생명체인냥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우영원을 눕히고 이불을 귀까지 덮히곤 [토닥토닥] 등을 두들겨댔다. "자라, 자" ".... ... ... " 기가 막힌건지 넋이 빠진건지 억이 막힌건지 멍해진 눈으로 나를 보던 우영원은 이내 곧 자신의 페이스를 찾더니 입매를 살짝 올리며 내 허리에 은근슬쩍 팔을 두른다. 그리곤 [휙-]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내몸을 앞으로 급격하게 끌어당겨 제품에 당겨 안았다. 숨막혀 이새꺄! "안놔?" "자라며-" 뭉글뭉글한 느낌이 나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나를 꼭 끌어안는 우영원을 밀어내려고 발버둥 쳤지만 발버둥 치면 칠수록 나를 감아오는 녀석의 손아귀만 더욱 거세질 뿐이었다. 한참동안 승강이를 벌였는데 좀체 우영원은 놔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너, 너 뭐하는거야?" "자꾸 반항하면 확 목을 물어뜯어 버릴거야" 순간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우영원의 행동에 놀라 내가 화들짝 놀랐다. 그런 내 목덜미를 뜨거운 숨결을 뿌리며 간지럽히면서 소름이 오싹 돋을만한 협박을 한다. '한다면 한다' 인 우영원이기에 난 더이상 반항을 하지 않기로 하고 녀석의 품에 안겨 이미 깨어버린 잠을 청하기 위해 양을 세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 가는데 몽롱한 자취를 남기는 붕뜬 공기가 몸을 휘감았다. 몸이 '부르르' 저절로 떨릴것 같은 몸서리치는 이요상한 기운은 오래전 경험한 바가 있다. 답답하게 숨을 죄는듯한 어둠이 눈앞까지 아롱거릴 정도로 어지럽게 음울한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미안해" 눈을 깜박이고 고개를 스윽 돌리는 순간 주위가 환하게 밝아 오더니 우영원이 침대에 걸터 앉은체로 쌜죽이 웃으며 사과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집이 아닌 이곳은 우영원이 무채색에서 화려한 유채색으로 옷을 덧입었던 그곳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앞에 앉아 있던 우영원의 눈꼬리가 좀더 서늘하게 휘어지며 눈을 위로 치켜뜬다. 덤덤한 모습 보다 웃는 모습이 무서울수 있다는게 놀라웠던 그 상황이 다시한번 펼쳐지자 오싹한 기운이 전신을 훑어 내렸다. [뚜벅] 뭘까이건-, 이번엔 또 뭔가 했는데 아까 걷던 음울한 골목으로 돌아온것 같다. 뚜벅뚜벅 무서워서 앞만 보고 무작정 잰걸음을 했던 그때와 달리 뒤에서 걸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커다란 손이 [확-] 눈앞을 덮쳐왔다. "헉-!" 꿈-?! ... 꿈이었나 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텅빈방은 잘 정리되어 있었다. 우영원은 아마 자는 나를 위해 부엌에 가 있는것 같다.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 쓴것같은 기분이다. 강간을 한것도, 강간 해놓고 웃으며 사과를 한것도, 나를 바보취급 했던것도 모두 우영원이란 녀석이 했던 끔찍한 짓이었다는걸 다시금 되새기자 뇌를 냉수에 넣어 뽀득뽀득 소리가 나게 씻고 다시에 머리에 넣은 느낌이다. [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었다. 문 바로 앞에 있는 식탁이 있다. 그 식탁 앞에는 우영원이 꼿꼿이 앉은체로 신문을 탐독하고 있다. 한국에 온지 열흘이 훌쩍 넘었건만 우영원은 하루는 푹 잠을 자는가 하면, 하루는 하얗게 밤을 지샌다고 했다. 아마 오늘은 잠을 자지 못한것 같다. 꿈 때문인지 내집 식탁 의자에 앉아있는 우영원이 너무도 생경하다. "일어났어?" "어" 턱이 바들바들 떨릴것 같은데 아무것도 모르는 우영원은 선선히 웃으며 나를 본다. 내가 나온걸 본 녀석은 일어서서 씽크대 위에 놓아둔 무언갈 가지러 갔고, 난 그사이 의자에 겨우겨우 앉았다. 망연자실한 기분이 되어 멍하니 있다가 녀석이 보다만 신문을 지나가듯 봤는데 신문에는 한글이 아닌 영어가 빼곡히 적혀져 있었다. 영자신문? "마셔" 오늘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영양식을 받으며 나는 조금 싫은 내색을 피웠다. 이건 또 뭐야? 란 내표정에 우영원은 입가에 미소를 띄며 재미난걸 본 아이마냥 천진하게 웃어 보인다. 저 웃는 낯인 녀석이 꿈에서 그리도 냉랭했던 인간과 동일인물이라는 현실이 슬프다. 암담하고 우울하다. 음침하고 울컥 속이 엉킨다. "딸기하고 비타민에다 플러스 알파로 나의 사랑이 듬뿍 들어가 있지" '큭큭큭' 하고 웃는 녀석을 보며 난 마시던것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딸기하고 비타민에다 너의 사랑이 듬뿍이라고? 네가 언제부터 나를 그리 어여삐 여겼는데? 응? 대답 좀 해봐. 넌 나를 강제로 끌고가서 네맘껏 헤집어놓고 내버려뒀을뿐 아니라 다시 만났을때 나를 비아냥 거렸고 그 뒤로 우리는 험악한 관계였잖아? "역겨워서 딸기가 속에서 요동치는것 같애"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야 없지 않아?" 진정 속에서 요동치고 있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장난인듯 웃으며 그렇게 말을하자, 우영원은 답지 않게 울적한 표정으로 대꾸를 한다. 우리는 앞으로 같은편일테고, 앞으로도 쭈욱 보아야 할 사이인데 내말이 조금 심했던것 같기도 하다. 순전히 장난으로 한말이라면 미안스럽지 않겠지만 온전히 본심이었기에 심장이 속에서 덜컹 거렸다. "진짜야 엄청 느끼해서 들기름 드럼통째로 벌컥인것 같아" "느끼하다니 그런 섭섭한 말씀을 ..." 눈꼬리를 휘며 신문을 넘기는 우영원을 보며 장난스레 말하고 있지만 내 속은 전처럼 편하지 않다. 꿈 하나에 사람이 이렇게 휘둘리다니, 정말 몹쓸 꿈이다. 머리를 마구 어질러놓고 사라져버린 꿈을 반복해서 생각해 보고 있느라 눈앞을 멍하니 놓은게 잘못이었을까? 내 멍한 얼굴을 마주 봐주던 우영원의 손이 꿈처럼 [확-] 내쪽으로 다가왔다. "헉-!" 놀라서 뒤로 물러나려는 내 얼굴에 닿았던 손에는, 정확히는 내 입술을 훑고 간 우영원의 손끝에는 딸기가 엉겨붙어 있었다. 그걸 [할짝] 혓바닥을 내밀어 닦아 먹어버린 우영원을 본 난 머리에 바위 하나가 [쿵-] 하고 떨어지는것 같았다. "야-" "응?" "더럽잖아" 남에 입술 끝에 붙어있던걸 떼먹다니 너 정말 이상한 놈이야. 원래 사고방식이 보통의 인간과 다른건 알고있지만 며칠 같이 붙어 있었다고, 이런거 저런거 다 본 사이지만, 못볼 꼴 안보여 줘야할 꼴 꽤 보여줘버린 사이지만 그렇다고 그걸 먹는건 정말 오바다. "나의 사랑이 듬뿍 담겨있는 영양식이 지금 더럽다는거야?" 가끔 사람 할말없게 만드는데 재능이 대단한 우영원이 아닐수 없다. 그걸 그런식으로 재해석하는 네가 머리에 존경을 표하는바야. 도대체가 언제부터 녀석이 나를 이토록 자기사람인냥 굴었는지 모르겠다. 분명 저번에 헤어질때는 좋은 모습이 아니였던걸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영자신문은 어디서 난거야?" "우리 매니져 한국 왔어" 우영원의 매니져가 한국에 왔다라 그렇다는 말은 영국에서 대충 일이 잘 무마되었다는 말인가. 얼마나 잘 마무리짓고 왔는진 모르지만 참으로 오래 걸렸다. 하긴 변호사를 묵사발로 만들어 놨으니 이 정도면 짧은건가? 어쩌면 아직 마무리짓지 못했을런지도 모르겠으나 여하간 녀석의 매니져가 왔다는건 우영원이 이제 이집에서 떠날때가 되었다는 뜻과 일맥상통하는건 맞는것이다. 녀석이 이제 간다라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멜랑꼬리해졌다. 그러나 본심과 다르게 말은 반대로 나간다. "매니져는 어디다 두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 "한국에서 몇가지 손볼일이 있다고 계속 죽어지내라던데" "너, 또 사고쳤어?" 신문 한번, 내 얼굴 한번 보며 이야기를 하는 우영원에게 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계속 죽어지내는거야 공식적으로 국내에 입국한게 아니니 어느정도 당연한 거지만, 뭐랄까 매니져가 왔는데도 여기에 죽치고 있다는건 또 다른 사고를 일으켰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고뭉치냐?" "네가 사고뭉치가 아님 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어" 길고 서늘한 눈매가 불만스럽게 휘였다가 풀렸다가 다시 휘여졌다. 아무래도 자신을 사고뭉치로 보는 시선이 마땅찮은 모양이다. 그래도 할수 없다. 네입으로 주절주절 사고 친거 분 주제에 이제와서 섭섭한 모양새인게 더 웃긴거라고. "나 사고 안쳤어" "믿을걸 믿으라고 해" 옆집에 가서 실컷 싸움박질 하고서도 생긋 웃으며 집에 귀가 할 우영원이다. 잠시 잠깐 눈을 뗀 사이 또 무슨 사고를 친거냐고 닥달을 하는 내 눈빛에 우영원은 특유의 시니컬한 웃음을 피식 지어보이며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다. "씻고 나오기나 해라. 나가게." 눈웃음 살랑살랑 치면서 그렇게 멋진얼굴로 말하면 다른곳에선 잘 먹히나본데 나한텐 안통해! 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헌데 나한테도 먹혔다. 굉장히 잘 먹힌것 같다. 방금 울적했던 기분 확 날릴정도로 우영원의 생긋 웃는 그 얼굴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철철 넘친다. 웃는 모습조차 역겨웠던 녀석이었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우영원이 웃으며 나를 보면 그게 나를 비웃는것 같아서 명치가 꽉 막히고 가슴을 둔탁하게 누가 후려친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녀석의 웃는 모습이 슬퍼보였다. 웃는 모습인데 마치 우는것 같은 그런 우울함이 한껏 뭍어 났었다. 분명 지난번 헤어질때 녀석과 끝이 좋지 못했다고 느낀것은 아마도 그 울적한 웃음 때문인것 같다. 그 웃음 처음본게 언제더라, 내 기억이 맞다면 폭설이 내리던 날 나를 찾아왔던 우영원에게 내가 한껏 떠들고 난 그 이후에 만났을때, 처음으로 그 울적한 웃음을 지었었다. 그렇게 음울한 웃음이었는데 어느날 다시 보니 우영원의 웃음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뭔가 도트인 인간의 웃음처럼 녀석의 미소를 마주보는 순간 내가슴을 뭔가 뻥- 뚫고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우영원의 그 대단한 웃음 덕분에 난 얼결에 일어나서 씻으러 갔다. 그나저나 어딜갈 셈이지? "여기가 어디야?" 내입으로 묻고는 있었지만 나도 여기가 어딘줄은 안다. 여긴 한의원이다. 그런데 우영원과 이 고풍스런 한의원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가 궁금했다. 어서어서 나가자고 나를 보챘던 녀석이 온곳이 한의원이라 조금 얼떨떨하다. 그나저나 난 이녀석이 어디가자고 할줄 알았던거지? "우리형 친구가 하는 한의원" 한의원 안으로 한발 들어서자 코끝에 지독한 한약냄새가 퍼졌다. 한약냄새가 좋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약냄새가 너무 싫다. 그 끔찍한 구역질 날것 같은 냄새가 너무 싫어서 손으로 코를 가리고 있어야 할 정도다. "어서오세요" 한의원 안에는 간호사 처럼 보이는 여자 두명과 하얀 가운을 입은 대단히 젊은 한의사 한분이 계셨다. 그 한의사는 우영원을 보자 반가이 웃으며 맞아주셨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를 보며 우영원은 선글라스를 벗고 손을 살짝 들어보이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형 잘 지냈어?" "영원이 오래만이다, 너야말로 잘 지냈어?" 서로가 서로를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를 소외감이 몰려왔다. 나는 지금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하나하는 고민이 들 무렵 우영원이 나를 툭 치며 한의사씨에게 소개를 시켰다. "이쪽은 아까말했지? 우리형 친구, 여기는 남지웅" "아, 남지웅선수 갈때 싸인 하나 해주세요" 사람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는 한의사 양반은 송구스럽게도 나를 아는 모양이었다. 보통 이렇게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고맙다고 말이라도 해야하는 법인데 아직 잠이 덜깬건지 얼이 빠진 나는 그저 멍한 얼굴로 '아.. 네에..' 라고 대답을 했다. "얘, 뼈 좀 맞춰죠" 내 한쪽팔을 집어들며 우영원은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뼈를 맞춰? 내가 조립식 기구냐? 뼈를 맞추게?? 상당히 불만스런 눈길로 우영원을 올려다 봤지만 녀석은 뭐가 그리 뿌듯한지 생긋 웃으며 한의사씨가 인솔하는 침대로 나를 이끌고 저벅저벅 걸어간다. "이게 뭐에요?" 한의학에 상당히 불만이 많은 내가 인상을 그리며 앞에 보이는 이상한 침대에 불신을 표하자 한의사 선생님은 차분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뼈를 맞추기 위한 보조용 침대인데 별로 아프지 않을거라는데 주요지였다. 그런데 뼈를 맞추다니 그건 또 무슨소리? 라고 하자 '추나요법' 이란 전문용어를 쓰시며 나의 기를 팍 죽여버리셨다. 그러니까 환자에게 일상용어로써 설명을 하란 말입니다. 배운거 티내는 겁니까? "별로 아프진 않을 거에요" 나를 침대에 눕히고 [덜컥덜컥] 뭔가 두어번 누른 한의사씨는 이리저리 침대 주위를 분주히 돌아다니며 열심히 내 뼈를 맞추기 시작했다. 과연 이렇게 두어번 누르는걸로 뼈를 맞출수 있는가가 상당히 의심스러웠으나 그의 설명대로 별로 아프진 않았기에 난 별 말없이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이잉-] 기계가 윙윙대는 소리를 내며 자동으로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며 하반신을 움직이고 있었다. 한의사 선생께서는 뼈를 다 맞춘것인지 어느정도 분주히 돌아다니는것을 멈추고서는 이렇게 기계를 작동시키고 가버리셨다. 침대 머리맡에 서있는 우영원은 나를 내려다 보며 쓸게 빠진 녀석처럼 살풋살풋 웃고 있었다. "왜 실실 웃고 지랄이냐" "너 잘 키우는게 나의 목표거든. 이거하면 아마 좀 자랄거야" 왜 영양식을 그렇게 날이면 날마다 먹이나 했더니 그런 요상한 목표를 세워놓고 있었군. 피식 내가 우영원을 비웃자 녀석은 그런 나따위는 아무상관도 없다는듯 침대 곁을 뚜벅뚜벅 조용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윙윙 거리던 기계가 15분 가량 자동으로 움직이다 멈추자 다리르 묶어 놨던 벨트 푸는 것을 우영원이 도와줬다. "내일 또 와야 돼" "왜?" "그러니까 너를 잘 키우는게 내 목표라고 했잖아" 도통 알아들을수 없는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 우영원을 다시 한번 피식 비웃어주며 일어나고 있는데 한의사씨가 들어오더니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점심 먹고가" "아냐" "약속있어?" "아니고 얘 학교 가야돼" 저기서 얘란 나를 말하는거겠지. 한의사씨는 꽤 섭섭한듯한 인상이었지만 우영원은 그쪽은 다시 돌아보지도 않고 학교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내심 녀석이 학교에 가는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무려 두 살이나 많은 수민이 형이랑 말까고 싸운데다, 형의 자존심을 있는대로 꾸욱꾸욱 짖뭉개주었다] 난 별다른 말없이 입을 다물고 걸었다. 내가 우영원이랑 나란히 학교 가는 길을 걷게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걷고 있는 이 현실이 거짓말 같아서 우뚝 멈춰섰는데 우영원이 그런 나를 돌아봤다. "왜그래?" 최전방 스트라이커인 우영원의 뒷모습을 보는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 포지션이 라이트 윙이니 경기에 우영원이 출장만 하면 질리도록 볼수 있는것이 녀석의 등짝이다. 그런데 평범한 옷을 입은 우영원의 뒷모습은 조금 달랐다. 그 꿈속에서 나를 뒤따라온것은 저 평범한 옷을 입은 우영원일테지. 사실 평범한 옷을 입었음에도 엄청 날라리 같아 보이지만 여하간 옷은 평범하니깐. "꿈이 뭐라고 생각해?" 내 멍한 질문에 우영원의 표정은 조금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꿈이란 뭘까? 깨어나면 사라져 버리는 그 환상같은 거짓은 쓸모가 없는것이 분명한데 고 거짓말이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지금 이 상황이 싫었다. "꿈이란건, 욕망의 상징적 충족이라고 프로이드가 말했대" "욕망의 상징적 충족?" 보통때였다면 프로이드가 누군데? 라고 물었을 나이지만 지금은 욕망의 상징적 충족이란 말이 더욱 궁금했다. 욕망의 상징적 충족이라, 내가 꿈을 꾸므로써 널 강간범으로 생각하는 욕망을 상징적으로 충족했다는 말이야? "무의식 속에서 검열없이 현실에선 고백할 수 없는 욕망들이 변형되고 위장되서 보이는거래" 겉으론 태연한척 하지만 갑갑하고 답답했던 그 짙은 패배감이 담긴 내 마음은 아직도 그 골목 어귀에 떨어져 있다는 말일까? 뭔가 대답해 주기 싫은 기색이 영력했던 우영원은 의외로 술술 잘도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대답은 듣지 않았던 편이 좋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조금은 녀석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녀석은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는데, 아직도 우영원을 밀어내야 하는 존재인것으로 인식하는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오랜만이다" "아, 형 오랜만이네요" 3월 말 이후 얼마만에 만났는지 날짜 꼽기도 귀찮을 정도로 오랜만인 선배님들과 인사를 나눴다. 홈경기인지라 경기 3일전에 모인 대표팀은 소집일 이전부터 선수들이 모여 왁자지껄하게 놀고 있었다. 방배정을 받고 짐을 풀고 나왔는데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다들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지웅-" 그리고 무엇보다 형들이 반가워하는 인물은 바로 우영원이다. 우영원은 소집일 이전까지 질리도록 우리집에 붙어 있다가 홍부장의 연락을 받고서야 짐을 챙겨 떠났다. 그래봤자 하루만이지만, 며칠 붙어있던 사이 정이라도 듬뿍 들어버린건지 만 하루만에 보는 우영원의 얼굴이 반갑다. "받아" 복숭아 주스 한봉지를 내미는 녀석의 손을 물음표 달린 눈으로 보니 우영원은 지체없이 제 할말을 한다. 받는게 어려운 일도 아니라 받긴 받았는데 주스를 든 반대편 손을 우영원이 덥썩 잡더니 어디론가 나를 끌고 가려고해서 또 한번 물음표 달린 눈이 되어버렸다. 응? 어디가? "먹으라고 주는거야" 트레이닝장의 캄캄하고 좁은 복도는 차갑고 인공적인 느낌이다. 목소리를 윙윙윙 울리는 복도를 걸어가며 나는 뱀이 내몸을 스물스물 기어가는 기분이 들어 그만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우영원은 저 어두운 복도 끝에 무슨 볼일이 있는건지 자박자박 잘도 걸어간다. 손에 들린 주스를 던져버리고 우영원을 밀어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손잡고 걷는게 나쁜짓도 아니고 일단은 따라가 보기로 했다. [드르륵-] 아주아주 어두컴컴한 창고같은 느낌이 드는 곳의 문을 열자 매케한 먼지향이 코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달달한 복숭아 주스를 '쪼옥' 빨아 먹으며 녀석이 무슨 속셈인지 분주히 살폈다. 뭘 하려는 건데? 도대체 여기에 온 이유를 알수가 없어서 눈만 땡글땡글 굴리고 있는데 우영원은 찾고있던걸 발견했는지 내게 손짓을 했다. 그러니까 난 네집 개새끼가 아니래도. "뭐야?" "서봐" 한쪽 구석에 박혀있던 키재는 기구를 끄집어낸 우영원은 먼지 투성이인 그것을 손을 슥슥 털어내곤 내게 서보라고 했다. 별로 키재는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복숭아 주스를 마시는것에 집중하는척 하며 녀석을 무시하려고 했으나 강제로 손이 붙들려 그리로 끌려가야했다. "아야-" [탁-]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철막대기 때문에 내가 불만을 터트렸지만 우영원은 그런것에 일말의 관심도 가져주지 않고 키를 재는데에만 열중했다. 어차피 재봐야 170도 안되는 키인데 뭘그리 인상을 찌푸리며 보는건지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171.6 센치" "농담이지? 나 167이야" 머리 위에 차가운 느낌을 주던는막대기를 [꾸욱] 더욱 세게 누르며 우영원은 다시 한번 살펴봤지만 '171.6이야' 라고 했다. '그럴리가' 라며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나와 달리 뭐가그리도 뿌듯한건지 녀석은 입매를 동그랗게 말며 싱긋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널 잘 키울거라고 했잖아" 우영원이 [툭툭툭] 내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주며 창고를 빠져 나왔다. 녀석은 자신의 이상한 목표를 어느정도 소귀의 목적을 달성한것에 대해 매우매우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네녀석이 나를 잘 키워서 뭘 할 속셈인건데? 하여튼 인간이 허용할수 있는 한계치를 넘은 사고방식을 가진 녀석이다. [삐익-] 원정경기는 원래 빡세다. 이길 확률이 현저히 낮으며 그것은 상대가 강팀이든 약팀이든지 간에 원정경기란 이유만으로도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오늘 경기는 원정경기가 아니였다. 지금 나는 홈경기에서 뛰고 있고, 열렬한 홈팬의 응원을 받으며 뛰고 있다. 그러나 월드컵 예선전이기에 한걸음도 양보할 수 없는 상대편은 의외로 많이 거칠었다. "쿨럭" 다리가 걸려 넘어져 바닥에 가슴을 [쿵] 박아버리는 바람에 숨이 턱 막혀왔다. 쿨럭이며 기침을 하는 내 머리 위로 나에게 다리를 건 상대의 그림자가 비쳤다. 아시아 예선전은 유럽처럼 그다지 험난하지 않다. 실력이 비등비등 한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대에 뛰어난 선수가 있는 경우도 드물다. 하지만 '그정도쯤이야' 라는 가벼운 자만심과 '우리가 누군데' 라는 오만함 그리고 설렁설렁 뛰는 자세로 인해 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야, 이 시발새꺄!!!" 내 앞에 서있던 나보다 조금 작았던 상대편 선수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우영원이 욕을 날렸다. 엄청난 발성을 보여주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내귀가 다 아플정도다. 심판이 나를 살피는 사이 최전방에 있던 우영원이 어느순간 이곳까지 내려와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쿨럭" 상대편 선수는 우영원이 서슬퍼렇게 눈뜨고 소리를 지르자 상당히 쫄아버렸다. 나보다도 작은 선수다. 쫄지 않는게 이상한거다. 상대가 겁을 먹고 눈치를 볼 정도로 짜부라 들었는데도 속이 풀리지 않았는지 우영원은 잡아먹을 기세로 상대편 선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잘못하면 사람 하나 죽이겠다. "야, 나 괜찮아, 쿨럭 .. 쿨럭" 쿨럭거리며 괜찮다는 내게 우영원은 또 뭐가 그리도 불만인지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내려다 본다. 6월 초의 날씨는 상당히 덥다. 운동장을 쉴새 없이 뛰어다녀서 더운데다 바닥에 한번 구르고 나니 뜨거운 지열이 온몸을 휘감아 더욱 덥다. 그런데다 나를 저렇게 못마땅한 얼굴로 내려다 보는 우영원까지 있으니 더욱 더욱 덥다. 적당히 좀 하자. "괜찮은거 좋아하시네" "가서 골이나 넣어" "골 넣는게 무슨 옆집 개새끼 이름이야?" 인상을 여전히 잔뜩 찌푸린체 독특한 맛이 나는 목소리로 주절인 우영원은 돌아서기 직전 상대편 선수를 다시한번 노려봐 주고 뛰어갔다. 발 걸린 내가 괜찮다는데 왜 지놈이 저렇게 성환지 쪽팔려 죽겠다 아주. "우영원 오늘 헤드트릭 할거라고 이갈았다고 신문에 났던데" "허위기사에요. 기자들이 지어낸." 볼 트립핑을 하는 우영원을 보며 척척척 뛰고 있는데 옆에 있던 선배 하나가 우스개 소리를 한다. 하여간 기자들 방정 맞은건 어제 오늘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나불거리니깐 될일도 안되는거다. 한국기자들이 오지랖이 넓고, 극성맞은건 알아줘야 한다지만 오늘 우영원은 꽤 열심히 뛰고있다. 벌써 월드컵 예선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두골이나 넣었다. 기자님의 성원대로 라면 한골 더 넣어 헤드트릭 하게 생긴건 맞는말이다. "왜 이제는 니네 뽀뽀 안하냐?" 투톱으로 공격하라는 작전에 따라 후위로 빠져있는 내게 우리팀이 공격하는 시간은 여유가 있다지만 저런 질문은 아무리 여유가 흘러 넘쳐도 별로 듣고 싶지가 않다. [툭-] 공을 받고 있는 우영원을 보며 선배는 정말 궁금하다는듯 질문을 했다. 보통 남자들끼리 뽀뽀하는건 비정상이거든요 선배. 그런건 궁금하더라도 입밖에 안꺼내는게 예의에요. [탁-] 오랜만에 상대편이 공격을 하기에 다시 정신차리고 길목을 막아서는데 아까 내 다리를 걸었던 녀석이 산만하게 한다리 짚고 왔다갔다 하기를 반복해서 하는게 상당히 지루했다. 툭툭- 힘있게 밀고 나오는게 더 쉽다고 생각할수 있지만 의외로 이렇게 어지러워 보이는 복잡한 잔재주부리기 보다 거대한 덩치로 밀고 오는쪽이 더 끔찍하다. [휙-] 바람을 가르듯 가볍게 공을 낚아챘다. 더는 지겨워서 못봐주겠다. 후위에 빠져서 수비를 하다 기습을 노리라는 작전을 곧이 곧대로 이행하려고 나는 발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뛰어서 거의 코너에 몰리기 직전 패널티 박스 안에서 나를 보고 있는 우영원과 눈이 마주쳤다. 난 지체없이 공을 날렸고, [부웅-] 높고 긴 호를 그리며 땅으로 떨어지는 공을 우영원은 긴다리를 이용한 자신의 전매특허인 힘있는 발리킥을 선보이며 골을 만들었다. "예쓰!" 내가 날린 공이 들어가는건 언제나 기분이 좋다. 신나서 만세를 부르던 내가 고개를 우영원쪽으로 돌렸을때 녀석은 나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그러더니 자신의 가슴을 쿡쿡 찌르곤 팔을 벌렸다. 아드레날린이 피 속에서 마구마구 분출되고 있었다. 엔돌핀이 펑펑펑 머리 속에서 폭죽 터지듯 터트려지고 있었다. 보통의 나라면 쑥쓰러워서 죽어도 못할 짓이지만 난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스프린터 처럼 녀석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우영원을 향한 내 최초의 부둥켜 안음이었다. -동고동락, 끝- [찰싹-] 손을 아래로 떨구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는데 누군가 내 손등을 앙칼지게 후려쳤다. 순간 따끔해서 내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자 짙은 갈색머리에 밤색눈을 가진 20대 초반의 여자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찰방찰방 허리 아래에서 물이 노니는 초보자용 풀에서 놀고있는데 난데없이 손등을 맞은 나는 아직 상황파악이 잘 안되고 있었다. 유로2004를 관람하기 위해 온 이곳은 포르투칼이었고 타국의 수영장에서 난생처음 보는 여자에게 아주 살짝이지만 맞았다는 사실은 기분이 한없이 나쁘다. <사람 눈에다 물을 튀기면 어떻게해요?> 처음보는 그녀는 알아들을수 없는 아마도 포르투칼어로 내게 뭔가 말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포르투칼어라곤 한마디도 못하는 나는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봐 줄수 밖에 없었다. 내가 포르투칼에 오게된 경위는 의외로 간단하다. 홍부장님이 당분간 국가대표 경기도 없고, 올대에 차출 당할 일도 없으니 여름휴가 겸 축구견문을 넓힐 겸 올림픽을 앞두고 피로도 풀겸해서 유로2004를 보러 가자고 해서 함께 동행했다. 나에겐 더없이 즐거운 제의였기에 난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제 어느정도 익숙해진 우영원이 동행하는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경기 시작일 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할일없이 호텔에서 빈둥거리는게 지루해지고 있을 무렵 녀석이 내게와 수영장에 수영이나 하러 가자고 했다. 원래 수영을 좋아하는터라 좋아라하며 따라왔는데 막상 오자던 당사자는 어디가서 보이질 않고 나혼자 이렇게 타국의 호텔 수영장에서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도대체 이여자 뭐라는거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여자에게 영어로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려던 참이었다. 뒤에서 암흑의 그림자가 [스윽-] 드리워지더니 내게 날카로운 눈빛의 여자가 점점 하얗게 질리며 굳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 위로 아주아주 독특한 입자가 오돌도돌한 우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 저 .. 저사람이 수영은 하지않고 물을 눈에다 튀겨서 ...> 일단 등치빨로 승부의 반을 먹고 들어가는 것인지 건장한 우영원을 본 여자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자세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왜 사람을 겁주고 저런데? 도대체 뭐라는건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 뭐라고 할거아냐. 뭐라는거지? <하. 수영장에서 물튀기고 노는건 당연하지 여기가 사우난줄 알아?> 여자의 더듬거리는 말에 우영원은 한템포도 쉬지 않고 낮고 독특한 목소리로 응수를 해줬다. 뭐라는건데? 응? 야, 뭐라는거야? 눈치만 이리저리 보고 있는 나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우영원은 대놓고 여자를 빈정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 눈에다 물을 뿌리는건 ... > <수경은 장식용인가 보지? 수영장에서 물튀기는건 당연하지 그걸 몰라서 사람을 쳐?> 이제는 거의 울상이 다 되어버린 여자는 부들부들 입술을 떨며 우영원에게 뭐라고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아마도 막무가내인 우영원은 그런것 따위를 들어줄 인간이 아니다. 더이상 사태가 나빠지기 전에 이놈을 끌어내야겠다 싶어서 녀석을 붙잡으려고 했다.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 > <수영장은 물튀기는 곳이야 멍청한 인간아, 너 머리도 장식용이야? 아주 웃기고 있어> 급기야 한대치려고 덤비는 우영원을 잡는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니놈이랑 다시 같이 다니나 보자. 도대체 인간이 왜 이모양이야? 그냥 사과하고 가버리면 될걸가지고 하나하나 따지고, 성질부리고, 무력행사하고 넌 뒤치닥거리 해주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아? "야, 그만해. 가자" "니가 그렇게 물러터지게구니까 아무렇게나 막대하잖아" "가자고" "남이 치는데도 멍청하게 가만있으면 어쩌자는거야? 너 왜그래?" 너야 말로 왜이러는데. 아씨, 아까 그냥 사과하고 비켜버릴걸 괜히 어줍잖은 영어 쓸려다가 타이밍 놓쳐서 일만 복잡하게 됐네. 그리고, 내가 물러터지고, 뭐가 어째? 멍청하게? 여기 니네 동네랑 가깝다 이거냐? 지는 볶음밥에 엄지 손가락만한 야채 넣으려고 했던 주제에 누구한테 멍청을 운운하는거야? 화는 났지만 일단 끌어내고 볼일이다 싶어 난 우영원의 팔을 잡고 풀장 바깥으로 막무가내로 끌었다. <미안해요. 이녀석 말 신경쓰지 마세요> 별로 사과같은걸 해줘야할 상황같진 않았지만 여자를 그냥 두기가 뻘쭘해서 대충 아무말이나 해주고 우영원을 끌고 나왔다. 그런데 내 이 어줍잖은 말에 또 화가 난건지 우영원이 버럭 나를 돌려세우며 따지고 들었다. "니가 미안할게 뭐가있어?" "니가 한행동은 미안할 행동이야" 토닥토닥 또다시 말도 안되는 싸움의 서막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무려 포르투칼까지 와서 우영원이라 토닥여야 하다니 이건 너무 가혹한일이 아닌가 싶지만 녀석은 멈출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놈이 끝까지 잘했다 이거지. "니가 맞고 다니니까 그렇잖아" "그거 맞는다고 죽어?" 내가 한마디하면 할수록 열이 뻗치는지 우영원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체 나를 본다. 인상쓴다고 무섭냐? 니가 내앞에서 망가진게 몇번인데 이젠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다. 누구 안전에서 폼을 재는거야? "안 맞고 사는게 좋지 밖에 나와서 맞고 사는게 좋아?" "누가 맞고 사는게 좋댔어? 그거 맞아도 안 죽는다고 했지" "난 니가 맞고 다니는거 싫어" 벽에 등을 기댄체 인상을 그린 우영원은 나를 내려다 보며 그렇게 말했다. 이상한 맛이 나는 목소리로 조금 울리는 복도에서 말을 해서 그런지 기분이 묘하게 [지-잉] 하고 전류가 흐르는것 처럼 울렸다. "밖에서 그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난대없이 맞는거 그런거 싫어, 니가 말리지 않았으면 그래 나는 또 사고를 쳤겠지. 기분 같아선 그여자 머리 움켜쥐고 물속에 박아 버렸을테니까. 하지만 나도 어떤게 맞을일인지 아닌지 정도쯤은 알아. 그여자는 지가 수경을 안해놓고서 지나가던 니가 물튀겼다고 화를 냈어. 그런것도 그냥 꾹 참고 너는 넘어갈지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못해. 기분 나쁘면 상대도 나 기분 나쁜 만큼 나쁘게 해줘야 하는 성격이야. 왜 맞고 다녀?" "그렇다고 ... .... 꼭 때릴 필요는 없어" 확실히 우영원과 나는 정반대의 성격인것 같다. 물론 녀석의 설명대로 기분 나쁘면 상대도 나만큼 기분 나쁘게 만들면 어쩌면 나빠졌던 기분이 좋아 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 그렇게 일일이 다 화를 내고 반응을 할 필요는 없다. 에너지 낭비고, 시간 낭비다. 하지만 녀석이 내가 맞고 다는걸 싫어해주는건 어째서인지 기분이 나쁘지 않다. 솔직히 기분이 좋다에 가깝다. 그래도 누굴 패는건 나쁘다. "수영하러 왔으니까 수영이나 하자" "성격 참 끝내준다. 이상황에 수영을 할수 있어?" 또 다시 갑자기 버럭 화를낸 우영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몸을 돌려 탈의실쪽으로 가고 있었다. "야, 우영원-!!!!!!!!!!!!!!!!!!!" 내가 꽥 소리를 지르자 주위에 있던 사람이 일제히 우영원을 돌아봤다. 아차, 우영원은 유럽리그에서 알아주는 축구선수다. 즉, 유명인이란 말씀. 사람들 눈길이 몰린것이 풀리지 않자 우영원은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단어 하나하나를 씹듯이 으르렁 거린다. "아예 확성기 들고 우영원이라고 광고를 하지 그러냐" "아니 그게 .. 수영 ... 하자고" 꿍얼꿍얼 내가 기어 들어가듯 말하자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우영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파란기가 실린 긴 한숨은 내머리칼 끝을 맴돌며 흩어졌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조용히 고개를 들자 코앞에 우영원의 얼굴이 보인다. "수영 하자며, 가자" 사람들이 보던말던 척척 다시 수영장 풀쪽으로 가는 우영원을 따라가며 난 너무나 난처한 상황을 온몸으로 경험해야 했다. 그러니까 유명인은 참 힘든 직종이구나. 왜들 지할일 안하고 빤히 쳐다보고 지랄인지 가서 눈까리를 확 쑤셔버렸음 딱 좋겠다 싶었다. 이녀석 성격이 왜 드러워지는지 알겠어. "수영 안해?" 내가 소리치는 바람에 수경에 수모를 덮어 쓰고 있는 녀석을 확실하게 '우영원' 인걸 알아버린 사람들은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고 녀석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까 걸어올때와 별반 다름없이 우영원은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은듯 행동하고 있었다. 몸에 철갑을 둘렀나, 이새끼 엄청 뻔뻔하네 싶다. "그냥하면 재미없잖아" "그냥 안하면?" "내기할래? 50미터 먼저 도착하기" "해서 뭐하게?" 아, 그러고 보니 그렇다. 밥은 호텔에서 끼대면 내올거고, 딱히 사고 싶은것도 없고 돈은 저녀석은 너무 많이 가져서 탈이고, 뭔가 내기거리로 걸만한게 없다. 흐음, 뭐없나? 수영장에서 50미터 내기라면 수윤이 선배랑 수영장에 갈때 마다 했기 때문에 난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다. "지는사람 대한민국 만세 삼창하기, 할래?" [번뜩] 생각이 떠올라 눈을 반딱이며 말하자 우영원은 뭔가 좀 난처한듯한 얼굴이다. "여기서?" "어" "상당히 쪽 팔릴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쉽지 않을걸' 이라는 녀석에게 난 확실히 자신이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하자고 제의를 했다. 음하하하하하하. 너 딱걸렸다. 이래뵈도 내가 한수영 한단다. 우영원아, 동네에서 싸움해서 쪽팔리게 해줬던거 오늘 다 갚아주마. "너야 어차피 다 팔린거 아냐?" "뭐 그렇긴 하지만. 좋아, 하자" 상당히 꺼림직해 하던 우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스타팅 라인에 섰다. "다리에다 모터 달았어?" 저건 수윤이 선배 전담 멘트다. 나는 방긋 웃어줬다. 아마 축구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난 수영선수가 됐을거다. 그만큼 수영하는걸 좋아한다. 하지만 수영보다 축구를 더 좋아해서 축구선수가 됐다. 한가닥 한다하는 선배님들과도 수영을 해서 져본적은 여직 한번도 없었다. 선선하게 오케이 했던 우영원의 인상이 조금 굳어져 있다. 그래서 조금 분위기가 무섭기도 하지만 승자의 여유로 난 웃어줬다. "만세 삼창해-" 찰방찰방 가슴께에서 물이 흔들리고 있었다. [촤르륵-] 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물이 몸에서 쓸려내렸다. 조금이긴 했지만 물 파편이 튀는데도 패배의 충격으로 굳어버린건지 우영원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기는 맛은 바로 이런거로군. "우영원-, 만세 상창 해야지" "진짜 해?" "그럼 가짜로 할까봐?" 내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녀석의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질줄 몰랐나 보다. 하긴, 확실히 여타의 사람들과는 다른 스피드로 따라왔던거 같다. 이쯤에서 됐다라고 해줄까 싶기도 하지만 아까 나에게 별별 성질을 다부린 우영원이니 이정도 쪽팔림 정도야 애들 장난이지 싶다. "음, 대한민국 만세! 만세! 만세!" "큭큭큭큭" 목을 한번 가다듬은 우영원은 고개를 들어 제머리 바로 위에 있는 장식물을 노려보며 버럭, 버럭, 버럭, 만세를 외쳤다. 그러더니 나를 노려보며 인상을 잔뜩 그린다. 무서워서 장난도 못하겠다. 이녀석한테는. "... 아, 씨발, 됐냐?" "왜 욕질이야?" "오늘 쪽 다깠어" [촤르륵] 소리를 내며 물을 빠져나온 우영원은 미끈하게 빠진 몸을 과시하듯 무게 있게 걸으면서 독특한 목소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투덜이 스머프 처럼 투닥거렸다. 그러니까 이런걸 보고 표현 하자면 '확- 깬다' 라고 하는거다. "스페인이 이기겠지?" 첫날 에이조 경기를 예상을 하며 내가 묻자 우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도 의외로 복병이 될수 있겠지만 라울, 모리엔테스, 이에로, 호아킨, 카시야스, 푸욜, 이름만 들어서 내놔라 하는 선수들을 보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없을것 같다. 네임류에서 쨉이 되질 않는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우리나라 처럼 붉은악마 같은 엄청난 서포터가 있는것도 아닐테니. "그래도 확 러시아가 미쳐서 이길수도 있지 않을까?" "스페인은 포르투칼 인접국이야. 스페인한테 포르투칼은 거의 홈이나 마찬가질걸" "에, 그래?" 우영원은 나를 보며 '아직 어리구나' 라는 표정으로 나직하게 설명을 했다. 스페인 인접국이면 기후나 분위기가 거의 흡사하겠네. 거기다 적군이 홈팀도 아니니 음, 확실히 스페인이 질 확률은 떨어지는구나. "포르투칼이 이기겠지?" "글쎄, 난 그리스 응원할건데" 내가 확신을 하듯 묻자 우영원은 고개를 흔들며 삐딱한 미소를 걸친체 대답을 한다. 응? 포르투칼은 아직 누가 뭐래도 골드 제너레이션인데, 그리스를 응원하겠다니 저 자식은 반역의 기질이 너무 강하다. 거기다 여기는 포르투칼 안방이다. 상대는 물 건너온 그리스인데 응원하다가 속 뒤집어질 셈인가? 내가 웃긴다는 듯 쳐다보자 우영원은 한층 그 재수없는 미소를 진하게 베어물었다. "그리스가 그렇게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아. 이동네가 워낙 빡센 동네라 월드컵에 자주 못나와서 그렇지 그리스 헬레닉 리그도 꽤 쓸만하고, 기본적으로 유럽팀 경기란건 막상막하거든. 러시아 축구는 정통 유럽이라기엔 좀 뭣한 감이 있지만 그리스는 오리지날 유럽이거든" "너 잘났다" 말끝마다 제동걸려서 속이 확 뒤틀린 내가 툭- 내뱉자 우영원은 비스듬히 웃는 얼굴로 티비를 키더니 벌러덩 쇼파 아래에 쿠션을 베고 눕는다. 나이스 타이밍인지 베드 타이밍인지 티비에서는 한창 유로 2004의 분석을 위해 출전국가 선수들에 대해 떠들어 대고 있었다. 때마침 비에이라와 로이킨이 나오자 우영원은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배를 잡고 '큭큭큭큭' 웃어대기 시작했다. "왜 웃어?" "푸훗 ... 너 쟤들 별명 뭔줄 아냐?" "아니" 뚱한 표정으로 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젖자 우영원은 더욱 즐겁게 웃어 재끼며 배꼽이 빠져라 케득 거린다. 쟤들 별명이 뭔데? 비에이라와 로이킨은 우영원이 뛰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알아주는 선수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뭐가 그리도 웃겨서 웃냔 말이다. "카드캡쳐 아냐, 카드캡쳐" "에?" 카드캡쳐 체리의 그 카드캡쳐? 비에이라와 로이킨이라면 거물중에서도 거물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별명이 카드캡쳐가 뭐래. 내가 못알아 듣겠단 표정을 짓자 우영원은 벌떡 일어나 앉더니 나를 붙들고 티비를 쿡쿡 찌르며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쟤들말야 경기때 마다 카드 받거든. 옐로든, 레드든 간에 꼭 하나는 받아. 그래서 별명이 카드캡쳐야" "그렇게 따지면 너도 은근히 카드캡쳐 기질 있는거 아냐?" "쟤들에 비하면 난 세발의 피지. 하긴 쟤네보다 라치오에서 뛰는 미하일로비치가 더 대단하다만" "미하일로비치? 유고슬라비아?" 축구계의 카드캡쳐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자니 기분이 묘해진다. 이때까지 우영원이랑 매일 이야기를 했어도 한번도 축구이야기를 한적이 없다. 기껏 해봐야 제발 쌈박질 좀 하지마라가 다였으니 축구의 축자도 꺼낼 틈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진짜 이녀석도 카드캡쳐 기질이 강하다. 쓸데없이 열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저쪽에서 쳤을 경우엔 심판이고 뭐고 없이 있는 대로 난동 부리는게 우영원 아닌가. 더군다나 맞아서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할수 없는 그 엄청난 활동량까지 다양하게 말썽 부리는 놈이네. "지난 챔피언스 리그때 4분만에 옐로 카드 두장 캡쳐하면서 퇴장 당했거든" "4분?" "어, 비에이라도 로이킨도 유명한 카드캡쳐지만 미하일로비치 따라가긴 힘들지" 미하일로비치의 이야기라면 나도 언뜻 들어서 알고있다. 상대편 선수에게 침을 뱉었다는 그 개념이라곤 쥐꼬리 만큼도 없는 행동을 한 사람이다. 우영원은 퍽도 재미난지 쿡쿡쿡 밝게도 키득거리며 티비를 본다. 확실히 우영원은 남이 잘되면 배아프고, 남의 불행은 나의 기쁨이란걸 온몸으로 표현하는 인간인것 같다. 그러고 싶니. "그나저나 넌 올림픽 끝나고 어디로 갈거야?" "어디로 가다니?" 한참을 웃어 재끼던 우영원은 이제서야 다 웃었는지 나를 보며 전에없는 진지한 모습으로 질문을 한다. 올림픽은 8월 말쯤 끝나고 그쯤되면 유럽리그가 시작할걸 겨냥해서 나를 포르투칼로 에이전시에서 끌고 온건 알지만 난 어디든 축구만 할수 있는 곳이면 된다. "어디 가고 싶은데가 있을거 아냐" "별로 그런거 없어" 내가 고개를 흔들자 우영원은 끄덕끄덕 끄덕이며 인상을 찌푸린다. 뭐, 불만있냐? "딱 십센티만 더 크면 영국에 오라고 하겠는데 불안해서 그말은 못하겠다" "영국에서 누가 나 오라고 한데?" "타블로드지들은 네가 내 애인인줄 알거든 그래서 너 꽤 유명해. 오라고 하는 팀 있을지도 몰라" 지금 누가 누구애인이라는거야? 내가 눈이 휘둥그래해져서 우영원을 쳐다보자 녀석은 씁쓸하게 웃으며 모른척 딴청을 부린다. 야, 말을 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왜 입 딱 다물어 버리는거야? 어? 너 죽을래? 난 어딘가 숨겨뒀던 야구 방망이를 찾으며 우영원을 어떻게 패야 잘 팼다고 소문이 나갈까 고민에 빠져들었다. 애인 좋아하시네. "엇-" 한다리로 드리블 하면서 다른 다리로 방향 바꾸면서 전진 하는건 브라질 애들이나 하는건줄 알았다. 수영장엔 쪽 다깠기 때문에 죽어도 못간다는 우영원에게 끌려 잔디밭으로 왔다. 그런데 그냥 잔디만 있는게 아니라 하나뿐이긴 하지만 골대도 있어서 우리는 내기 축구를 하기로 했다. 여긴 사람이 없으니 만세 삼창 따위는 효과가 없으므로, 방으로 돌아가면 지는 사람이 마사지 해주기로 했다. [쿵-] 우영원을 막기 위해 대쉬한것 까진 좋았는데 녀석의 현란한 드리블에 놀라 허둥대다 다리가 엉켜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내가 땅바닥과 '안녕' 하고 인사하는 사이 우영원은 기세좋게 대포알 슛을 골대에 차 넣고는 마무리로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하는 매우 버릇없는 골세레머니까지 해보인다. "자-" 승자의 여유는 패자에게는 알량한 선심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걸 경험을 통해 알게됐다. 일어서려는 내게 내밀어진 우영원의 곰발바닥 같이 큼지막한 손을 노려보며 난 이를 으득 갈았다. 한골 먹었지만 아직 진건 아니다. 우영원이 프리미어 리그의 잘나가는 센터포워드라지만 난 녀석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 이놈의 애인이니 뭐니 하는 소문으로 유명한게 아니라 우영원 만큼은 아니라도 어디내놔서 부족함이 없는 축구실력으로 인정받고 싶다. "어쭈? 덤비냐?" 내밀어진 우영원의 손을 두손으로 잡고 바닥으로 힘껏 당기려고 하자 녀석은 여유있게 웃으며 내게 일격을 날리듯 확 나를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쿵-] 윽, 팔이 빠질듯 아플만큼 인정사정 안보고 당겨진 나는 우영원의 가슴팍에 폭 파묻혔다. 사람 살이 이렇게 땅땅하다니 역시 이놈은 인간이 아니였던게다. 부딪힌 머리가 깨질것 같다. 아파 죽겠다. "몸에 철심 박았어? 팔 빠질뻔 했잖아" 투덜투덜, 난 있는대로 투덜이며 얼얼하게 아파오는 팔 뼈를 끼워맞추듯 주무르고, 띵하게 울리는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저녀석은 몸에 철갑을 두른게 틀림없다.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말이다. 벽에 그대로 들이 받은듯한 이 통증이라니 정말 죽을 지경이란 말이 꼭 맞다. "엄살은" 아프다고 툴툴대는 내 머리를 부비부비 부비적 거린 우영원은 그래도 걱정이 되었던지 자신이 집어당긴 팔과 어깨의 이음새가 빠졌는지를 꼼꼼히 만져본다. 아프다 새꺄 만지지마. 내가 휙 몸을 돌리고 공을 채어가자 우영원은 '그래, 재롱 맘껏 부리렴' 이란 얼굴로 나를 내려본다. 네가 인간이라고 착각하지마. 넌 인간병기야, 이 용가리통뼈야. [툭] 크로스를 올리듯 높다랗게 공을 올려차놓고 골대를 향해 달려갔다. 난 현란한 드리블도 없고 엄청난 스피드도 없고 그렇다고 화려한 개인기가 있는것도 아니지만 위치선정 만큼은 자신있다. 물론, 현란한 드리블에 엄청난 스피드, 화려한 개인기에다 그것도 모잘라 위치선정에 뛰어난 신체조건을 가진 우영원이 내 상대이긴 하지만 영패를 당할수는 없다 이거다. "예쓰!" [휙] 걷어차듯 공을 찼는데 고맙게 공이 골대로 [쏙] 빨려 들어갔다. 여름인데다 수분까지 많은 이곳의 잔디는 물끼가 많아 축축하고 길이가 길어 잘못하면 넘어지기 십상이다. 우영원은 긴 잔디에 걸려서 넘어진건지 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인상을 찌푸린체로 앉아있다. 꼳꼳이 허리 세운체 펑퍼짐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익숙하다. 난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우영원은 당연하다는 듯 나를 힘껏 당겼다. "야-!" 보복은 보복을 낳는법. 복수는 또 다른 복수로 이어질뿐. 절대로 당하고 살지 않는다는 우영원은 아까 보복을 했음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해야 진정한것이라는 듯 나를 다시 한번 제품으로 당겼다. 당연히 난 힘없이 끌려갔다. 나름대로 반항의 의미로 소리를 질렀으나 이 더운날 자신을 물먹인것에 대한 진한 보복인지 우영원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덥다. "그만하자" 내등을 부둥켜 안고 놔줄생각이 없는 우영원이 먼저 그만하자고 했다. 날은 더웠고, 녀석의 품안에 있어서 더욱 더웠다. 하지만 몸은 더운데 마음은 왜 그렇게 허한지 모르겠다. 열이 펄펄 나는 외부와 달리 머리 속은 황량한듯 얼음 통을 부둥켜 안은것 처럼 서늘했다. 내 목덜미에 닿는 우영원의 숨은 뜨겁기만 했는데 위험신호를 감지한것 같은 뇌는 찬물에 넣어진것 처럼 시리고 아팠다. "놔" 기분이 묘해져 버려 본의아니게 냉정하게 말이 튀어나갔다. 결코 떨어질것 같지 않았던 우영원은 즉각 내게서 떨어졌고, 나는 조금 미안했다. 그러나 미안함도 잠시 조금 떨어져 있는 내 귀로 우영원의 이상한 맛이 나는 목소리가 속사포 처럼 속닥이는게 들렸다. "... 지가 공주야 뭐야 툭하면 [떨어져], [놔], [손떼], 만진다고 죽냐, 치사하게 굴긴" 그밖에도 기타등등 너무나 많았으나 나름대로 카리스마 우영원이라고 하니 이쯤에서 안들은것으로 치기로 했다. 정말, 만나면 만날수록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확깨는" 우영원이다. 쪽박 깨지는거 보다 더 허무하게 깨지다니. "맨날 나만 미워해-" 마지막에 내귀에 꽂힌 녀석의 말은 확깬것도 모자라서 아주 어이가 없음의 절정을 보여주는 우영원이 아닐수 없다. "이런짓 하지마" 약먹은 병아리 처럼 흐리멍텅한 내 가물가물한 시야는 감겼다, 떴다를 반복하고 있다가 기어코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뜨거운 한낮의 기온과 달리 호텔 내부는 서늘하게 에어콘이 켜져있어서 잠자기에 그야말로 안성맞춤인것도 있지만, 비행기 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와 있어서 아직 몸이 시차에 적응을 못해서 정신만 잠시 놓으면 잠이 왔다. "아니.. 저기 우리는" 그런 내가 침대에 누워 반가사 상태에서 허덕일때 우영원이 또 무슨 껀수를 잡은건지 홍부장과 성진이 형에게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버럭 소리를 지르는게 아닌, 낮게 깔리는 무서운 목소리는 소름이 오싹 돋을 만큼 무서웠지만 난 여전히 반쯤 잠에 취해 있었다. 애써 변명하는 성진이 형이 가엽다. "이러고 살고 싶어?" 시니컬한 음성이 꼬일대로 꼬여서 버릇이 없는게 하늘을 찌른다. 그 서늘한 목소리에 반쯤 깨었던 잠이 완전히 달아나버려 난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 문쪽으로 살금살금 가보았다. 우영원은 종이를 보며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성진이 형과 주원이 형에게 마구마구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끼- 익] 앗차, 한뼘쯤 열려있던 문이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열려 버렸다. 내팔에 살짝 부딪힌게 화근이었다. 이야기를 들은건 뭐 다 들리는거였으니 별로 상관이 없지만, 그게 숨어서 들었다는게 조금 걸렸다. 나쁜짓하다 딱 걸린것 같다. "일어났어?" 홍부장은 때마침 잘 되었다는듯 얼른 일어나서 나를 반겼다. 성진이형도 한참이나 어린 우영원에게 훈계를 듣는게 고역이었는지 나를 무척 반기는 눈치다. 그런데 아까 부터 암흑의 기운을 뿌리고 있던 우영원은 표정이 좋지 못하다. 뭐랄까 굉장히 조용한데 폭풍전야 처럼 위험천만하다. 먹이감을 노려보는 날카로운 맹수의 눈같다. 주위의 분위기까지 싸늘한데다, 우영원 특유의 새파란 기운이 무서움을 더욱 자아낸다. 옆에 잘못 갔다간 예리한 칼날에 베이듯 댕강 썰려버릴것 같다. "왜 멍하게 있냐?" 좀전의 냉랭한 기운은 거짓말 이었다는듯 싱긋 웃으며 내볼을 톡- 친 우영원은 맑게 웃어보이고 내 머리를 어지럽힌다. '경기보러 가자' 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도 꼬일대로 꼬였던 버르장머리 없는 목소리가 아니라 장난기가 잔뜩 뭍어있다. 지킬과 하이드 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 두둥실 떠오른다. 이중인격자. 인격파탄. "어서나와" 재촉하는 우영원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탁자 위에 놓인 신문을 봤더니 어제 나와 우영원이 잔디밭에서 논 모습이 실시간으로 담겨있다. 내가 넘어져서 녀석을 당기는 사진, 녀석이 넘어져서 나를 당기는 사진, 녀석이 슛을 성공 시키는 사진, 내가 슛을 성공 시키는 사진, 녀석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사진등등 다양하게도 찍어놨다. 민감하게구는 우영원의 행동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그보단 녀석에게 안겨있는 내모습이 너무 낯설어서 잊혀지질 않는다. 우영원의 버르장머리가 하늘을 찔렀다면, 녀석의 인기 또한 하늘을 찔렀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하는데 큰 공헌을 한 우영원은 유럽 팬들의 가슴에 도장을 [쾅-] 박아버렸는지 운동복 차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관람석을 찾기 위해 경기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주위가 시끌벅적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스 응원 한다면서" "어" "주위에 다 포르투칼 팬인거 안보여? 확 꼰질러 버린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는게 어때?" "싫어, 한번 생각한건 안 바꿔" 사람들이 우영원을 보며 휘둥그래해 지는데 반해 녀석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자리에 유유자적 앉아서 경기를 치르게 될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을 내려다 보고있다. 온통 포르투칼 팬 일색인 곳에 반란군의 수뇌부처럼 떡하니 자리차지 하고 앉아있는 우영원을 보고 있자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포르투칼 대표팀 선수는 대부분 프리메라 리그에서 뛰지?" "수페라 리그랑 프리메라 리그랑 많이 비슷하니까" 경기가 시작되자 주위는 더욱 시끄러워졌다. 그러나 그 시끄러운 사이사이 우영원이 얼굴이 전광판에 곧잘 비춰지고 있다. 까만 선글라스 넘어로 녀석의 눈동자가 보이질 않아 정확히 어떤 표정인진 모르겠지만 현재 우영원의 표정은 상당히 무섭다. 아까 화를 낼때처럼 냉랭한 표정인데 하나라도 노칠세라 경기장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그 모습이 투덜거리는 우영원이라곤 조금도 찾아볼수 없을만큼 날이 서있다. "더워.. 그리고 졸려" "졸리면 자" 아무리 하프타임 이라지만 어떻게 잠을 자냐? 정말 기본 예의란게 없는 놈이 아닐수 없다, 이 우영원이란 인간은.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우영원의 얼굴은 나와 투샷으로, 혹은 녀석 혼자서 화면을 가득 메우면서 전광판에 틈틈이 바지런히도 비춰졌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쉬는 시간이라고 하지만 졸리다고 잠자면 그건 대략 경기를 할, 그리고 경기를 한 선수들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는가. 나 오늘 여기 와있는 사람들한테 맞아 죽으라고 하는 소리지? 전광판에 자신의 모습이 나와 나란히 비치던, 혼자서 가득 메우건 말건 우영원은 경기시간 내내 경기장을 분주히 뛰어다니는 선수들의 모습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하프타임인 지금은 경기장 한켠에 나와 몸을 풀고 후반전을 준비하는 선수들을 빤히 내려다 보고 있다. 이 찌는듯한 무더위 속에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것 같은 서늘한 모습으로 자세하나 흐트러 지지 않은체, 땀 한방울 내비치지 않은체 열심히 관람중인 것이다. 표값을 아주 단단히 뽑고갈 모양이다. <우---------------------------------------드> 포르투칼의 압승을 점쳤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경기는 생각이상으로 박빙의 승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경기의 결과보다 경기가 종료하기가 무섭게, 열광의 함성을 내지르던 이들이 우영원의 주위를 둘러싸고 요상한 소리를 내고 있는게 더욱 신경 쓰인다. 끝까지 자리를 고수하고 있던 우영원은 하나, 둘 녀석에게 다가오는 팬을 보고 처음엔 바쁘게 자리를 뜰 생각이었는지, 경기장 바깥까지 나오는것은 무척 순조로웠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건지 난데없이 밀려오는 엄청난 인파에 우영원과 나는 그 무섭기로 유명하다는 유럽축구팬 속에 갇혀 버렸다. <안녕하세요, 우드> 사람들한테 파묻힌것도 모자라 카메라 까지 들이닥쳤다. 우영원은 막무가내로 몰아쳐오는 사람들의 속에서 처음엔 나를 붙잡고 빠져나갈 구석을 찾고 있었는데, 워낙 많은 인파가 몰리는지라 녀석도 어찌 할수 없는지 축구공을 받아들고 싸인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카메라를 들고 온 대단한 그에게 대답을 해주는것도 잊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인터밀란에서 우드의 영입설이 돌고 있던데요> 도대체 왜 우영원의 이름이 우드로 변한것인진 모르겠으나, 대단한 집념의 카메라맨을 제외하고, 주위에 개미떼 처럼 몰려든 사람들은 우영원을 둘러싸고 무서운 기세로 얼핏 들으면 상대팀에게 퍼붓는 야유처럼 느껴질법한 [우-------------------드]를 여전히 연발하고 있다. <그문제는 제 에이전시가 해야 할 부분입니다> 얼마전 옆집 아줌마와 맞짱 뜨던 쪼잔함이나, 어제 잔디밭에서 '맨날 나만 미워해' 라는 둥, 단지 제녀석의 신경을 거슬렀다는 이유만으로 주먹질을 일삼는 녀석의 4살난 애보다도 못한 다혈질의 성질머리와 다르게 현명하고 딱 부러지는 대답이 나와서 나는 '뜨악' 하고 놀랐다. 한국 선수들이 유럽리그로 진출해서 성과가 좀 있다 싶어서 빅리그로 가는가 기대를 하면, 때마침 인터뷰에 등장해 '꼭 빅리그로 가고 싶다' 라고 말하는 바람에 현구단에 미운털이 박혀 여지없이 경기에 출장을 못하는 등, 어설픈 말로 뼈아픈 경험을 했던것과 달리 우영원은 너무나 스무스하고 심플하게, 갑자기 들이닥친 카메라맨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것도 정상적인 말과 지극히 인간다운 면모로 말이다-!!! <유로2004의 우승팀으로 어느나라를 생각하고 있죠?> 첫번째 고난이도 문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카메라맨은 악랄스럽게도 두번째에도 매우 거시기한 질문을 던졌다. 솔직하게 자신이 응원하고 있는 팀을 말해도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지만 만약, 앞으로 우영원이 다른 나라의 프로리그에서 뛰게 될때 녀석이 거론한 나라에서는 무척 유리하게 작용 하겠지만, 거론되지 않은 나라와는 사이가 껄끄러울수 있는 확률이 다분히 높다. <좋아하는 팀이 너무 많아서 딱 누구라고 집어서 말하기 힘든데요> <그래도 어느팀이 유력할것이다는 생각은 있지 않나요?, 팀동료가 있는 프랑스라던지?> 헤에- 상당한걸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카메라맨은 나의 [휘유, 한고비 넘겼군] 이라는 안도의 한숨에 고추가루를 팍팍 뿌리듯 곤란한 질문을 연달아 해대고 있었다. 말한번 잘못하면 영원히 매장 당할수 있는 축구계이거늘 그걸 몰라서 저런식의 질문을 해대는건 아닐테고, 일부러 너 좀 당해보란 의미인가? 카메라맨의 거슬리는 질문 속에서도 우영원은 팬들의 손에서 공을 받아 들고 싸인을 부지런히 하고 있었다. <유럽팀 중에 축구가 강하지 않은 나라는 없잖아요?> 프랑스의 팬인듯한 카메라맨에게 우영원은 정갈한 어조로 되물었다. 넌 어느팀을 응원하는데? 하고 우회적으로 돌려서, 그러나 카메라맨 또한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축구라는게 프랑스가 일본에게 5:0 으로 이겼다고, 일본을 2:0 으로 이긴 한국이, 프랑스에게 3:0 으로 지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과학적인 스포츠 중에 하나라고 불리는 축구이니 딱히 이게 최고야라고 할수가 없다. <이번에 소속팀이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했는데 본인의 공헌도는 얼마라고 생각하죠?> 씨발-, 나는 우영원이 왜 그토록 성격이 거칠어졌는지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말끝 하나하나에 독기가 서린 저런 질문을 해대니 피곤에 쩔은 선수들이 말 한마디 잘못 던지면 그걸 옳다구나 라며 기사로 써서 한사람 병신 만드는 일이 다반사이니 어찌 성격이 좋아질수 있겠는가. 여기서 '나 참 잘했어요' 하면 뻔뻔한 놈되는거 딱이고, 그렇다고 '나 별로 한거 없어요' 이러면 바보되는거 한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정도쯤 되면 우영원의 주먹질이 나와야 하는데 녀석은 묵묵히 팬에게 싸인만 해주고 있다. <그 팀의 일원이었다는게 제겐 영광입니다> 호오, 대단하군 이라는 감탄이 절로 흘러 나왔다. 따지고보니 우영원이 그라운드에서 주먹을 내질렀던건 상대편 선수가 자신에게 신체적, 물리적으로 힘을 가했을때 였을뿐 신경전에 휘말려서 폭력을 일삼은적은 없었던것 같다. 더욱이 어찌보면 공식적인 이런 자리에서 인터뷰라는건 피해갈수 없는 관문이니 우영원에게 밥 먹는것보다 쉬운일 인지도 모른다. <옆에 있는 남지웅 선수와 사귄다는 열애설이 났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죠?> 딱 멈췄다. 숨이 딱 멈췄다. 우영원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사람들의 요동침이 일순간 가라 앉았다. 난 눈을 질끈 감을 준비를 했다. 카메라맨 너 이제 죽었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영원의 입꼬리는 삐딱선을 타고 뭔가 일격을 터트릴것 같기만 한 분위기를 연출할 뿐, 이상하게 주위는 여전히 잠잠하기만 했다. <흐음-> 심각한 표정으로 한숨을 지어보인 후, 얼굴로만 활짝 웃어보이더니 우영원은 카메라맨을 한번, 나를 한번, 번갈아 보더니 이번에는 목넘어로 살짝 키득인다. 너, 뭔짓 하려고 그래. 불안하게 눈을 굴리고 있는 그 순간, 내 머리 위로 우영원의 체취가 떨어진다. 공기를 새파랗게 물들이는 시원한 체취가 온몸을 휘감는다. 녀석의 품에 폭- 안긴 자세가 된 나는 지금 이상황에서 우영원을 밀쳐야 정상이란걸 알지만 너무 꽉 안겨서 발버둥은 커녕 옴짝달싹을 할수가 없다. <어떤거 같아요?> 내게서 [팍-] 떨어져 나온 우영원이 [휙] 돌아보며 묻자 카메라맨을 위시 주위의 모든사람이 얼어붙었다. 심지어는 나까지도. 이인간이 죽을때가 됐나, 민감한 사안을 들먹인 카메라맨을 반쯤 죽여도 오늘은 좀 그나마 힘덜썼군 할텐데 장난하듯 되받아 치다니. 미쳤구나!!! <그럼, 이만-> 멍해져 있는 카메라맨의 카메라를 향해 손을 한번 들어보인 우영원은 내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안더니, 얼어붙은 사람들이 패닉 상태에 빠진 틈을 이용해서 인간 방패막을 유유히 뚫고 나와버렸다. [뚜벅뚜벅뚜벅] 다리는 열심히 걷고 있는데 내 머리 또한 저기에 남겨진 그들과 마찬가지로 뇌회전을 정지한 상태였다. "진짜에요?" 호텔에 돌아온 순간 탁자로 득달같이 달려가 신문을 가득 메우고 있는 빡빡한 영문을 내멋대로 해석해서 읽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상한 말을 봤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영원이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신문을 몇번이나 들여다 봐도 그 문장은 여전히 그자리에 있었다. 어설픈 영어실력이지만 그정도는 읽을수 있다. 그러나 그걸로는 도저히 확신이 서질 않아 우영원의 매니저인 성진이 형을 붙잡고 신문을 하듯 다그쳤는데 너무나 뜻밖의 말을 들었다. 난 내귀를 의심했다. "너랑 ... 그 ... 두번째로 그... 음음, 그라운드에서 그거 한날 직후에 한 인터뷰에서 그랬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아, 도대체 사내놈한테 왜 주둥이 박치기를 하는지 그놈은' 이라며 성진이형은 자신의 선수를 나무랐다. 형이 어색해서 죽으려고 하는데도 나는 도저히 믿기질 않아서 묻고 또 묻고있다. "우영원이 나를 좋아한다 그랬다는걸 날더러 믿으란거에요?" "아, 그랬다니깐. 나도 그녀석이 내앞에서 그렇게 인터뷰 해서 깜짝 놀랐었어" 상암에서 처음 그일이 있었던때에 우영원은 분명히 어시스트를 해준게 나였기 때문에 내게 와서 골세레머니로 키스한거라고 잘라 말했다. 그랬었는데, 두번째 키스를 한건 단순 골세레머니가 아니라 [따지고 보면 골을 넣은것은 나 였으니 녀석은 세레머니를 할 필요가 없다] 나를 좋아해서 그런거라고 했단다. 지금 그게 말이 되냐? 누가 누굴 좋아한다고? "한국에서 그런 이야기 본적 없는데" "그거야 회사에서 워낙 손을 써놨으니 그런거고, 외국에는 손을 써놔도 다 빠져나가거든" 거짓말이죠? 라는 눈길로 성진이 형을 바라봤지만 형은 그저 머쓱해 할 뿐이다. "그녀석이 너를 얼마나 아끼는데, 애정결핍증이라서 지가 좋아하는거에는 대놓고 애정 들어내잖아. 너한테 하는거 좀 봐. 밥 먹을때도 한술 떠보란 얘기도 안하고 제밥통만 채우는게 그놈인데, 너 먹인다고 영양식 꼬박 꼬박 하는거며, 말을 안해서 그렇지 우린 너 잘때 숨도 살살 쉬어야 돼. 시끄럽게 하면 영원이 표정이 어떤줄 아냐? 아주 우릴 못죽여서 환장한 놈 같다니까" "무슨얘기해?" 성진이 형이 조근조근 우영원의 만행을 파헤치고 있는데,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고 우영원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다. 난감, 난처해 하던 성진이 형은 우영원이 들어오는 걸 보고는 얼른 어디론가 피신을 가버린다. 형이 바삐 어디로 가버리자 우영원은 뭔가 낌새가 이상하단걸 눈치 챘는지 말 없이 가만히 있다가 한도 끝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답답한지 질문을 한다. "입 붙었냐? 무슨얘기 중이였는데 그렇게 말을 못해?" 나는 알고 싶지 않다. 우영원이 나를 왜 끌고 가서 강간했는가를. 막연한 두려움 때문일수도 있고, 지내고 보니 나쁜녀석이 아닌 이녀석과 다시 껄끄러워지는것도 싫고, 구태여 다시 이야기를 꺼내서 녀석을 코너로 몰아 붙일 필요가 있을까 해서 이기도 하다. 강간은 나쁘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쁜이유는 피해자를 보는 주위의 눈길이 불손하고, 경망스럽고, 비열하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가 있으니, 그럴만 하니까, 얼마나 어찌했으면 이라고 사람들은 가해자를 욕하고, 후에 피해자도 함께 몰아 세운다. '어떻게 인간으로 그런짓을' 이라고 말한 뒤, 그래도 피해자가 어떠했으니 그랬겠지라는 식으로 둘러치는 일이 다반사이다. 하지만 우영원이 내게 온전히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했으므로, 사과했으므로 그것으로 되었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그 사과는 몽땅 거짓이었을 수도 있다. 녀석은 그저 화가 나서, 속이 상해서, 앙심을 품고, 독한 마음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나를 얼르기 위해 그냥 해본 말일수도 있다. 더욱이 우영원이란 인간이 나를 좋아한다면 나의 엉킨 마음을 풀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일도 없었을 것이다. "너 나 좋아해?"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몰랐는데 마음은 모른척 하고 있지만 입은 그보다 좀더 솔직했는지 가장 궁금한 질문부터 냅다 물어본다. 그 사과가 진심이었는지가 더 중요하건만 어째서 난 녀석이 나를 좋아하는지가 더 궁금한걸까. 내 갑작스런 질문에 카메라멘과 악독스런 인터뷰에서도 눈하나 깜짝 하지 않던 우영원의 인상이 돌처럼 딱딱히 굳어간다. 그런 녀석에게 나는 '아니지?' 하고 눈으로 다그쳤다. "좋아해" "뭐?" "좋아해" "농담마" "농담아냐, 진짜 좋아해" 우영원의 이상한 맛이 나는 목소리는 참 재미있다. 귀에 엉기면서도 질감이 특이한 그 목소리는 참 듣기가 좋다. 그런데 그 독특한 목소리가 내게 '좋아해' 라고 말을 하는 순간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는 나를 좋아해서 강간한 걸까? 아니면 좋아하게 되서 강간한걸 미안해 한걸까? 실상 너는 강간에 대해서 여전히 고압적인 자세일까? 우영원이 내게 건내었던 유리알 같은 신뢰가 산산이 부서진다. "왜?" 물어야 할 질문은 언제부터? 인데 내 입은 내 머리를 다시금 배반하고 내 마음의 소리를 내뱉었다. "좋아하는데 왜가 어딨어. 그냥 좋으니까 좋은거지" 좀전까지 불편한 기색이 영력했던 우영원은 나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을 한다. 뻔뻔하다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너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네가 한 사과는 다 거짓이고, 녀석은 그저 처음에 봤던 그 오만불손한 우영원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조금 친구라고 생각했던 믿음이 산산조각 부서져, 바람에 날려가 버린다. "좋은데 왜 그랬어?" 그래, 좋은데 왜 그랬어? 아, 그때는 좋아하질 않아서 그랬었나? 그럴 확률이 높겠군. 그렇다면 넌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는데? 아니면 아주 작정하고 나를 뒤따라와서 강간하고, 해놓고 보니 이게 아니다 싶어서 전략을 바꾼거였어? "그때는 나도 내가 널 좋아하게 될줄 몰랐어, 네가 누군지도 몰랐어, 그런짓을 한건 정말 미안해" 우영원이 처음에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시시콜콜 제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진정 반성했다고 두번째에 미안하다고 말을 했을때는 믿어 버렸다. 믿지 말걸 그랬다.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내가 바보인것 같다. 사고 쳐놓고 사과 안하는것도 되먹지 못한거지만, 배후가 불유쾌한 사과라면 받고 싶지가 않다. "미안하다고?" "그런짓을 한건 나쁜짓이라는거 이제는 확실히 알아. 너인줄 알았던, 몰랐던 그런짓을 하면 안된다는거 이제는 정말 알아. 내가 널 좋아한건 지난 겨울 이후부터야. 그땐 ... 그땐 아니였어. 내가 널 좋아하는데 왜 그런짓을 했겠어? 내가 너한테 그런짓을 했던 안했던, 나는 널 좋아했을거야. 그일하곤 상관없어" 찌푸려진 인상이 펴지질 않았다. 입을 꽉 다물고, 쉼호흡을 길게 한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팀에서 녀석을 처음 본 날처럼 우영원이란 존재를 무시하고 그옆을 관통하듯 지나쳐서 내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머리 속이 꼬이는 것 같다. [달칵-] 문소리가 들렸다. 태생이 한국이라서 그런지 침대보다 바닥을 더 친근하게 생각하는 내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벽과 다정히 대화를 하려하는데 누군가 다급히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는 돌아보지 않아도 안다. 흑표범 처럼 늘씬하고 단단한 몸을 가진자가 녀석말고 누가 또 있을까. 그런데 이율배반적이게도 나를 따라 들어온 녀석에게 안도하면서도 화가 난다. "왜 좋아해?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 나를 덮친사람이 우영원이 아니였다면 난 녀석의 고백을 어리벙벙해 하면서도 조금은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았을런지도 모른다. 나는 남자였고, 어디가서 체력적으로 결코 비리비리 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건아임에 틀림 없지만, 함께 있으면 재밌고, 나를 위해 웃어도 주고, 서로 같은것을 좋아하는 그런 우영원이 내게 좋아한다고 말했다면 배신감이나 거부감이 들긴 했겠지만 사람을 좋아하는게 나쁜건 아니니 그럴수도 있다고 긍정적으로 검토해 봤을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녀석은 알았던 몰랐던 길을 가는 행인을 아무 이유없이 채가서 겁탈했고, 그후에 봤을때 전혀 반성도 하지 않았으며, 이제는 했던 사과조차도 그저 나의 환심을 사기위해 둘러대듯 말한게 아닐까 의심이 드는 상대다. 나는 녀석이 싫다. "왜 좋아하냐구?! 솔직히 그건 나도 몰라. 누구는 좋아하고 싶어서 좋아하는 줄 알아? 그냥 좋은걸 어떻해? 좋아하는게 '넌 남지웅을 좋아하게 될거다' 라고 전날 밤에 예고하고 좋아하게 되는줄 알아? 남지웅, 그런 질문이 어딨어. 왜 좋아 하냐니- 화가 나? 너만 화나? 나는 뭐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아? 맨대가리 망치로 한대 맞은것 처럼 황당해서 나도 화가 나. 눈뜨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네가 막 좋은걸 나보고 어쩌란 말야. 뇌를 뜯어낼까? 어느날 정신 차려보니 남지웅이 좋은데, 좋아서 좋아하는데, 좋아하는것도 안돼?" "안돼" 너는 안돼. 차라리 예전처럼 나를 무시하고 깔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상대인것처럼 생판 남처럼 대해. 그게 편해. 그게 좋아.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네가 했던 사과도, 배려도 모두 그저 내가 좋아져서 잘 보이려고 한거에 불과한게 되는게 너는 참 좋겠다? "남이 경험한 것을 똑같이 느낀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능력이지. 개미는 .. 두려움이나 즐거움이나 분노를 느끼게 되면, 호르몬이 바깥으로 나가 다른 개미들의 몸 안으로 까지 들어가게 된대. 덕분에 개미들은 한 마리가 소리치려 하거나 울려고 하면 수백만의 개미가 동시에 같은 상태가 되어, 남들이 경험한것을 똑같이 느낀대. 자신이 느낀 것을 남이 똑같이 느끼게 한다는 거지. 한마리도 아니고 수백만의 개미를 같은 감정으로 몰아 넣을수 있다는데, 너랑 나는 이렇게 같이 있는데도, 겨우 둘뿐인데도 서로의 감정에 대해 눈꼽만치도 몰랐네. 나를 좋아한다고? 난 그런거 몰라. 네감정 따위 난 몰라. 너 역시 마찬가지야. 네가 싫고, 네가 밉고, 널 죽이고 싶고, 널 저주하고, 너를 혐오하고, 너를 끔찍하게 여기는 내마음이 너한테도 안전해 지지? 울고 싶고, 소리치고 싶고, 비참하고, 죽고 싶고, 괴롭고, 짜증나고, 한없이 내가 멍청하게만 느껴지는 이 개같은 기분 너도 모르지?" "미안하다고, 그건 내가 정말 ... " "이젠 네 사과 듣는것도 지겨워. 그게 진짠지, 가짠지 알게 뭐야. 어느날 갑자기 눈을 떠보니 또 다시 나를 강간하고 싶을지, 그딴 사과 조금도 마음 안쓰고 입에 발린 소리였을지 어떻게 알아? 네가 내쉬는 공기, 내가 들이마시는 것도 끔찍해. 누굴 좋아하는데 자격 같은건 없다지만, 양심에 대고 물어봐. 네가 날 좋아할 자격이 있는지" 차라리 농담이었다면 좋겠다. 좋은 친구라면 이해라도 해줄수 있지. 좋아한다고. 그걸 지금 나더러 받아들이라는건 아닐테고, 받아들일수도 없지만 자신이 나를 좋아한다는게 사실이란걸 너무 순순히 공표해 버리는 우영원이 너무나 기가 막혀 난 앞뒤가 전혀 맞지 않은 소리를 질러버리고 생판 처음온 포르투칼에서 세상 살면서 처음으로 가출이란걸 시도했다. 날은 후덥지근하고, 태양은 내리쬐고, 바람은 따끈하고, 눈앞은 찬란한데, 눈부시게 멋진 녀석에게 고백 받아 놓고도 한없이 억울해서 뜨끈뜨끈 열이 오른 길바닥을 걷고 있는 내현실이 눈물겹다. <일본인?> 구릿빛 피부, 오똑한 코, 쌍커플 진 눈, 훤칠한 키의 남자가 말을건다. 이런 사양(?)으로 생긴 남자 몇명이 나를 보며 수근거리고 있는걸 봤는데 뭔가 할말이라도 있는 모양인가 싶었더니 국적을 물어본다. <한국인이야> <아.. 미안> 미안할거 까지야. 남자와 어울려 있던 사람들은 내가 말을 하는걸 보고 이리로 다가온다. 타국, 거기다 어딘지도 잘 모르는 곳에서 현지인이 몰려오는건 그닥 반갑지 않다. 무슨 꿍꿍이인가 불안하게 쳐다보는 내게 그들은 생긋 웃어보이며 축구공을 내보인다. 나는 관광와서까지 축구할 팔잔가보다. <같이 할래? 한명이 모자라서 그러거든> <그래> 영어를 알아듣는거야 어렵지 않다. 대답이 문제라서 그렇지. 축구라면 말이 필요 없겠지. 운동이란건 그래서 재밌다. 나의 심플한 대답에 그들은 갈린 편을 설명해 주고 곧장 경기를 시작할 요량이다. 심판도 없고, 경기장은 잔디밭 뿐이라 선도 없지만 공 하나와 골대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다. <엇, 칼- 왠일이야?> 한참 경기 중이였다. 뛰고 있는데 공을 몰고있던 귀염성 있게 생긴 녀석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멀리서 오는 남자에게 손을 흔든다. 땀도 많이나고, 숨도 차고해서 쉬게 됐으니 좋구나 하고 있는데 귀염성 있게 생긴 녀석의 친구인듯한 막 온 '칼' 이라고 불린 남자가 나를 보고 움찔 놀라더니 갑자기 주머니에서 전화를 빼내어 다급히 번호를 눌러댄다. <야, 얘 잡어> <응?> <잡으람 잡어!> 전화를 귀에 댄체로 나와 축구를 하고 있던 녀석들에게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는데 포르투칼어라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어쩔줄 몰라서 눈치만 보고 있던 녀석들이 하나둘 내 주위를 감싸더니 내 손을 턱 쥐고는 'I am sorry' 라는 얼토당토 않은 말을 내뱉곤 놔주질 않는다. <뭐하는 거야?> <글쎄, 내친구가 널 잡으래> 짜증스럽게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녀석들도 미안은 한지 대단히 송구스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들의 대가리가 저기 있는 칼인지 도마인지 하는 놈인지 놔줄 생각은 없어보인다. 날도 덥고, 열나게 뛰어서 반항할 힘도 없어서 난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래도 화가나는건 어쩔수가 없다. 씨발, 뭐하는 짓들이야. <야, 그늘로 가자> <그래..... > <도망안가> 그늘로 가자는 내말에 뭔가 못미더워하는 녀석에게 난 포기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도망 나온처지인데 또 어딜 도망을 가겠나. 무척 겉늙어 보이는 칼이란 녀석은 전화에 대고 무어라 무어라 말이 많다. 거참, 되게 따따부따 하는 놈이구만. 무슨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나와 관련이 있는것은 틀림 없는것 같다. 땡볕에 서있다가 그늘로 오니 한결 나아져 눈을 감았다. <너, 너무 빠른거 아냐? 어떻게 한시간 거리를 십분만에 온거야? 날아왔어?> <........> 그늘에 앉아 있은지 얼마쯤 지났을까. 누군가 내가 있는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 상대에게 칼이란 녀석이 따따부따 더럽게 말많은 놈답게 한마디 했지만 주위는 고요하기만 하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지금 눈앞에 누가 와있는지 알수 있다. 사람이 하나, 둘 떠나는 기척을 느꼈지만 잠이든것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눈으로 보지 않아도, 단지 숨소리 만으로, 주위에 흐르는 공기의 요동침 만으로 내 눈앞에 우영원이 와있음을 알수 있다. 그렇게 우영원은 내게 깊히 각인되어 있으므로. 단지 느낌만으로도 녀석이 곁에 있다는 것을 나는 알수 있다. "자는거야?" 설마. 내가 이 더위에 야외에서 잠잘정도로 둔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우영원의 질문에 대답대신 조용히 눈을 떴다. 아무도 없는 그늘 진 나무아래 불안함으로 가득찬 얼굴로 우영원이 서있다. 많이 바빴는지 그토록 열심히 챙겨 쓰는 선글라스도 없는 모습이다. "나이가 몇갠데 가출을 하냐?" 겨우 반나절 나와있는걸 가출이라고 할수 있나? 불암함과 떨림 그리고 한없이 긴장한 우영원이라니 살다 보니 별걸 다보는군. 내표정은 어떨까. 잔뜩 얼어붙어서 녀석을 혐오하는 눈길로 보고 있는건 아닐까, 혹은 저깊은곳에 꽁꽁 숨겨둔 두려움이 표면위로 떠올라 넘실거리고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 가자" 말없이 뚫어지게 우영원의 얼굴만 빤히 쳐다봤다. 막무가내에 툭하면 주먹질 삐뚤어질대로 삐뚤어진 잔뜩 꼬인 녀석.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외롭고 혼자인게 싫어서 투덜투덜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애정결핍증 환자에 이중인격에 성격파탄, 인격파탄에 은근히 멍청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 모든걸 가릴만큼 많은걸 가졌다. 의외로 사람과 잘 사귈줄도 알고, 세계적인 축구선수에, 잘난 얼굴에, 돈도 많지, 몸매도 좋지, 외국어에 능통하지, 결정적으로 웃는 얼굴이 끝장나게 멋지기까지한 복도 많은 놈이다. "너 안좋아할게 그러니까 제발 가자. 형들 걱정해. 지웅아- 응? 어서 가자" 내참 기가 막혀서. 일방통행도 저런 바보 멍텅구리같은 일방통행이 또 있을까. 실컷 좋으니까 좋아하는걸 어쩌라는거냐고 화냈다가 그런거 안된다고 하니까 금방 돌아서서 안좋아할게라는건 또 뭐야? 남자가 줏대라고는 요만큼도 없네. ".... !? .. 어 ... 야 ...!? 왜 울어" 눈물이 난다. 이유는 없다. 한번도 우영원 앞에서 운적없다. 의식하지 못한체 울어는 봤을지 언정 억울해서, 서러워서, 슬퍼서 운적은 한번도 없다. 심지어 혼자 있을때에도 덜덜 떨기만 했지 무섭다고, 두렵다고, 고통스러워서, 걱정이되서 목놓아 울어 본적은 한번도 없다. 그런 내가 울고 있다. 뚝, 뚝 옷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는데 그게 내 눈물인가 보다. 톡, 톡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물방울이 내 눈물인가보다. 소리 없이 시작한 눈물이 점점 흐느낌으로 바뀌고, 흐느낌이 엉엉 우는 소리로 바뀌는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나는 너무너무 억울한듯 울어대고 있었다. 소리를 엉엉내면서 울고있는 나를 어찌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으로 보고있는 우영원을 한껏 노려봐주며 엉엉 울어주고 있다. "뭐가 또 문제야. 왜 우는건데. 네가 울어도 나는 너한테 해줄수 있는게 하나도 없어. 울지마-" 우영원은 울지 말라는데 난 그말에 반항하듯 엉엉 더욱 큰소리로 울어버렸다. 세상 모든 사람을 좋아하게 되더라도 너만은 안좋아할거라고 생각했다.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게되도 너하나는 평생을 증오하고, 저주하고, 혐오해줄거라고 했다. 그런데 우영원을 다시 보는 순간 머리가 내게 나직히 말한다. '난 우영원을 좋아해. 굉장히. 많이. 아주아주. 많이.' 사랑이, 좋아하는 감정이 이렇게 도둑놈처럼 불쑥 찾아오는건줄 알았다면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는 어떤이의 말에 그렇겠지라고 동조 해주지 않았을거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던 친구에게 '좋아한다라 ... 그게뭐야?' 라고 묻자 그친구는 그렇게 말했다. '누구 좋아해본적 없지?' 난 그렇다고 대답했고, 녀석은 웃으며 대답했다. '사랑해본적 없는 사람에게 사랑에 대해서 말하려는건 귀머거리에게 노래 불러주는거랑 같은거야, 경험하면 알게돼' 그말은 사실이었다. 이유는 없다. 그저 불쑥 우영원을 좋아한다고 마음이 말할 뿐이다. -좋아한다는것, 끝-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한국사람, 한국것, 한국과 연관된 것이라면 티끌 같은것 조차도 신경을 쓰게 된다고 말이다. 무리 속에 있을때는 외국에 있어도 한국 사람이라는걸 크게 자각해 본적이 없다. 같은 팀원들이 모두 한국인이니 국내에서 고립되어 연습할때나, 외국에 원정 갔을때나 다를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의 혼자 외따로 외국에 뚝 떨어져 있으니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너, 인터뷰 좀 제발해라. 응? 야, 남지웅-" 8월의 올림픽은 대단했다. 그런데 그 대단한 올림픽도 머리 속에 핵폭탄이 펑- 하고 터진듯한 나의 복잡한 심경 때문에 즐겁게 즐기질 못했다. 단지 내가 다시금 확인한것은 우영원은 포르투칼 뿐 아니라 그리스에서도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는 것과, 그런 우영원을 내가 무의식적으로 빤히 들여다 보고 있다는것만 확인했다. "인터뷰를 왜해야 하는건데?" 올림픽이 끝난직후 유럽리그의 여름 이적시장에 참가한 나는 포르투칼의 프로리그인 수페라 리그의 팀과 계약을 했다.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끝나버린 올림픽도 생각보다 너무 허무하게 지나가 버렸지만 아마에서 프로로 데뷔하는 순간도 너무나 심심하게 지나가 버려서 벌써 날은 스산한 겨울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지대한 문제가 있으니 프로데뷔 3개월차임에도 여직 제대로 된 인터뷰를 한번도 해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왜라니! 너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한테 너를 알릴수 있고, 너의 의사를 외부에 표출할수 있는 길이니까 그렇지. 적응하면 인터뷰 하겠다며. 언제 적응 다 하는건데, 평생 아주 적응만 할거야?" 유로2004기간과 올림픽 기간 내내 난 우영원을 피해 다녔다. 포르투칼에선 경기를 관람할때건 아닐때이건 나의 매니저가 된 이삭이 형과 늘 붙어다녔다. 그리고 올림픽때에는 그보다 더 심하게 우영원을 피해 다녔다. 한번 도망자는 영원한 도망자인건지 난 방도 바꿔버렸고, 심지어는 뛰는 포지션도 윙에서 조금 내려간 자리인 윙백으로 바꿔버렸다. 그렇게 피해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눈은 항상 우영원을 담고 있었고, 머리는 늘 녀석을 떠올리고 있어서 떨어져 있었음에도 떨어져 있었던것 같지가 않다. 실상은 지금도 우영원의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홍부장이 뭐래?" "홍부장이 뭐래는게 아니라 기자들이 아주 날 볶아 먹으려고 한단말야" 테이블을 탕탕 치면서 아주 죽겠다는 형을 보며 난 한숨을 내쉬었다. 카메라 공포증은 아닐거다. 내가 한 경기가 포르투칼 전역에 주말마다 생중계로 방송 되는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과 마주할 마음이 없다. 홍부장은 적응하면 인터뷰하겠다고 하자, 그러라고 하면서 인간은 사회적인 생물이니까 금방 괜찮아 질거다라고 했는데 난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난 나 스스로를 고립 시키고 있다. 꽁꽁 문을 걸어 잠그고 '나 건드리지마' 라는 기운을 풀풀 풍기며 웅크리고 있다. "형 잘 안씼어서 맛없다고 잘 설득해봐" "야!" 사람들과 말할 생각이 없다. 들을 말도 없고 해줄 말도 없다. 내안에 내가 갖혀서 주위를 황망히 관조하듯 볼 뿐이다. 다만 축구하는 순간에만 살아나는 생물인지 프로무대에서 열심히 잘 적응하고 있다. 타국에서의 생활은 외롭고, 슬프고, 서럽고, 우울하고, 혼자일때면 한없이 시간이 더디다. 그렇게 지리하고 지루하면서도 매니저인 이삭이 형과 쓸모없는 일회성 이야기를 나눌뿐 진지한 이야기를 한번도 해본적이 없다. 기자에게 말하지 않으려는것고 같은 이유에서다. 혹 말을 내뱉으면 내안에 숨겨둔 무언가가 털려나올까봐 난 내가 말하는게 두렵다. "나 너무 불쌍하지 않냐? 알고보면 네가 우영원놈 보다 더 빤질빤질해. 어떻게 그렇게 고집이 똥고집인지, 죽어도 말 안듣지. 요즘 젊은(?)애들은 하여간 이래서 안된다니까 " "누가 들으면 형은 아주 늙은이 인줄 알겠다, 나이차도 얼마 안나면서 젊은애는 뭐야" 유럽리그는 주말에는 국내 경기를, 주중에는 챔피언스 리그를 병행해 가면서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포르투칼 자국내에서 하는 경기가 약 30경기를 조금 넘고, 챔피언스 리그는 성적에 따라 경기수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우리팀은 예선을 거치지 않고고 32강에 직행을 했는데 조만간 본선 2라운드 4차전 경기가 있을 예정이다. 상대팀은 다름 아닌 프리미어 리그 현재 랭킹 1위인 우영원이 속해 있는 팀이다. <헤이- 지웅아, 왜 엎드려 있어?> 주말마다 빠지지 않고 경기에 출전했고, 지금껏 있었던 챔피언스 매치업에도 매일 출전을 해서 내가 유럽리그에 와서 펼친 경기는 10경기가 조금 넘는다. 그런데 나보다 몇년이나 일찍 유럽에 진출해서 그 어렵다는 영국내 정규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거머쥔 우영원은 내가 한 경기의 10배 이상으로 많은 경기를 뛰었다. 같은 유럽에 있으니 한번은 만나리라 생각했지만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줄 몰랐다. <아픈가봐> <에? 아프다고? 지금까지 경기에 한번도 빠진적 없던 얘가 아프다고?>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온 팀에는 그언젠가 가출을 했을때 만났던 따따부따 말이 엄청 많았던 칼이란 녀석이 있었다. 브라질 출신이라는 이녀석은 축구감각이라던지 센스라면 따라올자가 없을 정도지만 말 역시도 팀내에서 가장 많다. 저입을 꼬매 버리고 싶다. <너 스타팅에서 빠지려고 수작 부리는거지?> 속이 다글다글 끓는다. 도대체 감독님은 나의 어디가 그렇게도 마음에 드신건지 데뷔 무대를 제외한 모든 경기에서 난 스타팅이었다. 고마워해야할 처지이지만 오늘은 정말 사양하고 싶다. 우영원은 패널티에 꽂혀서 가만히 있는 타켓맨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그라운드내를 뛰다 보면 어쩔수 없이 부딪힐수 밖에 없다. 녀석의 얼굴만 보면 심장이 간질간질해서 참을수가 없는데 마주보고 경기를 뛰어야 한다면 그건 날더러 나가 죽으란 이야기다. <수작아냐> <그럼 계략이야?> 제래미가 칼과 토닥토닥 싸워대길래 내가 중간에서 끊어먹고 수작이 아니랬더니 칼은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아니면 오늘 안그래도 말많은 녀석이 말빨이 더욱 증가하는 탄력제라도 복용한건지 탁,탁, 잘도 말을 받아친다. 칼의 '아픈척 하는것 일뿐 실상은 엄청 튼튼하다'는 음모론을 뒤로 하고 지금까지 꾸준히 경기에 나갔으니 오늘은 조금 쉬라는 의미에서 제외한다는 감독님의 말을 듣고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드가 지난 시즌에 30경기 출장해서 33골 넣었다는데, 이번 시즌에 지금까지 10경기 출장해서 12골 넣었대. 저거 완전 괴물이지 않아? 너랑 친하댔지? 인간이긴 한거야? 쟨 뭐 먹고 산대?> <인간일거야 ... 아마도> 30경기에서 33골도 놀라운데 10경기 출장해서 12골을 넣었다라, 그게 인간이냐 괴물이지. 그나저나 저번 시즌에 30경기에 33골이면 우리집에 오기 직전인데 그런 성적을 낸 녀석이 나한테 그런 구박을 당하고 살았다는걸 생각하니 머리가 울렁 거린다. 하여간 알수가 없는 인간이 우영원이다. 몇달만에 다시 본 우영원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동료들과 잘지내는것 같았고, 경기도 끝장나게 잘 소화하고 있는것 같다. 나를 보고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것만 뺀다면 우영원은 언제나 흔들림 없이 제자리에 서있는 그 우영원의 모습 그대로였다. <지웅-> 우리팀 감독님은 스페인 리그에서 알아주는 팀의 감독 아래에서 코치를 하신 분으로 현재 포르투칼 내에서 굉장히 각광을 받고 계신분이다. 얼마후엔 프리메라 리그에 진출을 하실수도 있을거라는 평가를 들을만큼 훌륭하시고, 팀을 이끌어 나가시는 모습도 굉장히 카리스마 있으시다. 그런 감독님이 운동장 근처를 왔다 갔다 하다가 조용하고, 나직하게 나를 은근히 불렀다. 물론 난 못들은척 경기를 보고 있는척 외면을 할 셈이었다. <준비해> <감독님> 포르투칼어는 이삭이 형에게 매일 조금씩 배우고 있다. 그것뿐만 아니라 영어와 스페인어까지 배우고 있다. 이삭이 형은 홍부장의 직속부하로 유능하고 재주가 많았지만 사람이 너무 좋았다. 우영원녀석과 딱 두달 있었는데 이삭이 형이 두손 두발 다들고 홍부장한테 아프리카로 보내도 좋으니까 제발 우영원 놈에게서 떨어지게 해달라고 싹싹 빌었다는 후문이 돌 정도로 사람이 너무 좋았다. <볼 배급이 잘 안되고 있으니 나가서 오른쪽 측면에서 크게 크로스를 휘둘러> <감독님> 오늘은 쉬게 해준담서요!!! 내가 항의 뜻으로 감독님을 부르자 감독님은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운동장을 가르켰다. 현재 운동장은 아주 처참한 상황이다. 우리팀은 전적으로 수비만 하고 있고, 상대는 다 삼켜버릴 기세로 공격만 하고 있다. 같은 유럽리그의 팀이라지만 전통의 강호라는건 아무에게나 갖다 붙이는 이름이 아니다. 네가 양심이 있으면 지금 경기에 나가야해 라고 눈길을 주는 감독님의 얼굴에 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어코 마주보고 서야되는군. <잘해-> <수고했어>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래도 그나마 나은것이 이곳이 우리팀의 홈이란 점이 위로할만한 사항이다. 한국에서는 일본 프로팀에서 뛰고 있는 한국 선수가 한국의 프로팀과 맞붙기 위해 그라운드에 나올 경우에 같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격려를 해준다. 그러나, 유럽은 얄짤 없다. 보통의 경우 자국선수라 하더라도 외국리그에서 뛰고 있는 그 선수와 자국리그의 팀과 맞붙게 되면 자국리그의 팀을 응원한다. 오히려, 외국리그에서 활약중인 선수에게 야유를 퍼붓는다. 난 홈팬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교체 되었다. 앞날이 깜깜하다. "헉 .. 헉 ... 헉 ....." 푸우- 난 인상을 마구 그려댔다. 내가 맡은 오른쪽 윙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상대편 주장 때문에 폐가 찢어질것 같다. 공을 몰고 앞으로 좀 나간다 싶으면 [꽝-] 하고 부딪혀 오는데 오늘 몇번을 바닥에 구른지 모르겠다. 특히 마음에 들지 않는점은 원래 뛰어가는 선수와 서있는 선수가 부딪히면 서있던 선수가 넘어지는게 정상이다. 헌데, 난 뛰어가고 상대는 나를 막고 서있었는데 부딪히면 내가 나뒹굴고 있었다. <지웅아, 괜찮아?> 넘어진 내가 못내 안쓰러운지 우리팀 센터포워드인 페나가 다가와 일으켜 세우며 걱정스레 묻는다. 아, 이봐 뭘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보고 그래. 애들은 원래 맞으면서 크는거라고. 심판 앞에서는 교묘하게 보이지 않도록, 심판이 없을때는 대놓고 힘으로 누르는 상대편 주장은 단단한 근육질의 카리스마가 왕창 있어뵈는 흑인선수다. 아주 무서워 죽겠다. <괜찮아> <힘내> <그래> 상대팀의 최전방에서 끝없이 공격을 퍼붓고 있는 우영원은 아주 펄펄 날고 있다. 아직 골은 나오지 않았지만 언제 치고 들어올지 몰라 조마조마해서 미치겠다. 세계최강의 조직력을 지니고 있다는 상대방은 잘짜여진 포메이션을 기본으로 거함처럼 밀려오는 공격을 하고 있다. 그 단단한 기세에 눌려 쪼그라 들어 버릴것 같다. [퉁-] 공이 길고, 높게 머리 위에 큰 포물선을 그리며 우리 진영쪽으로 날아가는게 보였다. 씨발, 좆됐다. 거의 상대진영의 끝에서 시작된 공의 움직임은 하프라인을 훌쩍 넘어 우영원이 있는 센터에 [툭-] 꽂혔다. 공을 받은 우영원은 마치 물만난 고기 마냥 펄덕펄덕 뛰면서 우리편 수비수를 한명, 또 한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명 더 재치고 골키퍼를 유인해 내듯 골대 근처까지 공을 몰고간뒤, 골키퍼가 주춤주춤 앞으로 나오는걸 보고 [톡-] 구석으로 찔러넣듯 멋지게 한방 날렸다. 골을 성공시킨 우영원은 팀동료들과 환희를 하고있다. "꼬이네" 마음도 머리도 생각도 마구마구 꼬인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고 난 정신차리고 우리팀이 이길수 있도록 해야할 임무를 부여 받고 경기장에 들어온 사람인데 번번히 수비수에게 채이기만 하고 있다. 그리고 쓸데없는 곳에 멍하니 눈길도 주고 있다. 생각을 좀 바꿔볼 필요가 있다. [툭-] 역습이란건 어려운 것이다. 계속 수비만 하다가 역습으로 휙 바꾼다는게 말이 쉽지 행동으로 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그러니 생각을 조금 바꿔서 내게 공이 오면 길게 크로스를 휘두를게 아니라 공을 껴안고 적지로 들어가 상대 진영을 어지럽혀 주는게 좋겠다. 그러려면 이 무시무시한 주장완장을 찬 선수를 어떻게든 넘겨야 하는데, 그게 또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일이되게 하라' 경기를 하고 있는것은 결국 나다. 이상황을 넘길수 있는것도 이고비를 파헤쳐 나갈수 있도록 하는것도 공을 쥐고 있는 선수인 내몫이다. 걸려 넘어지면 일어나면 되는거고, 이미 수십번 넘어졌는데 한번 더 넘어진다고 죽는것도 아니잖나. 그래도 넘어지긴 싫으니 이번엔 조금 방향을 틀어서 뒤쪽으로 돌아들어가 보기로 했다. [샥-] 상대는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미들수비라는데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는 법이다. 스타일이 거칠긴 한데 이사람 뭐 그렇게 성깔이 드러운것 같진 않다. 교묘하게 잡아당기긴 하지만 대놓고 패는 스타일 같지도 않고,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은 원래 약삭바른짓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뒤로 돌아 들어가기로 결정! 무던히 앞으로 무식하게 어떻게든 지나가 보려던 내가 앞으로 가는척 하다가 뒤쪽으로 돌아들어가자 이팀의 구심점과 같다는 이 주장씨가 살짝쿵 얼어버리신다. "아싸" 속으로 혼자 좋아라 하면서 패널티 박스 중앙에서 수비수와 싸움을 하고 있는 페나를 보며, 왼쪽 구석으로 뛰어 들어오 오고 있는 클라이톤을 향해 크로스를 날렸다. 그리고 공이 날아간 클라이톤 쪽으로 수비들이 몰리는 사이 페나 옆에서 살짝 수비수의 몸동작을 가려서 페나를 자유롭게 풀어줬다. [팅-] 페나는 자유로워진 상태였지만 클라이톤의 어시스트를 받아 찬 공은 미스로 끝이 나고 말았다. 에, 그래도 여러가지 성과가 있었기에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우영원과 경기장에서 적이 였던적은 없었는데, 지금은 적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알아주는 쟁쟁한 선수들이 녀석의 팀동료들이다. 그러나 그보다 내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점은 든든하게 나를 막아서고 있던 주장형씨가 뒷쪽으로 돌아들어가는 움직임에 약하다는 점과 거칠어 보이는 외모와 엄청난 파워로 무장되어 있던 행동과는 좀 동떨어지게 이상하게 순진한것 같다는 점이다. [샥-] 바람이 귓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 스치는 바람이 아찔할 정도로 기분이 좋다. 알아낸 약점은 뚫릴때까지 써먹는다는 신조인 나는 번번히 내게 뒷쪽이 마구 뚫리는 주장형씨를 농락하듯 공이 오면 보란듯이 바람을 가르며 적진을 휘젓고 있는 중이다. "켁-" 신나게 달려가고 있는데 누군가 내 뒷덜미를 확 잡아 댕겨서 숨이 콱 막혀서 그자리에 꼬꾸라져버렸다. [삐익-] 심판이 휘슬을 불고 널부러져 있는 내쪽으로 척척척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위로 드니 상당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한 기운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상대편의 주장씨가 보였다. 아무리봐도 무서운 얼굴이다. <괜찮습니까?> <... 쿨럭.. 네> 기도가 한순간 콱 틀어 막혀버려서 조금 숨쉬기가 어려웠지만 나는 괜찮다고 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것 같기도 하다. 여지껏 교묘하게 당기고, 치사하게 할퀴던 주장형씨가 대놓고 반칙을 한것이다. 이건 무쇠로 만든 주장형씨가 힘이 들어졌다는 증거다. 그리고 열받았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삐익-] 우리팀의 공격으로 다시 경기가 재개되었고 난 속으로 방긋 웃으며 프리킥을 날렸다. 공은 여전히 들어가지 않고 있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늘은 왠지 이길것 같은 기분이 들정도로 몸이 상쾌하고 좋았다. 지금은 우리가 공격하고 있는 타이밍이다. <이런 쥐방울 같은게 ... > 다들었어 형씨, 지는 등치는 산만해서 쥐방울 같은거 할퀴는 주제에 도대체 누가 누구를 욕하는거야? 나는 피식 비웃으며 언젠가 우영원이 호텔방에서 큭큭큭 비웃어댔던 주장형씨의 별명을 떠올렸다. 카드캡쳐. 너무 거칠게 플레이를 해서 곧잘 경고와 퇴장을 받아 카드를 무지하게 모으는 이분의 별명은 바로 카드캡쳐셨던거다. 기분이 좋아지니 경기 중에 별게 다 생각난다. <... 카드캡쳐 ...> 키득 웃으며 내가 조용히 읊조렸는데 주장형씨의 눈에서 순간 [파박] 하고 불이 튄다. <뭐야!?> 그리고 다음순간 엄청난 압력이 오른쪽 머리를 강타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늦긴 하지만 공을 몰고가던 나는 상대의 폭력을 저지해 보려고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하지만 상대는 아직도 열이 바싹 올랐는지 나를 더 패주려는듯 펄펄 날뛰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를 확잡아 당겨서 한쪽으로 끌고가 버렸다. 누가 우영원네 팀 선수 아니랄까봐 성격한번 오발라게 드럽다. 씨발. 아, 내대가리. [삐익-] 심판은 난장판이 된 경기를 멈추었지만 관중들은 엄청나게 광분해서 소리를 마구 질러댔고 우리팀 선수와 저쪽팀 선수들도 반쯤은 싸움 중이고 반쯤은 그걸 뜯어 말리느라 정신이 없다. 도대체 맞은건 난데 왜 네들이 흥분하냐고!!! 나 아프다고!! 좀 봐달라고!!! 우릿우릿 대가리가 아파서 죽겠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혼자서 불쌍하게 내머리를 쓰다듬고 있는데 서늘한 손이 피부를 감싼다. "괜찮아?" 머리 만지느라 누가 오는줄도 몰랐던 내가 우영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쳐들자 우영원은 굉장히 애매모호한 표정이 되어 나를 내려다 본다. 우영원이 내 머리를 만지고 이야기를 하자, 그제서야 다들 정신을 차렸는지 두들겨 패고, 치고 박고 하던걸 그만두고 내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씨발, 졸라- 아파" "그러게 왜 덤비길 덤비냐, 놀리긴 왜 놀려?" "씨발 그게 아픈사람 한테 할말이야?" 나와 우영원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만 우리의 말을 전혀 알아 듣지 못하는 이쪽과 저쪽의 팀원들은 싸움판을 쉼터로 한순간 돌변시키며 이제는 물을 마시고 벤치의 작전을 듣느라 바쁘다. 심판은 나를 두들겨팬 무쇠팔 주장형씨에게 잔소리를 마구 늘어놓고 있다. 아까 성격 별로 안드럽다는거 취소다, 성격 졸라 드럽다 저새끼. 카드캡쳐라고 한마디 했다고 대가리를 그렇게 무식하게 패다니 인간이 아니다 저놈은. "저새끼 성격 졸라 드럽다고 전에 가르쳐줬잖아. 약 오르게 번번히 뚫고 있으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것도 아니고 거기다 대놓고 놀리면 쓰냐? 하여간 조용하게 생겨서 은근히 너도 사고치는데 뭐있어" "내가 아무리 사고친다고쳐도 맨날 폭행 휘두르는 새끼에게들을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한마디도 안지지?" 자기팀 주장을 '새끼' 라고 바로 앞에서 대놓고 지칭하는 우영원의 대범함에 놀랐지만 나를 바싹 약올리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우영원에게 질수없어 난 따박따박 말대답을 해줬는데 이게 뭘 잘못 먹었는지 아까부터 계속 시비질이다. 나 아프다고 이놈아. 걱정도 안되냐? 누구한테 지금 훈계를 하는거야! "니나잘해" ".... 이젠 나 안무시하냐?" 골 넣었을때 보다 오백만배는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우영원은 내게 통쾌하게 한마디를 날렸다. 그말에 할말을 잃어서 입만 열었다 다물었다 할뿐이다. 우영원을 피해 도망자처럼 숨어다녔던 나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난 바보였다. 난 얼간이었다. 난 멍청이었다. 난 ... 정말 구제불능이다. 상대는 1:0 으로 이기고 있지만 원정 경기 어드벤티지를 적용해서 승점 싸움에서 훨씬 더 유리한 입장이다. 치고, 달리는 스타일인 전형적인 영국식 축구와 잘 짜여진 팀워크 위에 거물급 빅스타 선수들의 개인기가 버무려져서 어디 내놓아도 억 소리나게 잘하는 이팀을 상대로 현재 한골밖에 안먹은걸 감사히 여기라고 할 사람도 있을 터이지만 축구란게 꼭 잘난 놈이 이기란 법은 없는거다. [툭-] 공을 받으면 곧장 달려 나를 보면 잡아먹을 기세로 눈을 부라리는 주장형씨를 농락하듯 뒤로 돌아 들어가기를 몇번째이지만 들어갈듯 하면서도 잘 들어가지 않는 골 때문에 속이 아주 숯검댕이가 되어버렸다. 국제경기에서 였다면 충분히 빨간카드 먹고 퇴장 당했을 행동을 한 주장형씨는 우영원의 화려한 언변과 여심을 흔드는 미소로 심판에게 판정승을 거둬 그쪽팀에게는 다행으로, 우리쪽에서는 불행으로 노란카드 한장을 먹는 선에서 그쳤다. [샤샥-] 머리칼 사이로 바람이 파고들 정도로 재빠른 동작을 할때마다 어리버리하게 삽질을 하는 주장형씨의 행동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내가 몇번즘 뒤로 돌아들어가자 아예 반대 방향을 막아서는 주장형씨를 놀리듯 난 이번에는 앞으로 돌아들어갔다. 그러나, 주장형씨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등 뒤쪽을 돌아들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면 난 방향을 보고 앞이냐, 뒤냐를 구분하고 있는게 아니라 수비수의 어깨를 보고 뒤쪽이 되는곳을 파고 들고 있기 때문이다. "등판이 넓은걸 안타깝게 생각하라고 ... " 멋지게 재끼고 진영에 파고 든것까지는 좋았는데 크로스를 올리려는 내앞에 우영원이 턱 하니 나타났다. 그런데다 내가 재끼고 온 주장형씨까지 합세를 해서 난 두 거구 사이에 낑겨버리는 불쌍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뒤에는 부심이 앞에는 두명의 덩치가 발 아래엔 하얀선이 있었지만 일단 갈수 있는 최대치까지는 가볼 요량이다. [탁탁탁] 두사람이 나를 애워싸는 동안 상대팀 수비수들이 모두 제자리로 들어왔다. 난 한쪽 코너로 바싹 몰려 버리게 되서 이상태에선 도저히 크로스를 올릴수가 없다. 그래서 편법이지만 두 덩치의 몸에 공을 맞추고 코너킥을 얻어내기로 했다. 그런데 누구를 맞춰야 하나? 나를 팬 주장형씨? 아니면 우영원? 고의적으로 코너킥을 얻기위해 공을 사람 몸에 맞춘다는건 상당히 좋지 못한 일이지만 어쩔수가 없다. 주장형씨의 몸에 맞추는것은 맞짱 뜨자는 도발의 의미를 내포할수도 있다고 생각되기에 우영원의 몸에 맞추기로 합의를 봤다 [탕---!] 크로스를 올리듯 발을 바깥쪽으로 돌려서 공을 휘감듯 우영원을 향해 날렸다. 몸 맞고 나간공은 당연히 우리 공이 될거다, 사람을 고의로 맞춘건 축구에도 연기가 필요하니 적당히 모른척, 미안한척 해야지 라고 생각했다. [풀썩-] "헉-" 내 크로스를 가장한 몸맞추기 볼을 맞은 우영원이 잔디밭에 그대로 꼬구라져 앉았다. 인상을 확 쓰며 허리 아래에 있는 보기에 상당히 민망한 그곳을 손으로 가리며 등을 굽히고 있는 우영원을 보고 난 연기가 아닌 실제로 엄청 미안해져버려서 입을 '헛' 벌리고 눈을 둥그렇게 뜨고 겁먹어서 놀란체로 모든 행동을 일시정지 해버렸다. 어떻게, 어떻게, 거길 맞췄어. 내가 못살아. 젠장. 니미, 몸 맞추려고 했는데 공이 왜 거기가서 꽂힌거야! "씨발, 남지웅 너 나 고자 만들려고 일부러 그랬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으르렁 거리는 우영원의 주위에는 이미 많은 수의 상대편 선수가 와 있었고, 벤치에서는 황급히 어린 선수의 앞날을(?) 위해 분주하게 응급처치를 시도하고 있었다. 고의로 공을 몸에 맞춘건 맞지만, 거길 맞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공을 맞추면서 이놈들 나를 몰아부쳐?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야 뻥- 하고 공을 차버려야지 라는 악한 생각을 잠시 했지만 난 남의 인생에 초칠 생각은 전혀 없다. "많 ...... 이, ... 많 ... 이, ... 많이 아파?" 이걸 어째란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몸을 베베꼬며 내가 매우매우 미안해 져버려서 많이 아프냐고 물었지만 정말 엄청 아픈건지 완전 인상파처럼 인상을 빡- 그리고 있기만 한 우영원은 말이 없다. 그런 우영원 주위를 분주히 오고가며 그의 팀동료들이 뭔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해외토픽감이지?> <내일 선지 일면일거야> <제목은 우드 당하다 이런거?> <약한데> 영국영어는 미국영어와 상당히 발음에서 차이가 나는건지 아니면 프랑스 태생 선수들이라 그런지 우영원에 관해서 떠들고 있는게 틀림 없는 그들의 말을 통 알아 들을수가 없다.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보며 우영원은 상당히 띠거운 얼굴로 일어나더니 자신보다 최하 다섯살은 많을 그들에게 상당히 오만불손하게 명령을 한다. <닥치고들 공이나 차셔> <훗, 괜찮아?> 싸가지 만땅으로 채운 우영원을 향해 그의 팀동료가 싱긋 웃으며 녀석의 안부를 묻는다. 좋은 팀동료를 둔것 같은데 우영원의 표정은 한없이 나쁘기만 하다. 여하간 우영원이 약간의(?) 부상을 당했지만 코너킥이 우리쪽의 것이 확실했다. 나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코너킥을 날리기 위해 구석으로 향했다. [툭-] 내가 날린 공은 그어느때보다 예쁘고 높고 고운 호를 그리며 날아갔다. 유럽에 온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크로스와 패스가 꽤 정확해 졌다. 볼을 잡고 끄는 시간도 줄었고, 볼 키핑 능력도 전보다 나아졌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2미터 쯤 되어보이는 수비수들에게 채여서 잘 넘어진다는게 가장 큰 문제다. 특히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할때면 포르투칼 리그의 경기보다 열배는 더 자주 넘어지는것 같다. [탕-] 아무래도 오늘은 운이 잘 따르질 않는것 같다. 우리팀 골게터가 날리는 공이 족족 골대를 맞고 나오다니 김샌다. 그러나 그순간 다행인지 불행인지 [톡-] 튕겨져 나온 공이 내앞에 뚝 떨어졌다. 앗싸, 가오리 ! 하고 한번 속으로 외친 뒤 반대편으로 크로스를 다시 날렸고, 그 공은 눈 깜짝할 누군가의 머리를 맞고 골네트를 흔들었다. 예쓰! "여어-, 안녕?" 안녕하지 못해. 우리팀의 만회 골로 1:1이 되자 파상공세로 밀어 붙이던 우영원네 팀은 공격과 수비의 분활을 정상적으로 바꾸면서 센터 포워드에 있던 우영원을 왼쪽으로 이동 시켰다. 번번히 내 뒤로 돌아서 들어가기에 철저히 당하고 있는 주장형씨의 실수에 대한 대비책으로 우영원으로 날 막아볼 요량인가 보다. 확실히 내약점을 잘 알고 있는 우영원이지만, 역으로 말하면 나도 이녀석의 약점을 가장 잘 알고 있다. "야, 살살 좀해. 뭘 그렇게 빡세게 헥헥 거려?" 댁이야 우리팀 쯤이야 살살하면 되겠지만 이쪽에서는 이 스코어라도 유지하려면 빡세게 할수 밖에 없다네. 그 아가리 좀 닥치겠나? 우드씨-? 난 절대로 뚫리지 않는 벽같은 우영원을 상대하면서 진땀을 빼고 있는 중이다. 정말 짜증나 죽겠다. 우영원도 번번히 내 태클에 걸려서 공격이 저지 당하고 있지만 내 공격 역시 우영원에게 완벽하게 걸러지고 있다. 속상해! 속상해!! 속상해!!! "닥치고 경기나 해" 빙글빙글 능글맞게 웃고 있는 우영원의 얼굴을 보자니 열이 화 뻗친다. 그런데 경기 시간은 왜이리 빨리빨리 가는거야. 몇번 헥헥 거리고 왔다갔다 했을뿐인데 벌써 후반전이 끝나가고 있다. 머리에서 쥐가 난다. 미치겠다. 여긴 홈이다. 난 꼭 이기고 싶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우영원은 살방살방 웃으면서 느긋하게 나를 막고 서있다. [삐익-] 종료 휘슬이 울리고 경기는 끝이났다. 그렇게 처참한 결과도 그렇게 만족스러운 결과도 아닌 무승부의 스코어를 보며 난 가뿐 숨을 고르고 있다. 그런 내앞에 서있던 우영원이 내 머리를 부비부비 흩치면서 생긋 웃어보인다. 나 안좋아 한다매, 왜 친한척 하고 지랄이야. 이거 안치워? 괜히 삐딱모드 타버린 나는 우영원의 웃는 모습이 얄미워 죽겠다. "옷 바꿔 입자" 우영원이 그렇게 서늘하게 한마디하고 훌렁 웃통을 벗어젖히자 순간 경기장에 수천, 수백개의 카메라 프레쉬가 펑펑펑 터진다. 나름대로 우영원의 세미누드로군. 여성팬들은 아까 홈팀을 응원하던 열기는 온대간대 없고 웃통 벗어재낀 우드만 불러재끼고 있다. 배신자들이다. "안벗어?" "내가왜?" 내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스트립쇼를 왜해? 난 단단한 몸을 가진 우영원을 피해 돌아서려고 했는데 [탁] 손목이 잡혀 버렸다. '씨익' 악마같은 미소를 지은 우영원은 자신의 유니폼을 제어깨에 척 걸치고 잡히지 않았던 자유로운 나머지 손목까지 채어 가더니 만세를 부르게 하곤 내허락도 없이 훌렁 내 유니폼을 벗겨냈다. 속에서 아악-! 소리가 절로 났지만 그보다 더 기가 질린건 마구마구 터지는 카메라 프레쉬. 번쩍이는 빛에 눈이 다 아프다. "유럽에 온걸 환영해" 멋지게 한번 웃어 보이고 지 유니폼을 내손에 턱 쥐어준 우영원은 내 유니폼을 입고선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그런 우영원의 뒷통수를 보며 녀석의 옷을 끼워 입으면서 난 꽁알꽁알 투덜거려 버렸다. 환영은 무슨 환영이야, 넌 환영의 의미로 선제골을 넣어 버리고 그러냐? 안 좋아한담서, 왜 친한척이래, 재수없게 실실 웃고 지랄이냐고. 짜증나 진짜. "나한테 잘해주지 마란말야, 썩을놈아" 주전으로 뛰는 선수 11명 전원이 세계 빅스타인 우영원의 팀은 현재 믹스트 존에서 열나게 인터뷰 중이였다. 난 그틈을 타서 스리슬쩍 인터뷰를 하지 않고 도망을 치는데 성공해 버렸다. 샤워하고, 개인 사물을 챙기고 선수 대기실에서 주전후보 몇몇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감독님이 들어오셔서 오늘 잘했다는 인삿말을 남기시고 가셨다. 보통 일정이 끝나면 쫑파티를 하고 놀지만 (쫑파티는 세계 공통의 문화다) 오늘은 경기가 조금 일찍부터 있어서 우리는 느긋하게 대기실에서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끼이-ㄱ] 한참을 떠들고 놀고 있는데 우영원이 문을 삐죽이 열고 안을 살짝 드려다 본다. 열심히 떠들고 있던 모두가 순간 문쪽을 바라보자 그는 전매특허의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미소를 해보이며 문안으로 저벅저벅 들어오더니 나를 [턱] 잡고는 끌고 나가려고 한다. <이녀석 잠시만 빌려갈게> 빌려가? 내가 물건이냐 이 씹새야. 그리고 너 적지에 들어오면서 그렇게 홀홀단신 혼자서 당당하게 다닐수 있는거야? 돌았구나 아주- 난 끌려가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하고 있는데 조금전까지 방긋 미소를 짓고 있던 우영원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몸이 근육으로 둘러쌓여 있지만 근육질이란 느낌보다는 키가 워낙 커서 훤칠한 느낌이 드는 우영원의 몸은 뒤에서 보면 굉장히 늘씬하고 길다. "야- 어디가" "앉아봐" 으슥한 복도 끝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조금 무섭다. 하얀벽면에 새파란기가 뿜어져 나와서 저절로 위축이 되는데다가 답지않게 우영원이 진지한 얼굴이라 더욱 무섭다. 이야기를 하며 쉬라고 만들어 놓은 곳이 이렇게 복도의 구석진 곳이라니 만든사람이 누군지 생각하기 무서울 정도다. 아마 취향이 우영원이랑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왜" "그냥 앉으면 누가 때리지?" 아까부터 나의 왕성한 호기심에 태클을 탁탁 걸어재끼는 우영원은 뭔가 상당히 삐딱한 표정이다. ... 네에-, 지난시즌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이시자, 현재 프리미어리그 득점랭킹 1위이시고, 더불어서 챔피언스 리그 득점랭킹도 거머쥐시고 계신분이 질질 끌고와서 영문도 모르는 녀석에게 앉거라 해도 그놈은 왜 앉아야 하는지 물어야할 권리도 없이 입 닥치고 앉아야 하는거지요? 어디서 명령이야 시발. "너 왜 나 무시해?" "네가 무시 안당할만 하다고 생각 하나봐?" 녀석이 좋지만 입은 그와 반대로 뾰족한 말을 내뱉었다. 자신을 왜 무시하냐는 우영원에게 신기하게도 이상하리만치 냉정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당연하다는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보고 있으면 심장이 간질거리고, 귀에 이명이 생길만큼 생소한 감각을 느끼고 있으면서 닿으면 화들짝 피부가 놀라서 혼자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좋아하면서 행동은 어처구니 없게도 평소보다 더 싸늘하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받아치는건 다 우영원 때문이다. 왜 가만있는 사람한테 와서 벌집을 건드리냔 말이다. "우리 그래도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였어?" "누가 우리인데?" 우영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냉랭한 어조로 내 대답이 날아가자 녀석의 표정이 조금 더 굳어진다. 원래도 입을 열면 반역의 기질이 다분해서 상당히 삐딱선 타있는 성격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를 좋다고 해준 사람에게, 또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까지 따박따박 말을 늘어놓을줄 몰랐다. 마음과 행동의 갭은 있을 수 밖에 없는거 같다. 내가 아무리 딱부러지게 말해도 우영원은 작정을 했는지 계속 이문제를 건드릴 모양이다. 회피하는 나와는 다르다는거군. "내가 그렇게 싫어?" "전에 대답했잖아" 오늘 머리가 엄청 비상하게 굴러가는 건지 아니면 칼 옆에 있다보니 말빨이 덩달아 탄력 받은건지 엄청 말이 잘된다. 거기다 연기력이 늘었나 우영원을 피해 다닐때 심장이 달달 떨리던 나는 온대간대 없고, 딱딱하게 부러지듯 냉소적인 나만 남아 있다. 조금은 미안해질법 할 정도로 우영원의 표정이 어둡다. 우영원이 아무리 좋아지더라도 나는 갑자기 좋아라하며 녀석의 곁에서 웃을수가 없다. 그것은 나에 대한 배신이고, 이 못됐기 그지 없는 행동은 최소한의 나에 대한 내 배려다. "나는 너랑 허물없는 사이가 되고싶어" 저 든든한 우영원이 애처로울 만큼 솔직하고 진솔하게 내개 말하고 있는데 몇달 사이 심장강장제라도 바싹 복용한건지 더욱 차갑게 굳어져만 가고 있다. 누가와서 나좀 말려줬으면 좋겠다. 내가 더이상 우영원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지 않도록. 내가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는듯 시니컬하게 떠들지 못하도록 아무나 와서 좀 말려줬으면 좋겠다. "허물없는 사이잖아. 갈데까지 간사인데. 그보다 더 어떻게 허물이 없을수 있는데?" 돌아서서 가버려야겠다. 어쩌다 이말까지 나왔는지 모르겠다. 좀전까지 바로 5분전까지만 해도 화기애애 친구들과 떠들고 놀고 있었는데 지금은 찬물을 뒤집어 쓴것처럼 싸늘하다. 내가 뒤돌아서서 걸어가려고 하자 우영원이 거칠게 돌려세운다. 그리곤 찬벽으로 나를 밀어붙이곤 사납게 말한다. 한없이 거칠고, 한없이 무자비하고, 한없이 무서운 맹수같은 모습인데 그게 왜 슬퍼보이는지 모르겠다. 눈이 삐었나. "그래, 내가 너 덮쳤다. 사실 지금도 얼마든지 덮칠수 있어. 원하면 손안에 넣을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안을수 있어. 손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지 않아도 조그만 생각을 틀면 너정도는 일도 아니라는듯이 헤집을수 있고 거칠게 탐할수 있어. 그래 그런데 내가 원하는건 그게 아니거든. 나는 너한테 사랑받고 싶고, 너한테 좋은사람이고 싶어. 너한테 보듬어질수 있는 상대였으면 좋겠어. 어렵다는거 아는데 한번만 다시 생각해보면 안될까? 나는 네마음을 안고 싶어." 마음을 안고 싶다라. 이미 너는 내 마음도 가져갔어. 난 고개를 무의식적으로 저었다. 나는 우영원의 마음을 안고 싶은걸까, 그런데 그건 잘 모르겠다. 왜냐면 이미 우영원이 나를 좋아한다고 했기 때문에 마음을 얻어버려서 내마음이 녀석의 마음을 원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나를 아픈눈으로 보고 있던 지금도 아마 아픈눈을 하고 있을 우영원을 녀석의 말처럼 보듬어 주고 싶다. 아파하지 말라고. 너는 지금은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좋아하는 이 마음을 알려주고 싶다. 그런데 난 그럴수가 없다. 지금의 나는 내안에 갇혀 있으므로. 아죽 깊숙한 곳에 꼭꼭 숨어버려서 한번만 다시 생각해 봐달라는 녀석의 품에서 도망쳐 버렸다. 나는 너를 좋아해 우영원. 그런데 그마음 만큼 나는 너를 싫어해 우영원. 나는 너를 사랑해 우영원. 그런데 그마음 만큼 나는 너를 미워해 우영원. 나는 너를 원하고있어. 하지만 너를 보면 무서워. 나는 너와 함께 있고 싶어. 하지만 너와 있기가 두려워. 나는 너와 마주 보고 싶어. 하지만 네눈속에 너를 혐오하는 내가 가득 들어차 있어. 내안에 갇힌 나는 아픈눈으로 나를 바라는 우영원을 등지고 돌아섰다. 혐오해, 싫어해, 무서워, 죽고싶어, 죽어버려라고 험한 소리를 질러대고 녀석을 상처입히고, 나도 상처받고 아픈 영혼을 끌어안아줄 포용력이 없고, 나에게 죄를 저지른 이에게 용서란 말을 주지않고 머나먼 땅속으로, 암담한 어둠속으로 숨어들기만 하고있다. 다음에 한번만 더 나를 잡아줘. 혹시 모르잖아? 용기없는 내가 에라 모르겠다 라며 웃으며 너를 잡아버릴지도. 지금처럼 한번만 더 나를 돌려세워줘. 그때는 꼭 마주볼수 있도록, 많이 사랑해 줄수 있도록, 너를 보고 웃을수 있도록 노력할게. 날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겨울 이적시장이 열리는 1월이다. 벌써 포르투칼에 온지 반년이 되었다. 겨울은 춥고, 싸늘하지만 팀의 적응도가 좋아서 현지적응을 잘하고 있다. 친구도 많아졌고, 축구실력도 성장하고 있고, 팬들과 많이 친숙해지고 있기도해서 생활은 어렵지가 않다. 이적시장이라고 해봐야 의사가 타진된 팀들끼리 서로 선수를 맞바꾸는 트레이드가 횡횡하므로 단순 휴가철쯤이다. "집에 갈거야?" 이삭이 형이 스케쥴표를 점검하며 내게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다 알면서 뭘 모르는척 하면서 묻는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럼?" 나는 여전히 인터뷰를 하지 않고 있고, 아직도 내안에 갇혀서 유리벽 넘어에 있는 세상을 구경하고만 있다. 언제까지 이 구경꾼 노릇이 계속 될지는 모르겠지만 좀체 바뀌지 않는 마음을 돌릴길이 없으니 별수가 없다. "영국에 갈건데" "프리미어 리그 보러?" "어" 부모님을 뵈러 가고 싶은 마음도 많지만 유럽에 온 첫해이니 많은걸 보는쪽이 더 공부가 될것 같아서 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실상은 1월에도 리그를 쉬지 않는 영국에서 열심히 뛰어다닐 우영원을 보러가는거다. 영국행 비행기표를 끊으며 내가 어쩌다가란 망연자실감에 잠시 빠지기도 했지만 보고싶으니 보러가는것 뿐이다. "영국 언론이 가만있지 않을텐데. 같이가 줄까?" "아니" 이삭이 형은 나의 거절이 못내 아쉬운듯 섭섭한 눈길로 나를 본다. 확실히 유럽의 파파라치는 한국의 스포츠지 기자들과는 레벨이 달랐다. 빵을 먹고 있는 모습,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 모습, 간혹 화장실에 들어가고 나오는 모습까지 나도 모르는 사이 얼마나 사진을 찍어대는지 아주 화장실 가서도 후까시 잡아야할 처지다. <우-------------------------------------------------------------드> 프리미어 리그는 다른 유럽리그와 다르게 겨울동안에도 계속 리그를 진행한다. 그것은 엄청 추운 이런 날씨에도 개미떼처럼 몰려든 관중의 힘이 아닐까싶다. 우영원 팀의 최고의 숙적이란 곳과 한창 경기중인 이곳의 관중석은 마치 한국에서 한일전을 할때와 같이 사생결단할 사람들이 모인것 같다. 잘못하다간 싸움이 날것 같은데 내가 들은 바로는 이정도는 약과고, 예의가 바른상태라고 한다. "씨발" 경기는 의외로 쉽게 쉽게 풀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인생은 어렵게 어렵게 풀리고 있다. 우영원이 골을 넣고 골세레머니를 한다음, 전광판에 모자를 눌러쓴 내 모습이 오래도록 비치고 있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카메라맨들은 다 하나같이 새디인게 틀림없다. 선수들이 침을 뱉을때, 선수들이 민망한 부분에서 땀에 쩔은 옷가지를 떼어낼때, 그곳을 만지고 있을때 등등 더러운짓을 하고 있을때에 카메라를 집중적으로 비추어주는가 하면 지금처럼 원치도 않은 내모습이 전광판에 떡하니 비칠때 등을 보면 상당히 꼬인 성격들이 아닌가 싶다. "지웅아!" 나름대로 안걸릴수 있도록 잘 차려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집요했던 카메라맨 덕분에 기어코 아는 사람이 나에게 인사를 하는 상황이 연출되고야 말았다. 이놈의 카메라맨 걸리면 목을 확 따버리던지 해야지. 성진이 형은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불쑥 내이름을 부르며 아는척을 한다. 내모습이 비추자 처음엔 그냥 관중인가 했던 사람들이 조금 시간이 지나자 술렁거리더니 <수페르>, <포르투칼>, 그리고 <키스> 등 결정적인 단어들을 내뱉으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의 정체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형, 잘 지냈어?" "야 넌 오면 온다고 말을하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그냥 경기나 보고 가려구요" 성진이 형과 떠들기 시작하자 카메라맨은 아예 내쪽에 카메라를 고정시킨다. 저런 시발새끼. 확 내려가서 목을 잡고 짤짤짤 흔들어 버렸으면 싶다. 나의 답답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진이 형은 반갑다는듯 나를 보며 활짝 웃음을 짓는다. 나도 반갑지만 참 난감하다. 나쁜짓 하다 딱 걸린 어린이처럼 난처하기 짝이 없다. 몰래 오지말고 처음부터 공식방문을 할걸 그랬나. "야, 가자" "에? 어딜?" "어디긴 집에 가야지" 형 저기요 저는 그냥 경기만 보고 튈려고 했거든요. 내가 엄청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진이 형은 막무가내로 나를 당기면 일으켜세운다. 나의 당황하는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듯 여전히 카메라가 내쪽에 고정되어 있는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봐, 카메라맨 너 시청자들이 두렵지 않냐? 경기를 중계해야 될거아냐!! 프리미어 리그 중계가 뭐 이따위야라고 욕을 해보지만, 한국처럼 축구경기를 중계할때 친절하게 쭉- 연이여서 하는 곳이 아니니 투덜거려 봤자다. 방송은 광고를 내보내야 하는데 축구는 전반 45분, 후반 45분 그사이 텀은 고작 10분에서 길게는 20분이다. 그사이에 긴 광고 보내니까 됐잖아? 할수도 있지만 생각을 잠시 다른쪽으로 해보면 야구는 9회까지 있는데 처음 경기 시작할때 광고 넣고, 회당 광고를 넣고, 뿐만아니라 이닝 사이에서 또 광고를 넣는다. 평균 야구가 짧게 1시간 30분 길게는 3시간 가량 진행된다고 치면 광고수익은 축구보다 야구가 훨씬 높다. 유럽에서는 야구가 인기 없는데 그럼 축구로 그런걸 보완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필드에서는 경기를 계속하고 있는데 중간에 뚝 잘라먹고 광고 넣을 시간에 그냥 광고를 보내는거다. 그럼 간혹 이런일이 생긴다. 지금은 광고 중이다. 그러나 그사이 누군가 골을 넣었다. 캐스터와 해설자는 마구마구 소리를 질러댄다. "골! 골입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 아무도 없다. 광고가 끝나고 다시 경기를 중계한다. 광고를 하는 사이 누군가 골을 넣었으므로 스코어는 변해있다. 어리둥절할 시청자를 위해 캐스터와 해설자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 "광고하는 사이 한골 들어갔어요" 그러고도 시청자들이 가만히 있냐고? 제대로 경기 다 보고 싶으면 경기장에 오란말이다. 여긴 그런 동네다. "영원이는 조금 있으면 올거야" "그래요?" 우영원의 집은 삼층짜리 단독주택으로 시외각에 있다. 주변에는 수풀이 우거져있고 대문은 저택처럼 거대한 철문이다. 여길 혼자살아? 황당해서 말이 안나오는 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집안을 둘러보고 있고, 성진이 형은 주방에서 바삐 투당거리고 있다. 일층 거실의 천장 높이는 족히 3미터는 될것 같다. 돈많다는거 자랑하나 집 한번 뻑적찌근하다. [달칵-] 열쇠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발이 집안으로 들어오고 훤칠한 장신의 사람이 몸을 들이고 돌아선체로 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그고 몸을 돌린다. 얼어버리는 마법에라도 걸린것 같은 나는 멍하니 서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우영원을 빤히 봤다. 그런 나를 발견한 우영원도 움직임을 멈추고 우뚝 서서 나를 빤히 본다. 네가 왜 여기있어? 란 표정이다. "어, 왔어? 야- 사람을 봤으면 인사를해" "........." 우영원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을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봤을때 딱딱거리고 헤어졌던 내가 자신의 눈앞에 떡하니 있는 걸 보고도 일절 코멘트가 없다. 성진이 형이 사람을 봤으면 인사를 하라는 추궁에도 불구하고 우영원은 나를 탁자에 놓인 먼지보듯 훑어보고 '저런게 있군' 이란듯 이층으로 횡하니 올라가 버렸다. 머리에 쿵- 하고 바윗덩이 하나가 내려 앉는 기분이다. 심장에 앙금이 엉기엉기 엉켜서 피가 맺히는것 같다. 내가 여기 왜 왔는지 모르겠다. 매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나를 보고 횡하니 우영원이 가버리자 성진이 형은 화들짝 놀라며 당황을 했지만 난 다행히 별일 아니라는듯 쇼파에 안전히 앉을수 있었다. 충격은 컸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어느정도 예상을 했었기에 충격파가 조금 덜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연락도 없이 왠일이야?" 성진이 형은 이 어색하기 짝이없는 분위기를 어떻게든 깨보려고 부던히 노력중이다. 그런 노력을 하면 나라도 맞장구를 쳐줘야 할텐데 그만 말이 하기 싫어져 버려서 난 설핏 웃어버리고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다. 왠일이긴 보고싶은게 있으니 보러 왔지. 그걸 날더러 지금 까발리 라는거야 뭐야. "지웅아?" "왼쪽눈 시력이 떨어져서 정밀검사 받으려고 알아봤는데 이근처에 있는 곳을 추천해줘서" "시력이 떨어져?" 내 왼쪽눈은 조금 찌그러졌다. 외관상으론 멀쩡한데 그러니까 눈알이 찌그러졌다. 심할정도는 아니지만 경기에 자주 나가다 보니 눈이 혹사를 당해서 조금씩 시력이 떨어지고 있다. 운동선수에게 건강상에 문제가 있다는건 인생이 끝난다는 뜻이기에 성진이 형이 화들짝 놀란다. 우영원과 친척지간이라는데 형은 왜이리도 사람이 순진한건지 눈좀 나빠졌다는 말에 엄청 놀란다. "별로 큰일 아니야. 병원도 오고, 경기도 보고, 런던 구경도 할겸 온거야." 그냥 놔뒀다간 오늘밤 걱정으로 잠을 못잘것 처럼 굴기에 내가 웃으며 대답하자 형은 '그래' 라면서도 여전히 근심어린 표정이다. 별거 아냐 형. 눈은 그저 구실에 불과해. 견문을 넓히자는 구실보다도 못한게 런던에 있는 병원에 볼일도 볼겸이라고. 오해 하지마. "너 런던 구경하기 힘들텐데" "왜?" 성진이 형이 당연하다는듯 그렇게 말하자 옆에서 변함없는 표정으로 밥을 먹고 있던 우영원이 표정이 불편하게 변한다. 쟤랑관련 있나봐? 어째서란 내 당연한 물음에 성진이 형은 우영원을 빤히 쳐다보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 내 상처를 확인사살하듯 웃으며 그런 형에게 말을 했다. "우영원 이제 나 안좋아한대, 걱정할거 없어" 쓱싹쓱싹 밥을 긁어 먹으며 담담한 어조로 내가 말하자 성진이 형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너 그걸 믿어?" "응?" 왜 그러지? 온화하던 형이 믿을걸 믿어란 표정으로 나를 훈계하자 변동없이 밥만 먹고 있던 우영원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다급하게 도망치듯 자리를 뜬다. 뭐야? 왜 그러는데? 나의 맹한 모습에 성진이 형은 너도 참 불쌍하다라는 표정이다. "네가 그러니까 안되는거야. 하여간 저노무시키 어쩌려는건지 모르겠다니까. 가서 좀 패줘!" "패고 싶으면 형이 패" "맞을까봐 무서워서 못패. 저런 무식한놈 한테 맞으면 골로 간다니까" 짜증난다는듯 형은 버럭 내게 소리를 지른다. 뭐야 뭐, 정황을 설명을 해줘야 내가 알아들을거 아냐. 형은 맞을까봐 무서워서 못패면서 나한테 패라는건 무슨 심보냐? 나 맞아 죽으란 말이야? 아님 나 같은건 맞아도 상관없다는건가? "넌 패도 안맞잖아" "아... 그치만" "아 몰라, 저새끼가 토크쇼 나가서 뭐랬는줄 알아?" 자신의 머리를 막 어지럽힌 성진이 형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저놈을 내가 오늘 죽여버리던지 해야지' 라고 이를 갈며 버럭버럭 계속 소리를 질러댄다. "뭐랬는데?" "사회자 한테 '내가 남지웅 좋아하는데 뭐 잘못 됐어요? 왜 시비에요' 이랬다고!!! 내가 그것 때문에 몇날 며칠을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 다닌줄 아냐고!!! 이제 안좋아하긴 뭘 안좋아해!?!" 괜히 나한테 씩씩 화를 낸 성진이 형은 '미안' 이라며 열을 식히려는듯 밖으로 나갔고 형의 분풀이를 다들은 나는 멍해져 버렸다. 뭐야, 안좋아한다면서- 방송 나가선 왜 딴소리해서 사람 이상하게 만드는건데. [똑똑똑] 성진이 형이 나에게 거짓을 고했을리는 없지만, 아까 사람들의 그 오바스러웠던 행동으로도 충분히 그런말을 했을법 하지만 그래도 본인에게 확인할 필요가 있기에 난 우영원이 머물고 있을 방의 문을 두들겼다. 밥 잘먹다가다 갑자기 표정이 불편해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도대체 그렇담 왜 아까 처음보고 나선 기분나쁜 표정으로 2층으로 올라가 버린건데? [달칵-] 조용히 방문이 열린다. 내앞에 '할말있음해' 모드인 우영원이 보인다. 마치 오늘 네가 날 훈계할것을 알고 있었어란 표정인데 이렇게 당당 하다면 왜 밥먹다가 불이나케 튄건지 참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우영원은 문을 열어주고는 제방 침대에 가서 털퍽 앉는다. 내게는 의자를 당겨주더니 앉으라는듯 눈짓을 한다. "너 왜 그랬어?" 설사 나를 계속 좋아한다손 치더라도 그러는건 정말 모든 사람들의 속을 확 뒤집는 행동이다. 이삭이 형이 엄청 눈치 볼때부터, 성진이 형이 내가 나타나자 마자 황급히 올때부터, 사람들이 웅성일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건데 나를 보고 정색을 하고 가버리는 우영원을 보고 난 이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물건너 포르투칼에 그 방송이 나가지 않은것은 다 홍부장의 노련함 덕분이겠지 싶다. "뭐가?" 이런 뻔뻔한 새끼를 봤나. 너 나 안좋아한다면서, 그런데 왜 방송에 나가서 나 좋아한다고 떠벌린거냐고 묻는거아냐 시발놈아. 네때문에 졸지에 꽁무니에 남자 따라 붙은놈이 됐는데 뭐가라니, 뭐가라니. 아주 주댕이를 찢어버릴까 보다. "방송에 나가서 왜 그랬냐고" "좋아하니까 좋아한다고 그런거지. 뭘 왜그래" 당연하다는듯 말하는데 아주 할말이 없다. 이런게 월드 클래스급 축구선수라니 지구가 망할 징조다. "나 안좋아한다면서" "그러려고했지" "그랬는데?" 추궁을 하듯 다그치는 나의 질문에 우영원의 눈이 가라 앉는다. 전처럼 아파하는 기색은 덜하지만 뻔뻔함으로 무장을 하고 있음에도 조금은 주저를 한다. 나는 보고싶어 했다는걸 망각한체 그런 우영원을 바싹 쪼으고 있다. 감히 방송에 나가서 전국적으로 개망신을 줬단 말이지? "마음이 마음대로 되면 그게 마음이 아니지" 뭐 그딴 개같은 논리가 있어. 내가 기가막힌다는듯 '하' 하고 되묻자, 우영원은 인상을 찌푸린다. "안좋아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내마음이 내의지를 배반했어. 어쩔수가 없었어. 난 너 좋아해" 뻔뻔한 놈 이걸 팰수도 없고 진짜 황당해 미치겠다. 천진난만이 아니라 이건 황당무개다. 더이상 도저히 할말이 없게 만드는 저 두손두발 다들 막무가내 정신에 내가 피식- 비웃자 우영원은 애꿎은 목만 슥슥 쓰다듬는다. 그러다가 조심스레 내 눈치를 보더니 기막혀 하는 내옆으로 은근슬쩍 오더니 살며시 당겨안는다. 떨어져 십쌔야. "놔" "싫어" 살며시 안고 있던 우영원의 팔이 점점 깊이 휘감겨옴에 따라 갑자기 두려움이 가중된 나는 당연스레 거부했다. 그런데 이 미친놈이 놓아주질 않는다. 확실히 돌아버리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놓으라고 몸을 비틀어보지만 더 깊히 녀석의 품안에 감겨들어갈 뿐이다. 답답하리 만큼 꽉 옭아매어와 순간 뒷골이 서늘해졌다. [풀썩-] 반쯤 굳어서 얼어가고 있는 나를 침대로 밀어붙인 우영원은 내 위에 포개어져 있는 상태가 되었다. 심장이 와들와들 떨리는 나를 걱정스레 보며 우영원은 웃었다. 내 목덜미 부근의 이불속에 얼굴을 묻고는 부동의 자세로 몇분간 가만히 있는다. 내가 벗어나 보려고 꼼지락 거리려고 하자 이불속에 묻고 있던 얼굴을 내 목덜미에 슬쩍 갖다대서 사람을 화들짝 놀라게 만든다. "헉" "....... 놀라지마" 어떻게 놀라지 않을수가 있어! 네가 나한테 전에 무슨짓을 했는데! 아직 하나도 안잊어버렸단 말야! 비키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반항하다 맞은 기억에 몸은 덜덜 떨리기만 하고 움직이질 않는다. 찌를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는 우영원의 눈이 아파한다. 전에 말했지만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게 아니고, 가해자는 너이고, 난 피해자일 뿐이거든. 네가 아파할 권리는 요만큼도 없어. "사랑하는 남지웅 겁쟁이-" 이게 말이면 단줄아나? 누가 사랑하는 이고, 누가 겁쟁이야? 팔이 달달 떨리는걸 보고 우영원은 웃었다. 아프게 웃는게 보는 사람한테 얼마나 미안한건줄 알고 있냐? 왜 내가 너한테 미안해야 하는데, 차라리 웃지마 새꺄. 그리고 비키라고! 비킬 생각없이 부동의 자세로 내 몸에 자신을 몸을 쓸듯 비척대오는 우영원의 몸짓에 나는 또다시 얼어버렸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진짜 좋아하는데 나만 무서워하고 섭섭하게" 특이한 목소리로 웅웅대듯 혼자서 낮게 주절이는 녀석의 말에 나는 또 얼어버렸다. 참선을 할때 처럼 심호흡을 길고, 깊게 하길 몇번 몸이 조금씩 잦아들고, 마음이 안정을 되찾을 무렵 우영원은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구는 녀석을 죽일듯이 노려보자 오히려 생긋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보이더니 내손을 잡아당겨 손바닥에 입을 맞춘다. "자고가" 그렇게 말하고 휙- 문을 닫고 간결한 동작으로 방을 나가버린다. "미친새끼" 우영원의 입술이 닿았던 손바닥을 보며 난 나직하게 녀석에게 욕을 해줬다. 심장떨려 죽을뻔 했다. 잠시간 부둥켜 안고 있었을 뿐이데 몇게임은 뛴것 처럼 완전 탈진해 버린 난 그대로 침대 위로 넘어져서 잠이 들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잠이 잘 올것 같았다. 우영원의 방은 일단 크다. 그리고 사물이 한쪽으로 몰려있다. 오른쪽 벽에 무슨 원수라도 졌는지 다른곳은 텅텅 비워뒀으면서 그곳에만 물건을 한가득 채워놨다. 이른아침 할일없이 남의 침대에서 뒹굴 거리던 나는 무료함을 달래볼겸 사진첩 구경이나 해볼셈으로 앨범 하나를 폈다. 첫번째 앨범은 온통 유니폼 입고 뛰어다니는 우영원 뿐이다. 아무래도 선수니 그런 사진이 많겠지만 이건 어째 인공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게 아마도 광고용으로 찍은 사진인가 보다. 브랜드 로고가 찍혀있지 않지만 너무 조작한 느낌이다. "노출증이구만" 혼잣말을 하듯 난 우영원의 벗은 사진 한장을 보며 그렇게 투덜거렸다. 컬러풀한 다른 사진들과 달리 짙은 회색 물방울이 튀는 공간에서 상의를 벗고서 앞을 응시하고 있는 흑백사진은 우영원이 영국에 진출한 첫해에 찍었던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과 별반 다른게 없다. 오히려 더 거칠고, 사나워 보인다. 누가 성깔 더럽지 않다고 할까봐 연속 찰영된듯한 뒷편의 사진들은 앞쪽 보다 한층 거만하고,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다. "아주 지 잘난맛에 살지" 감각적으로 튀는 회색 물방울과 단색으로 표현되서 더욱 음양이 확실히 드러나는 녀석의 근육의 움직임이 생동적이다. 원래 사진을 찍을때 이렇게 다량으로 찍는것인지 연이어 촬영된 사진이 앨범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도 모잘라 뒤에 꽂지 못한 여분의 사진이 남아있다. 흐음, 많아서 주체를 못하나 보네. 사삭사삭 사진을 한장 두장 넘기며 그중에 좀더 마음에 드는걸 몇장 뽑아냈다. "한장 없어진다고 설마 뭐라고 그러진 않겠지" 다른여타의 사진들 처럼 한페이지 가득 메우는 커다란 사이즈가 아닌 지갑에 쏙 들어가는 일반 크기인 사진 한장을 빼내어 지갑에다 슬쩍 끼워 넣었다. 이제부턴 내꺼야. 앨범을 다 훑을 예정이던 계획과 달리 사진 한장을 건지고 나서 난 방을 빠져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일찍 일어났네" "응, 근데 형 뭐해?" 이층과 일층을 연결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성진이 형과 인사를 하는데 형은 뭐가 그리 바쁜지 열심히 서류를 뒤적이는 중이였다. 매니저도 보통 바쁜게 아닌 모양이다. 널부러져 있는 수십개의 신문과 하얀 서류들이 바쁘게 펄럭거리고 있는데 우영원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영원이는 웨이트 트레이닝 하러 갔거든. 아침 차려놨으니까 먹고 쉬어. 병원은 언제가는거야?" "어제 다녀왔어" 이것도 어쩌면 직업병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있으면 스케줄을 맞춰주고, 챙겨주고 신경쓰는것 말이다. 누가 매니저 아니랄까봐 남의 스케줄까지 정리하려는 성진이 형을 보니 괜히 웃음이 나온다. 펄럭펄럭 대던 서류들을 정리하며 일어선 형은 주방쪽을 가르킨다. "아침먹고 놀고있어라, 난 보도국에서 한판하고 와야겠다" "이 아침부터?" "거기 갔다오면 주름살이 두배로 느는것 같지만 누구씨가 하도 말썽을 부려놔서 어쩔수가 없어" 지친듯 말한 형은 서류를 정리해 들고 문을 나섰다. 난 그런형을 보고 걱정스럽다기 보다는 어쩐지 형을 분주히 해주기 위해 우영원이 매일 어떤사고를 칠까하고 고민하는것 같다고 여겨져 조그맣게 웃어버렸다. 주방에 놓인 빵과 먹을 거리를 들고 거실로 나와 테이블 위에 쭉- 늘어놓고 티비를 켰다. 스포츠 위성에 채널을 고정 시키고 쇼파 위에 굴러다니는 쿠션을 끌어안고 [아구작 아구작] 혼자만의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겁을상실했어. 아니면 나를 시험하는거던지." 밀폐된 공간에서 울리는 탁한 소리로 잠결에 우영원의 속삭임이 들렸다. 밥을 먹고나니 나른해져서 어찌저찌 가까스로 치우기는 치웠는데 도저히 맨정신으로 있을수 없을것 같더니, 그만 쇼파에 엎드려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정신은 깨어 있는데 눈은 떠지지 않아 숨만 쎅쎅 내쉬고 있는 내옆에 운동에서 돌아온건지 우영원이 머리맡에서 무어라 웅얼이는 소리가 들린다. 좋은소리 일거라고 생각치는 않는다. "일어났어?" 눈을 비비적 거리고 있는데 머리 바로 위에서 우영원의 목소리가 떨어진다. 잘보이지 않아 눈을 가늘게 뜨고 인상을 지푸렸다. 쇼파에 길게 누워있는 나 때문에 바닥에 앉아 있는건지 아니면 원래 바닥을 좋아하는건지 모르겠으나, 우영원은 내 머리맡에 앉아 나를 빤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언제왔어?" 시간을 보니 벌써 오전을 지나 12시가 넘은 오후가 되어있다. 머리가 찡하게 울려서 그대로 엎드려서 고개만 돌려 티비를 봤다. 티비에서는 미식축구가 한창이다. 슈퍼볼 같은데 보통 한국사람이 저런건 잘 좋아하지 않는걸로 아는데 어쩌다 틀어놓은건지 아니면 우영원이 보기 위해 틀어놓은건지는 잘 모르겠다. "좀됐어" 뭐라 그럴까, 확깬다는 표현 보다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랄까, 진짜 안어울린다랄까, 지금 장난하냐? 라고 물어보고 싶은 광경이랄까. 한국사람 대다수가 안본다기 보다는 볼줄 모르고, 싫어하는것에 가까운 슈퍼볼을 보는 우영원은 꽤 잘 어울렸다. 치고, 박고 하는것에 능할것 같은 우영원이니 어찌보면 굉장히 잘 맞는 운동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슈퍼볼이 끝나자 기다렸다는듯 채널을 돌려 참선을 하고 있는 요가 방송을 보는 우영원이라니 이건 정말 아니올시다 이다. [통통], [쿡], [비식] 요즘 전세계적으로 기체조라던지, 몸을 바르게 하는 운동인 요가라던지, 마음을 다스리는 형태의 것들이 유행 중이라 외국 티비에서 저런것이 나오는것은 어색하지 않지만 (사실은 포르투칼에서 요가 방송을 하는걸 보고 깔깔깔 웃어댄적이 있다. 진짜 어색하네라면서) 하지만, 우영원이 그 참선을 따라하고 있는 모습이란 너무나 이상했다. 그래서 난 이녀석이 진짜 지금 도를 닦고 있는 중인가 싶어서 머리를 쇼파에 [통통] 튕기며, 손가락 하나로 옆구리르 [쿡] 찔러보고는, 꿈적을 않는 모습에 [비식] 비웃음을 흘려버렸다. '왕 우끼다' 속으로 [푸흐흐흐] 란 엽기스런 실소를 흘리며 반짝 떠오르는 장난끼에 입가에 미소를 한층 깊게 베어물었다. 장난과 사고치기의 대가인 우영원을 상대로 이런 위험한짓을 하려고 하다니 내가 단단히 돌아버린건 아닌가 싶지만, 황금같은 휴가에 한국에 가지않고 영국에 온 이유는 그것이니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영원-" "........." 나른한 목소리로 녀석을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호오, 불러도 대답없는 그대라 어딘지 정말 안어울리는구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우영원은 꿈쩍을 않고 있다. 티비에선 얼마나 오랫동안 이러고 있어야 하며, 지금 이순간 몸이 정화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라는둥 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난 여전히 누운체로 약간은 나른한 몸때문에 반쯤 눈을 감고 쿠션을 꽉 움켜안고 조용히 말했다. "나 너 좋아해" 여직 찌르고, 부르고 ,비웃어도 꿈적을 않던 우영원이 [스으윽-] 뒤로 돌아본다. 그 모습을 보고 난 눈을 감고 얼굴을 쿠션에다 묻어 버렸다. 계속 하던거나 하시지, 왜 돌아보고 그런데. "별다른 뜻이 있는건 아니고 내마음이 그냥 그렇다고" 말없이 빤히 나를 내려다만 보고 있는 우영원 때문에 어색해진 나는 몸을 흔들흔들 좌우로 흔들며 실컷 사탕을 쥐어줘 놓고는 '그냥 쥐고 있으라고 주는거야' 라는 끔찍한 말처럼 다소 엽기발랄한 말을 늘어 놓았다. 반쯤 잠에 취해서. "너를 예뻐해줄 생각도 없고, 네가 나쁜놈이라고 생각하고, 너한테 마음줄 생각은 없지만, 그냥 나는 네가 좋다고." 고개를 까딱까딱 끄덕이며 상대를 농락하듯 그렇게 말하자 우영원의 굳었던 표정이 인상을 쓴다. "누구 놀리냐?" "좋아해서 좋아한다는건데 그게뭐 어때서" 마치 우영원이 사람들에게 생떼를 피울때 처럼 막무가내로 능글맞게 아주 아주 뺀질뺀질할때 처럼, '난 아무것도 몰라요' 란 눈길로 그냥 좋아하니까 그렇게 말하는거야 라고 말했다. 너도 속좀 뒤집어 져야지 않겠어? 사람들 매일 속썩이고 다니면서 재미 많이 봤잖아. 나의 순수한 고백을 상당히 불소한 표정으로 들은 우영원은 할말을 잃은듯 이마에 깊은 수심을 그리고 가만히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난 우영원이야 나를 보던말던 상관치 않고 나른하게 퍼져오는 잠을 자기위해 눈을 감았다. "하..!" '난 암것두 몰라' 라는 얼굴로 잠을 청해버리자 기가 막힌지 우영원은 어이없다는 소리를 낸다. 이봐, 기막혀 할 사람은 댁이 아니라 날세. 고백이 이렇게 쉬울줄이야. 밤새 고민하고, 매일 땅파고, 사람 피해다니고, 시시때때로 몸을 숨기고 다니던 날들이 모두 허튼짓이었다니 마냥 허망하다. 조그만 용기와 호기심, 그리고 어이없지만 장난으로 얼떨결에 고백한 내가 어둠속 나에게 묻고있다. '허무하다, 그치?' 아직도 심장이 펄덕일 만큼 떨리지만 딱 한걸음만 발 담그면 세상이 달라질수 있다는것이 신기하다. 심각하고 불편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보는 우영원을 마주보며 나는 철없는 아이처럼 웃어 보였다. 올해 봄에는 내 마음속에도 꽃이 만발할것 같다. -사랑이란 이름의 용기, 끝-